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 최초로 영화감독이 되다 [영화]

알리스 기 (1873-1968)
글 입력 2021.07.0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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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 혹은 '영화의 원형'을 떠올려보자. 많은 이들이 프랑스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상영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을 떠올릴 것이다. <열차의 도착>(1895)은 특별한 스토리나 편집 없이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만 보여주는 50초의 짧은 단편 영화이다. 지금 우리가 쉽게 접하는 '극영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최초의 극영화'는 누가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주류 영화사는 '조르주 멜리에스'라고 답한다. 이전의 뤼미에르 형제와 토머스 에디슨의 영화에서 현실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이 같았다면,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에서부터 현실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이 달라진다. 그의 작품 <달 세계 여행>(1902)은 약 30개의 숏이 연결되며 하나의 극적인 이야기를 만든다.

 

하지만 사실 <열차의 도착>(1895)이 세상에 나온 지 1년 만에, 최초의 극영화인 <양배추 요정>(1896)이 만들어졌었다. 다들 <열차의 도착>(1895)이나 <달 세계 여행>(1902)은 들어보았겠지만, <양배추 요정>(1896)은 생소할 것이다. 1분 남짓한 길이의 <양배추 요정>(1896)은 남자아이들은 양배추밭에서, 여자아이들은 장미꽃밭에서 태어난다는 프랑스 민담에 기초하고 있다. 영화는 양배추의 밑동에서 남자 갓난아이를 뽑아 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피식- 나오는 <양배추 요정>(1896)을 제작한 이는, '알리스 기'(1873-1968)다. 우리에게 이 이름은 왜 이토록 낯설까. 이 낯선 이름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일까?

 

 

 

알리스 기 (1873-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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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알리스 기는 영화사 고몽(당시 사진 카메라 개발 및 제작사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영화사 사장인 레옹 고몽과 함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의 영화 상영회에 참석한다. 세계 최초 영화 상영을 목격한 그는 레옹에게 영화를 만들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경험 없는 20대 초반이었지만, 알리스 기는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해 최초의 극영화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그는 비서로 일하며, 여유 시간엔 영화를 찍게 된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알리스 기의 영화가 주된 볼거리가 된다. 고몽 사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알리스 기는 총괄 제작자로 고몽 사의 영화들을 진두지휘한다. 1896년부터 1907년까지 알리스 기는 (3분에서 10분 사이의 길이의) 400편이 넘는 영화를 감독했다.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시나리오를 쓰고, 로케이션 장소를 찾아 나서고, 의상을 손수 만들었다. 스스로 연기하기도 했다. 고몽 사에서 알리스 기는 감독, 제작, 배우까지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06년, 알리스 기는 <예수의 생애>(1906)를 제작했다. 엑스트라가 300명이 넘고 상영시간 또한 33분에 달하는 이 영화는 당시 고몽 사의 역량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예수의 생애>(1906)는 파리 사진 협회에서 레옹이 참석한 가운데 처음 공개됐다. 알리스 기는 상영 때 감독으로 호명되는 영예를 얻었다.

 

1984년 프랑스의 영화평론가이자 영화 역사가 조르주 사둘은 그의 저서 '영화의 역사'에서 <예수의 생애>(1906)의 감독을 '빅토랭 자셋'으로 기록한다. 빅토랭은 남자였고, 알리스 기는 여자였기 때문에 여자가 정교한 연출을 했으리라 믿지 못한 것이다. (알리스 기가 사망하고 3년 후인 1971년에야 프랑시스 라카생과 찰스 포드가 이를 바로잡았고 조르주 사둘 또한 의견을 바꿨다. 프랑스에서 알리스 기에 대한 조명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이루어졌다. 알리스 기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성이 우세한 영화계가 여성에게 갖는 편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06년 고몽 사는 카메라 제조사를 넘어 성공적 영화 제작사로 자리 잡는다. 1907년 알리스 기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간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10년 9월 7일, 뉴욕 퀸스의 플러싱에서 알리스 기는 자신의 영화사 솔랙스를 세운다. 1912년에는 스튜디오를 설립해 첫 여성 스튜디오 운영자가 된다. (할리우드가 탄생하기도 전이다!) 미국에서도 알리스 기는 제작자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3백 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한다.

 

앞서 알리스 기가 다양한 영역의 역할을 넘나들었다고 했는데, 그는 영화 테크놀로지(기술)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초기 무성영화 시기에 고몽 사는 사운드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그리고 사운드를 영화에 적용하려 했는데 알리스 기는 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고몽 사는 초기 사운드-이미지 동기화 시스템인 크로노폰의 특허를 얻었는데, 알리스 기는 이를 토대로 일종의 음악 퍼포먼스 발성영화인 포노센을 직접 감독하거나 총괄했다.

