[Opinion] 삶과 회복의 이야기 - 브로콜리 펀치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7.1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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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소설은 이유리 작가의 「브로콜리 펀치」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하는 문예지 《문학과 사회》 2021년 봄호를 통해서 발표된 「브로콜리 펀치」는 이유리 작가 특유의 환상적 세계를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삶과 회복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삶과 회복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건 어쩌면 너무 거창할지도 모르겠다. 이유리 작가의 유머와 재치를 담아내기에는 너무 무거운 키워드들이 아닌가. 그렇지만 함축되고 정제된 단편소설의 형식 속에 소설가가 담아낸 드넓은 감정의 지형도를 확인한다면, 독자들도 유머와 재치 속에 숨어 있는 작가의 소중한 통찰력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이유리 작가에 대해서는 앞서 두 차례 다룬 적이 있다. 한 번은 이유리 작가의 등단작 「빨간 열매」을 다루었고, 또 한 번은 작년 하반기 손꼽히는 문단의 화제작인 「둥둥」을 다루었다. 이제 등단 2년 차가 되는 이 신인 작가가 뿜어내는 유머와 환상성은 소소한 유희 이상의 총체적 인식을 담고 있다. 이번에 발표한 「브로콜리 펀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표면적으로는 자고 일어났더니 손이 브로콜리가 되어버린 한 복싱 선수의 건강 회복기인 이 재미있는 소설에서 어떠한 가치 있는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브로콜리 펀치」를 포함한 이유리 작가의 최근 작품들을 소개하고 비교할 기회를 조만간 다시 가져볼 생각이고, 오늘은 「브로콜리 펀치」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장면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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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펀치」의 나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두 개의 사건에 대해 연락을 받는다. 하나는 ‘나’가 돌보고 있는 안필자 할머니의 앵무새 말자가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의 남자친구 원준의 손이 브로콜리가 되었다는 소식이다. 브로콜리로 변한 원준의 손을 치료하는 것을 소설의 중심 사건으로 삼아 앵무새 말자를 떠나보내는 안필자 할머니의 이야기가 주변 사건으로 서술된다.


 

“우리 젊었을 때도 고런 몹쓸 병이 종종 있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손가락이 하루아침에 강낭콩이 되고 버얼건 고추가 되고 그랬지 응. 그게 다 마음에 짐이 커서 그런다. 누구를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으응, 그런 나쁜 것들을 맘속에 오래 넣고 있다 보면 사람이 버틸 수가 없어져.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 응. 맛난 거 먹이고 푸욱 며칠 쉬게 하면 거뜬히 낫긴 했다마는. 죽을병이 아니긴 해도 꼬라지도 우습고 사는 데도 불편하고 영 몹쓸 병이지. 요즘에는 애들한테 접종도 맞추고 해서 많이 없어졌는가 보더만. 원준이 고놈 허약해졌는가보다. 나중에 한번 오라 해라. 닭이라도 고아 먹이게.” (p.128)

 


오른손이 풀냄새 나는 브로콜리가 된 우스운 상황의 배후에는 복싱 선수로서 누군가를 때리고 증오해야 하는 원준의 괴로운 직업의식이 숨어 있었다. 이러한 원준의 마음속 짐을 해결하기 위해 나와 원준과 안필자 할머니와 할머니의 남자친구인 박광석 할아버지는 함께 등산에 나선다. 산 중턱에서 안필자 할머니는 앵무새 말자를 끝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내고 원준은 노래를 우렁차게 소리내어 불러 본다. 낭떠러지에서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며 안필자 할머니와 원준은 각자의 응어리를 풀어나간다.


원준이라는 인물은 여태 이유리 작가의 소설에 그려졌던 인물들 중에서 가장 무겁고 고통스럽고 문제적인 인물인 것 같다. 원준은 직업적으로 타인을 미워해야 한다. 복싱은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이고, 복싱 선수는 상대를 때려눕혀야 하는 직업이다. 상대를 잘 때려눕히려면 무고한 상대방일지라도 때리기 위해 집중해야하고 결국 상대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스스로를 채워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브로콜리 펀치」는 분노하고 증오하며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업으로 삼은 한 사람의 운명이 빚어낸 마음의 병을 함께 치유해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브로콜리 펀치」에서 이유리 작가가 원준이라는 인물을 그려낸 방식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선은 원준이라는 특수한 인물의 모습으로부터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일부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극적(dramatic) 구성에 의해 누군가를 증오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독특한 인물이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 독자 역시 각자의 삶 속에서 해결되지 않는 증오를 경험한 적 있을 지도 모른다. 엄격한 가정 내 질서,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연애 감정, 왜곡된 사회 구조 등 일상적인 폭력이 만연한 환경 속에서 현대인은 해결되지 않는 응어리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복잡한 삶의 양상 속에서 일차원적인 권선징악적 질서는 실현되지 않고 현실의 문제는 점점 더 해결하기 어려운 형태로 심화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현대인은 마음 한편으론 원준을 닮아 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원준이 ‘브로콜리-손’을 치료하는 과정은 현대적 정서 장애로부터 회복하고자 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원준은 평소에 여자친구를 만나 세상사에 대한 자신의 사견을 스스럼 없이 표현하고 다니지만, 복싱에 대한 이야기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과묵해진다. ‘브로콜리-손’ 질환이 발병하면서 원준은 비로소 복싱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물들은 등산에 나선다. 처음으로 마음속 짐을 덜어놓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실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유리 작가의 ‘브로콜리-손’이라는 환상적 소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의 상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극적인 장치에 가까운 것이다. 이유리 작가의 환상적 세계관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비로소 표면으로 드러나고, 인물은 등한시했던 스스로의 문제를 직시하도록 요구받으며, 주변인물들이 그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환상성의 구조는 단순한 유머 요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외면되던 문제로 초점을 집중시키고 독자들의 상처를 환기시키는 강력한 기폭제로 작용한다. 브로콜리 모양의 손은 우스꽝스럽고 흥미를 유발하는 소재로서 출발하지만, 결국 현실의 문제를 다루랴는 따뜻한 시각의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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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꽃

 


소설을 읽고 난 후 독자에게 남는 것은 환상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다. 현실에서는 정서적 상처가 ‘브로콜리-손’을 낳지 않으며, 누군가가 나의 상처를 먼저 알아봐줄 수 없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후 아프로 펀치 펌 같은 둥글둥글 한 브로콜리의 잔상만은 마음속에 뚜렷할 것이다. 소설의 사건들은 현실을 침범할 수 없지만, 소설의 잔상만은 마음속 현실로 살아있을 것이다. 이유리 작가가 그려낸 삶과 회복의 이야기가 현실적 삶에 모종의 방식으로 위로와 용기를 독자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브로콜리 펀치」의 이야기를 하자면 더 자세히 다룰 수 있는 내용들이 정말 많이 남아 있다. 「브로콜리 펀치」에서 드러나는 환상성의 양상과 역할은 이유리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성 속에서 인물들의 평행해질 수도 있고, 한 인물이 특히 부각되는 양상으로 갈 수도 있다. 소설 속 환상성의 기능에 대해서 비교분석해보면 이유리 작가의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몸의 일부나 전체가 변하는 형태의 환상성은 박솔뫼의 소설에서도 발견된다. 근래 한국 소설에서 나타나는 환상성의 양상, 그리고 그것이 빚어내는 분위기는 독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감각을 전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지점들을 조만간 다시 공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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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작가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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