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속을 아는 것은 어렵고, 괴롭다. 스스로조차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졌는지 아는 데에는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참을 고민해 겨우 ‘나는 이런 사람’이라며 자신을 알지 못했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듯해도, 그것은 금세 모순적인 순간의 행동이 안도감을 뚫고 뛰쳐나옴과 동시에 물거품이 된다.
진정으로 제 속을 다 아는 사람이 정말 존재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품어지는 가운데,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 앞에서 한 작품이 서사의 전제에서부터 반전을 내세우며 등장했다. 첫째는, 세상이 망했고 인간들은 각자의 속에 있는 가장 솔직하고도 강한 욕망을 ‘눈으로’ 들일 수 있게 된다는 설정. 둘째는, 별짓을 다 하고 갖은 오해들을 다 끌어올려가며 파헤치려 한다고 해서 인간의 속은 투명하고 왜곡 없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뻔하고도 간과하기 쉬운 사실.
욕망의 특성을 완전히 뒤집어 아포칼립스를 조성하고, 불가피한 생존본능과 빗발치는 이기심 그 사이에서 인격체 간 헤아림의 미학을 여실히 담아낸 한국의 넷플릭스 크리쳐물 드라마, 바로 <스위트홈>이다.
감상하기 전에
CJ는 한국의 콘텐츠 산업에 큰 집중도를 보이고 그만한 기여를 한 바가 있다. 그만큼 우리는 <나의 아저씨>, <디어 마이 프렌즈>, <오 나의 귀신님>, <미생>, <미스터 션샤인> 등 대체로 명작이라 평가받는 드라마 작품들의 크레디트 속에서 CJ의 '스튜디오 드래곤'이라는 제작사를 많이 눈에 들였을 터다.
<스위트홈> 역시 이 제작사의 결과물이다. 덕분에 탄탄한 인프라만큼 <스위트홈>은 국내에서 제작되었다고는 쉬이 믿기 어려울 퀄리티의 크리쳐물로서 거듭났고, 넷플릭스 플랫폼 내에서도 그간 웹툰을 드라마화한 작품들의 성과보다 더 월등한 관심과 인기를 끌어모았다.
나 역시 괴물이 된 사람들을 어떻게 실사화할 것인지, 장편의 웹툰 서사를 어떻게 10부작의 드라마 내에 압축하여 담아낼 것인지 궁금해 공개 날짜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위트홈>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연근이,' '프로틴' 따위의 비현실적 존재들일뿐만 아니라 많은 웹툰들이 드라마화를 거치며 기대치를 반절도 충족시키지 못한 채 묻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 내 아이패드 화면만 들여다보며 종국에는 밤을 지새워버린 내가 그런 걱정을 하는 일은 정말 오지랖이 아닐 수 없었다.
<스위트홈> 오프닝 내레이션과 현수
사람 대신 컴퓨터를 팔에 끼고 ‘그린홈’ 아파트로 이사를 하며 처음 얼굴을 내비치는 한 소년.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아무런 마음도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다. 가릴 곳을 가리는 것 외에는 제 기능을 상실한 듯 대충 걸쳐진 그의 옷가지들. 라면으로 삼시 세 끼를 때우고 시간은 게임으로 때워버리는 생활패턴의 소유자, 현수이다.
그런 그에게도 사실은 이전에 깊게 접어 넣어둔 과거가 있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누군가를 부조리한 것으로부터 구하고 싶다는 마음. 제 스스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할만한 의지. 그리고 그런 눈빛까지. 하지만 그때의 현수를 어둠으로 뒤덮어버린 것은 누구, 또 무엇이었을까. 사실 그것은 종말에 다다른 작중의 세상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보다는 현수를 뒤덮은 어둠과 그 이유를 구원이라 여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먼저 고민하는 편이 더 생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다 떠나서 어쨌든 현수는 어둠 속에 있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현수라는 캐릭터를 생각하는 데 있어 내 포커스가 더욱 집중된 곳은 한 회차씩 넘어갈 때마다 점점 귓속을 맴도는 오프닝 내레이션이었다.
"누군가 말했다.가장 짙은 어둠도가장 흐린 빛에 사라지는 거라고."
