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대성당 - 번역의 순간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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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완벽한 번역도 있을 수 없다.
번역 작업은 훌륭한 독서법이다. 좋은 번역은 읽기 쉬운 번역이 아니라 읽기 어렵더라도 원문의 구체적인 표현과 느낌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의미를 살리는 번역이라고 생각한다(물론 그 느낌이라는 것도 결국 역자의 주관적 판단의 영역이긴 하다.) 다시 말해 원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하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고, 번역은 그 의도를 파악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글 한 편의 설계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꼼꼼한 독서 방법이다.
그러나 완벽한 번역은 불가능하다. 완벽한 번역은 원문의 의미값과 번역문의 의미값이 일대일로 동일하게 대응되는 방식을 뜻 할 텐데 그것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된다. 서로 다른 언어는 서로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단어가 가지는 중심적인 의미는 같을지 몰라도 각자의 언어 체계와 문화 안에서 가지는 고유한 위치와 어감마저도 같을 수는 없다. Bread는 bread고 빵은 빵이다. 영어의 Bread와 가장 가까운 한국말이 빵일 뿐이다.
이것은 비단 외국어와 자국어라는 특정 국가의 언어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번역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는 책뿐만 아니라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될 수도 있다(다면적인 것이라면 뭐든지!). 가끔 우리는 타인과 내가 같은 단어를 두고도 각자 다른 사전을 가지고 말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만인은 만인에 대해 서로 다른 의사소통 도구와 해석의 틀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기만의 언어로 구조화된 사고체계와 저마다의 독자적인 경험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여 복잡한 세상 속에서 타인과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한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번역하는 번역가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번역할수록 많은 에너지를 쏟고 상대방의 언어를 나의 것으로, 나의 언어를 상대방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우리는 매번 완벽한 번역/통일을 꿈꾼다. 그리고 우리는 매번 실패한다.
번역이나 소통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완전한 번역/소통의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쉽게 말해 완전히 같으면 소통이 필요 없다. 다르니까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이상화된 소통은 완전한 합일의 상태를 지향한다. 따라서 모든 번역은 필연적으로 실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실패에는 분명한 의의가 있다. 번역이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못 되더라도 소통에 대한 의지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실패의 과정을 통해 나의 소통에 대한 의지와 상대방의 소통에 대한 의지가 공명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 공명 자체를 소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카버의 단편들을 연달아 읽다가 문득 이 사람의 소설을 번역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카버의 글이 다른 작가들에 비해 유독 매력적이어서 라기보다는 쉬워 보여서였다(물론 매력적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일상적이고 단순했고, 단편들밖에 없어 분량도 적고 문장의 길이들도 길지 않았다. <대성당(1983)>을 원서로 사서 읽어보았다. 역시 쉬웠다. 번역 연습을 하기에 좋아 보였다. 해보기로 마음 먹었고, 난 그렇게 했다.
번역은 어려웠다. 정말 어려웠다. 단문 위주의 드라이한 톤을 옮기기 쉽지 않았고 단어의 중의적인 의미라던가 영어로만 가능한 표현들도 큰 문제였다. 번역을 하다 보니 카버가 짐작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단어 선택에 신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 대성당을 다시 읽으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카버의 대표작이자 소설집<대성당>의 표제작인 ‘대성당’도 결국 번역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오래전 좋지 못한 일로 헤어진 아들과의 재회를 앞둔 아버지, 부엌 한가운데 고장 난 냉장고처럼 망가진 관계를 방치하는 오래된 커플, 아내와 사별한 뒤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전전긍긍하는 남자, 치료시설에 들어가 과거를 회상하는 알코올 중독자들. 단편집 <대성당>에 수록된 단편의 주인공들은 이벤트 없는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백인 중산층이며, 높은 확률로 알코올 중독자이거나 오랜 기간 알코올중독과 씨름했던 경력이 있다.