  

1900년에서 1906년 사이에 알리스 기는 파리 오페라의 독주자와 영화를 백 편 이상 찍었다. (먼저 배우의 목소리와 댄스 음악을 왁스 실린더에 녹음한다. 그 후 스튜디오에서 축음기 녹음에 맞춰 완벽하게 일치할 때까지 배우가 역할을 연습한다. 그다음에는 영화 장면을 촬영한다. 크로노폰을 통해 축음기 녹음과 촬영 장면을 일치시켰다.) 이 외에도 흑백 필름 프레임에 색을 입히는 틴팅이나 이중 인화 같은 기술들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실험했고, 최초로 흑인이 출연하는 영화를 만들기도 하는 등,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솔랙스가 파산한 후 알리스 기의 커리어는 유지되지 못한다. 이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알리스 기는 계속해서 영화계에 복귀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는 자서전을 썼지만 영화계에서 잊혔기에 출판사를 찾지 못했다. 1957년 3월 16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루이 고몽이 특별전을 열어도 주목받지 못했다. 알리스 기는 85세가 되어서야 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 최고 훈장)을 받았고, 그렇게 인정받아 자랑스러워했다. 1968년 3월 24일에 숨을 거둔다.


 

 

여성 최초로 영화감독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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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를 다루는 수업에서 <미국시민 되기>(1912)라는 작품을 통해 '알리스 기-블라쉐'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 수업시간에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첫 여성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인상 깊었기에 얼핏 지나간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7월 1일부터 진행된 한국영상자료원의 온라인 VOD 기획전 <여성 최초로 영화감독이 되다: 알리스 기-블라쉐>를 통해 알리스 기의 초기 단편영화 <큐피드와 혜성>(1911), <쪼개진 집>(1913)과 그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알리스 기 블라쉐>(1997)를 관람할 수 있었다. (해당 기획전은 7월 14일까지 무료로 진행된다.)

 

알리스 기의 삶, 온통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뒤덮인 그의 생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더 많은 작품을 찾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살풋 들었다. (알리스 기는 1896년부터 1920년까지 천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지만, 지금은 100여 편의 영화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동시에, 알리스 기 외에도 초기 영화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접하고 싶어졌다. 복원되지 못한 목소리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앞으로 복원할 목소리들이 얼마나 많을까. 씁쓸하면서도, 동시에 기대가 된다.

 

알리스 기의 이름은 영화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져 있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고몽 사의 창립자인 레옹 고몽은 초기 영화 제작의 기술 혁신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소속 감독들을 평가절하했다. (현재는 복권되었지만, 고몽 사에서 초기 영화 카탈로그 작업을 하며 알리스 기의 이름을 빠트리거나 지웠다고 한다.) 또한 초기 영화에는 크레디트가 포함되지 않았고, 저작권 개념이 희박했다. 작품이 소실되는 등, 그의 작품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아카이빙과도 관계가 있을 터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여성에 대한 차별 아닐까. 알리스 기는 앞서 언급했던 뤼미에르 형제와 멜리에스보다 더 오랜 커리어를 지속했다. 또한 다양한 장르와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총 1,000편이 넘는 영화를 연출, 제작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알리스 기'라는 이름은 이토록 낯설다.

 

카챠 라가넬리의 다큐멘터리 <알리스 기 블라쉐>(1997)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왜 여성이 영화 예술이란 멋진 기회를 잡아 성공과 행복을 누리지 않는지 궁금했습니다. 그 어떤 예술보다도 완벽한 예술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여성의 재능을 활발히 펼치기 좋은 분야입니다. 남자가 우세한 영화계는 여성을 향한 편견이 강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이런 편견은 여러 예술에서 사라졌죠. 연기와 음악 미술과 문학에서 오래도록 여성은 성공한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고 다른 예술을 영화 작업과 떼어놓을 수 없는 만큼 왜 여성 영화감독이 드문지 의아해집니다. 영화 연출에서 여자가 남자만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부분은 없습니다. 이 새로운 예술의 기술적 측면을 완벽히 익히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영화와 연극 기술 어느 쪽이든 여성에게 적합한 분야라고 믿습니다."

 

 

참고자료

이선주 <알리스 기의 '기술적 작가성'> (2017)

카챠 라가넬리 <알리스 기 블라쉐>(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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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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