현수는 자살할 날짜를 일정 애플리케이션에 메모하고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로그아웃할 준비를 마쳐놓았다. 언제 죽어도 억울하거나 여한이 남을 리 없는 상황 속에 스스로를 내던져 놓고서. 그런데 세상이 먼저 망했다. 인간들이 제 욕망에 잡아먹혀 자아를 잃었다. 원하는 것에 의한, 원하는 것을 위한 존재로 변해버렸다. 주변의 빛이 그렇게 다 사라졌고, 현수를 에워싸고 있던 어둠은 더 이상 특별한 검은색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이기적인 욕망은 한 방울도 남아있지도 않았던 그의 눈앞에, 살려달라 울부짖는 사람들이 자꾸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살아남는 것보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게 더 힘겨운 세상에서 기어이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한편 인간의 똑똑한 눈이 빛이 없는 곳에서 암순응이라는 기능을 하듯, 사방이 컴컴할 뿐인 세상에서도 극 중의 아파트 사람들은 열렬히 사랑하고, 슬퍼하고, 용기를 내고, 분노하고, 욕심을 부리고, 웃기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종말을 견딘다. 세상에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본인들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땀을 흘리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며 몸과 마음을 희생한다. '어차피 다 죽게 될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컵라면과 핫바를 하나라도 더 탐내고, 선크림과 마스크팩을 찾고, 술과 담배로 잠시 동안의 쾌락을 확보한다. 평소엔 별것이라 생각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매 순간 생존의 이유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부대끼는 모습들이 곧 현수의 마음을 살살 자극한다. '구하고 싶다, 살리고 싶다, 지키고 싶다'라고 더 생각하고 각성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에 현수의 욕망이 말을 건다.
'지켜준다고?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물론 현수가 본 아파트 사람들의 모습이 처음부터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 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극한의 상황 앞에서 이성을 잃고 본인들의 우선가치와 생존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다 망했을지 모르는 마당에 가게와 돈, 본인의 체면을 더 중요시하던 편의점 아저씨, 괴물들이 판을 치는 바깥 상황에도 딸이 돌아오지 않아 문을 닫을 수 없다며 난동을 부리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어린이집 원장, 선동하고 선동당하길 반복하며 우매한 동향을 보이는 기타 아파트 주민들까지. <스위트홈>의 초반에서 캐릭터들은 인간의 극단적 이기심에 대한 회의감과 혐오감을 최대치까지 끓어오르도록 했다.
현수 또한 그들의 그런 행동으로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상처를 입었다. 특히 냉철한 리더를 맡은 의대생은 언제 완벽히 괴물이 될지 모르는 현수를 인간으로 대우해주지 않는 동시에 그 능력만큼은 철저히 이용했다. 무엇을 괴물이라 불러야 할지 혼란스러워지는 초반의 내러티브. 그럼에도 현수가 욕망에 온전히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욕망에 잠식되지 않은 현수

현수가 욕망에 온전히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수에게는 무언가를 강하게 욕망할만한 의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본래의 현수는 항상 따듯한 관심과 호의로 사람을 대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만큼 누군가를 챙기고 도우며 미소까지 지어주는 본인의 평소 행동이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믿어는 봤어도, 당연히 문제가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렴 그 누구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 어느 날 선뜻 내민 호의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현수는 고마움 대신 원망과 아니꼬움을 샀고, 따돌림을 당했으며,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악용당하다 종국에는 원해본 적도 없는 끔찍한 사건들을 연이어 맞이해버렸다. 제 생에서 처음, 세상에 대한 사고의 맨 아래층 디폴트 값이, 단 한 번도 의심치 않았던 믿음 하나가 아주 요란하게 꺾여버린 것이다. 그 정신적 트라우마는 현수로 하여금 사사로운 것에 욕망하는 일을 거의 멈춰버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수의 괴물화를 지연시켜 아이들을 구하고 한 블로그에 방문하기까지의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둘째, 인터넷이 끊기기 직전에 현수는 이시영(서이령 역)의 남편이 올린 블로그 게시글을 읽었다. 그 글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증상이 시작되면 민폐가 되기 전에 자살하라고. 다만 그러고 싶지 않다면 무언가 단단히 각오하라고. 하지만 현수는 이미 자살 예정자나 다름이 없었다. 잃을 것도, 살아갈 이유도 없다고 느끼던 그였다. 그런데 증상이 시작되면 하루빨리 자살하라는 이야기를 접하고서도 막상 그는 '꼬르륵'거리는 배꼽시계 소리를 느꼈고 괴물 앞에서 사무치는 공포심을 느꼈다.