그들은 구원이나 희망이란 단어와는 무관한 인생을 산 지 오래고, 반복되어 늘어져 버린 테이프 같은 일상 속에서 술 한잔을 따라 놓은 채 자신의 삶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고민한다. 지루한 중산층의 삶의 단면들을 건조하고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카버의 단편들은 각각의 단편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견고한 유니버스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대성당은 몇몇 단편을 발췌독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 권을 목차의 순서대로 다 읽어야 하는 단편집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소설은 역시 표제작 ‘대성당’이다. 이 단편에는 앞서 말했듯 카버의 모든 단편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번역의 시도가 존재한다.
‘대성당’은 아내의 오랜 친구인 맹인 남자를 집에 초대하게 된 주인공의 1인칭 소설이다. 처음에 덥수룩하게 턱수염을 기른 맹인이 그의 집 현관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남자는 로버트라는 맹인을 별로 탐탁지 않아 했다. 그는 맹인에 대한 이상한 편견과 자신보다도 아내와 더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약간의 불쾌감으로 인해 은근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맹인을 옆에 앉혀 두고 TV를 튼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례한 제스처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자와 로버트의 소통의 제스처로 이어지게 된다.
우연히 TV에 대성당이 나왔고 남자는 묻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느냐는 겁니다.” 로버트는 방금 TV에서 나온 대강의 설명이 내가 대성당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고 모양에 대한 감은 없다고 말한다. 두 사람이 대성당과 신앙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로버트는 남자에게 자신이 대성당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게 대성당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다. 방법은 두꺼운 쇼핑백 위에 자국을 깊게 남기며 마치 점자책을 파듯 펜을 꾹꾹 눌러 대성당을 그리는 것이다. 남자는 처음에는 이것이 무의미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마침 약 기운에도 취해 있던 터라 시작은 해보았고, 그는 이 대목에서 무언가 열리는 듯한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하게 된다. 남자는 로버트의 손을 자신의 손 위에 포갠 채 그를 위해 대성당을 그려주며 어떤 번역의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그것은 대성당이라는 비주얼의 촉각화, 시각에서 촉각으로의 번역이다. 로버트는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눈을 감기를 권한다. 남자는 눈을 감고, 로버트와 같은 조건으로 눈으로 대성당의 모습을 보지 않고 손가락 끝의 열린 감각으로 대성당의 자국을 느끼기 시작한다. 단순히 맹인이 세상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간접 체험을 넘어 남자는 새로운 감각기관이 하나 더 열리는 듯한 확장을 경험한다. 중요한 점은 이것-누군가의 심상을 몸으로 이해해 보고자 하는 노력 자체-이 그가 이전에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종류의 일이라는 데 있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It’s really something,” I said.
굳이 마지막 문장을 원어로 옮겨 적은 이유는, 번역본 보다 원문일 때 더 생각해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번역본에서 이 마지막 문장은 “이거 정말 대단하군요.”라 번역되어 있다. 의미는 통하나 something의 미묘한 뉘앙스가 한국어로 번역되기 대단히 어려워서 아쉽다. 보기에 이 대목의 something은 놀라운 발견(대단하다는)의 의미로서도 쓰이지만 정말로 어떤 ‘것’, 그러니까 해당 단편집의 또다른 단편 제목인 ‘A Small good thing(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thing/것과 의미적으로 통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에서 a small good thing은 소설의 종반부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가 그들을 위로하는 의외의 인물-빵집 주인에게서 건네어 받은 따듯한 빵을 의미한다. 빵집 주인의 위로가 그들의 아들을 살아 돌아오게 만들 수는 없다. 그들을 자식 잃은 슬픔에서 해방시켜줄 수는 있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롤빵이 그들의 허기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고, 빵집 주인의 따듯한 말 한마디가 아주 잠시지만 부부에게는 누군가와 슬픔을 공유한다는 위로를 줄 수는 있다(누군가는 착각이라고 하겠지만, 그런 분들은 카버의 초기 단편들을 보시라. 훨씬 차갑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무언가로서 고통과 슬픔에 대한 번역의 시도가 있다는 것. 비록 맹인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남자가 눈을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편협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적어도 번역의 시도가 한 번은 있었다는 것. 그 한 번의 시도를 경험한 상태와 한 번의 시도도 없었던 상태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는 것. 따라서 '대성당' 마지막 문장의 something과 A small good thing의 두 thing은 물건일수도 있고 작은 사건일 수도 있는, 희망이라기보단 희망의 가능성이고 소통이라기보단 소통의 가능성으로 남아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코멘트다. 딱 그 정도 수준의 것이 망망대해 같은 삶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의 최대이자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나의 번역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래는 차례대로 ‘대성당’의 한 대목을 내가 번역한 버전과 김연수 작가가 번역한 정식 출판 버전이다.