이는 굉장히 흥미로운 아이러니의 지점이다. 조금만 이따 시작하려고 책상 위 꺼내 두었던 숙제 앞에서 엄마의 잔소리가 매번 불러일으키는 효과와 엇비슷하다고나 할까? 자살일을 정해두고 살아지는 대로 살아버렸더니 갑자기 세상은 망하기 시작하고, 이제는 하다 못해 각오가 없으면 늦기 전에 죽으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버리면 또 아득바득 살아남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 것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크고도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이유, 현수는 점차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됨과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헤아릴 줄 알게 되었다. 초반에 현수는 괴물 취급을 받으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 신체상태를 적극적으로 이용당했다. 격리 장소에 가둬졌다가, 필요할 때만 괴물들이 서성거리는 구역으로 내보내지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린홈 아파트의 주민들은 갑자기 창궐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앞에 평정심과 윤리적 판단력을 흐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민들로 하여금 인간이라 여기기도 괴물이라 여기기도 애매한 현수에게 차갑고 매몰찬 대우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처음 현수는 돕고 싶은 마음 하나로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 하지만 매일 닥치는 위기, 점점 지쳐가는 몸, 스멀스멀 올라오는 회의감은 곧 현수를 무너뜨리고 그의 욕망이 완전히 일어서기 직전까지 상황을 몰아세웠는데, 이 지점에서 발휘된 것이 바로 헤아림의 힘이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결코 절대적으로 나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 얼마 되지도 않는 식량을 나눠 먹고, 마스크팩을 주고받고, 무서운 이야기를 둘러앉아 듣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게 주점지기를 맡아 앉아 있기도 하는 모습은 여느 때의 우리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그들이 현수를 대했던 태도에 일부러 악의를 품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괴물취급을 당하던 현수의 눈에 들어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제 생존을 위해 자신을 사냥개 취급하던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도 어쩌면 부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과거에는 의도와 전혀 다른 오해를, 결과를 강제 도출당했던 트라우마가 있다. 누구보다 그것에 아파했고 피해 입어보았다. 결은 다를지 모르지만 현수는 원망과 따돌림을 당하고 가족을 잃었던, 그저 아프기만 했던 기억 사이에서 주민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데이터 베이스를 끌어올린 것이다. '저들도 끔찍한 광경과 생존 위기의 상황에서 혼란스러웠겠지,' '냉철하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겠지,' '저렇게 부대끼며 버티는 것을 보면 그만큼이나 살고 싶은 것이겠지,' 라며 그들을 헤아릴 수 있도록. 이는 곧 <스위트홈>의 주제의식과도 연결된다.
괴물화
작중에서 인간들은 어쩌다 서로를 죽이고 세상을 어지럽히도록 변해버린 것일까. 현수와 같은 상태의 인물로 등장한 김성철(정의명 역)은 인류의 진화가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현수와 본인은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진화론이 <스위트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라고 믿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진화라고 부르기에는 사태가 너무나도 폭발적이고 과하게 그려졌다. 게다가 정말 진화가 괴물화의 명목이라면, 굳이 '욕망'이 그 발현의 원인으로서 작용할 필요도 없다. 또, <스위트홈>이 비추는 세상의 전경은 죄다 인간들의 터들뿐이다. 제각각 다른 높이의 건물들이 빼곡히 차 있고, 그 사이에서도 새로운 건축물들은 계속해서 낡은 것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는 모양새다. 그만큼 <스위트홈>은 이미 생태계의 먹이사슬 맨꼭대기 자리에 서 있는 인간들을 충분히 비추고 있다.
그래서 내가 본 괴물화 사태는 사소하고 단순한 것에서부터 깊은 무언가까지 다양하게 이해받지 못하고 헤아려지지 못한 이들의 통곡이고 호소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감에도 본질적인 외로움을 해소받지 못하던 인간들이 종국에는 욕망과 속마음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해버린 결과이다. 폭주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정의명이 굳이 작중에서 '진화'라는 단어로 사태를 규정하도록 설정해야 했다면, 그 이유는 아마 인간들 사이에도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관계적 먹이사슬이 복잡하게 얽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곧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소외시키고 고통받게 하는 일순위적 원인이 되었을 테니까.
반려묘의 밥그릇은 채워줘도 제 밥은 먹고 싶은 대로 챙겨 먹을 수 없었던 여자, 그녀는 어딘가에서 합격 소식을 전해 듣는 대신 추후 술자리 참석을 권유받았다. 미스코리아나 모델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전화 발신자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해줄 수도, 그럴 의사도, 사연과 사정을 알고 조치를 취해줄 수도 없었다. 무척이나 화가 나 있던 회사원은 미치도록 과장을 증오하고 있었다. 업무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갑질 비슷한 것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직장 상사되는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모두 내보일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생계부터 시작해 여러 문제가 그의 입을 절로 틀어막았을 테니까. 예초기를 매고 언제 재개발에 들어갈지 모르는 아파트를 관리하던 경비아저씨는 그럼에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 마당에 같은 아파트 관계자라는 사람은 쉬지 말고 침대를 빼라며 그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이들처럼 세상이 혼자인 것 같고, 참아도 참아도 끝은 없는 듯하고, 제정신 하나 붙잡으며 사는 게 너무나도 힘든 것만 같은 어느 날은 누구에게나 한 번씩 찾아온다. 그런 기분에 빠져버리면 마음을 다잡는 데 얼마나 노력이 필요하던가. 어떤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고, 인정사정없이 뜻대로 행동해버리고 싶은 욕구는 얼마나 치솟던가. <스위트홈>에서의 사람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마음을 다잡는 데 실패해버린 것이다. 부정적이고 어쩌면 살벌하다 못해 끔찍할지도 모르는 생각들을 끝내 진정시키지 못하고, 이성의 끈 끝자락을 그만 놓쳐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괴물화를 막을 백신은 당연히 헤아림이겠다. 살아남아 조금만 더 서로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쓰다듬어줄 수 있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 이 아포칼립스를 그나마 막을 방법이겠다.
코로나 팬데믹과 <스위트홈>
<스위트홈>은 참 적절한 시기에 잘 등장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보고, 반성해보면 좋을 계기점들이 이 드라마에는 참 많이 내포되어있다. 하나만 짚어보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예상보다 더 오래 소중한 일상을 포기하고 지낸,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고 불우해진, 미래를 위해 진척할 수 없게 된, 어쨌거나 다방면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 나할 것 없이 수두룩한 가운데,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바이러스와 싸워야 할 우리가 종종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다. 그린홈 아파트 주민들이 괴물을 앞에 두고 문을 닫니 마니, 옥신각신 다투던 꼴과 다를 바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작중에서나 현실에서나, 아무 주장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었던 엑스트라의 죽음이다. 피가 다 말라죽어버린 이름도 모를 남자, 정주행을 마치고 나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남자. 누군가가 불특정한 미지의 사람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제각각의 주장을 내세우느라 바쁠 때, 분명 팽팽한 여론과 갈등 그 사이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더욱 소외받는 사람들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판의 미로>의 주인공 오필리아도, 다 쪼그라들어버려 기억도 할 수 없는 <스위트홈>의 그 남자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정작 몇 안되는 주요 인물들의 용기와 희생으로만 겨우 봉쇄되었던 그린홈 아파트.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주민들의 다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박규영(윤지수 역)이 기타를 연주하는데 멜로디를 듣고 옆에 앉은 현수가 이라는 곡명을 지어주었을 때, 한때는 사람이었을 괴물을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던 고윤정(박유리 역)에 이진욱(편상욱 역)이 "괜찮아,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라며 제 나름의 다독임을 건넸을 때, 줄곧 소외받고 이용당하던 현수를 편의점 아주머니가 진심을 담아 안았을 때, 그런 때에 그린홈 아파트에는 이따금씩 온기가 맴돌았다. 감동을 짜내는 신파와 비슷한 듯도 하지만 어딘가 다른 뉘앙스. 바로 '인간다움'을 존중하고 추구하는, 휴머니즘의 향연이 가져오는 차이점이다. '인간다움.' 우리가 현재 시점에서 <스위트홈>을 통해 재고해보면 좋을 덕목이 여기에 있다.
사람이기에 부정적인 상황 앞에서 부정적인 무드와 리액션을 가질 수 있고,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이기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을 수도, 폭력적이었을 수도, 편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람이니까, 한편으로는 박유리의 이러한 대사를 마음에 새기고 그 의미를 현실에 응용시켜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세상이니까, 살아남았으니까,
더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