먼저 내가 번역한 버전.
그는 나의 손을, 펜을 쥔 손을 잡았다. 그는 그의 손을 나의 손 위에 포개어 놓았다. “어서 친구, 그리게나,” 그가 말했다. “그리게. 자네도 알게 될 거야. 나도 쫓아가도록 하지. 괜찮을 거야. 내가 지금 말하는 대로 그냥 시작하게. 곧 알게 될 거야. 그리기를 시작하게,” 맹인 남자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집처럼 보이는 네모상자 하나를 그렸다. 그건 내가 사는 집일 수도 있었겠지. 그러고 나선 그 위에 지붕을 얹었다. 지붕의 양 쪽 끝에는 뾰족한 첨탑들을 그리고. 미친 짓이지.
“훌륭해,” 그가 말했다. “대단해. 아주 잘하고 있어,” 그가 말했다. ”자네 인생에 지금 하는 것 같은 이런 일을 해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안 그런가, 친구? 뭐, 인생이란 묘한 것이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 계속하게. 계속 그리라고.”
나는 아치형 장식이 있는 창문들을 그렸다. 나는 버팀벽도 그렸다. 나는 큰 문들을 달았다.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어느새 텔레비전 방송은 송출이 끊겼다. 난 펜을 내려놓고 손을 쥐었다 폈다. 맹인이 종이 위를 더듬었다. 그는 손가락 끝 부분으로 종이 위를, 내가 그린 그림의 자국들을 모두 훑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군,” 맹인이 말했다.
다음은 김연수 작가의 버전이다.
그는 내 손, 펜을 쥔 손을 찾았다. 그는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시작하게나, 이 사람아. 그려봐.” 그가 말했다. “그려봐. 뭘 하자는 건지 알게 될 거야. 내가 자네 손을 따라 움직이겠네. 괜찮아. 내가말한 대로 시작해보게나.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야. 그려봐.” 맹인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집처럼 생긴 네모를 하나 그렸다. 그건 내가 사는 집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위에 지붕을 얹었다. 지붕의 양쪽 끝에다가 나는 첨탑을 그렸다. 바보짓.
“멋지군.” 그가 말했다. “끝내줘, 정말 잘하고 있어.” 그가 말했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나, 이 사람아? 그러기에 삶이란 희한한 걸세. 잘 알다시피, 계속해. 멈추지 말고.”
나는 아치 모양 창문들을 그렸다. 나는 버팀도리를 그렸다. 나는 큰문들도 만들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TV 방송은 끝났다. 나는 볼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쥐었다가 폈다. 맹인은 종이 위를 더듬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종이 위, 내가 그려 놓은 것을 죄다 만져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는군.” 맹인이 말했다.
같은 영어 원문을 나와 김연수 작가가 어떻게 달리 번역했는지를 보면 참으로 흥미롭다. 하나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각자의 사전을 가지고 헤쳐 모이는 것이 번역이다.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완벽한 번역도 있을 수 없다. 완벽한 번역이 없기에 정해진 답처럼 완벽한 번역본도 없다. 뒤집어 말하면 원문은 모든 종류의 번역에 대해 열려있다.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자세만 갖춰져 있다면 모든 오역은 허용된다. 사실 허용 안 해도 별수 없다. 틀렸다 해도 뭘 어쩔 것인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판본을 내면 그만인 것이다.
[노상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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