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페르소나와 그림자: 크루엘라 [영화]

카페에서 영화 마시기, 첫 번째 잔.
글 입력 2021.07.0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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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 혐오’라는 말을 아는가? 동족 혐오는 자신과 비슷한 것에 대해 묘한 거부감 또는 심한 혐오감을 느끼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용어도 넓게 본다면 동족 혐오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인간은 매우 효율적인 존재다.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사용하기 편한 방향으로 언어 체계를 바꾸며 살아가기 편한 방향으로 기억을 왜곡하고 살아간다. 다시 말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항상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자 분투하는 우리가 '부들부들' 떨 정도로 어떤 대상을 싫어하게 되었다면?

 

그렇다면 그 대상은 필시 우리가 에너지를 써 가며 헐뜯지 않으면 안 되는―무언가 특별한 의미 를 가진 존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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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브 융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외면적으로 남에게 보여지기를 바라는 자신의 모습, 즉 사회적 자아다. 세간의 밈을 빌려 말하자면 “이렇게 프로페셔널한 직장인으로서 엑셀 활용도 잘하는 나, 제법 멋있어요.”에서 ‘이렇게 프로페셔널한 직장인인 나’에 해당하는 것이 페르소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 알다시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과 실제 나의 내면은 다르다. 융은 이렇게 페르소나에 눌려 있는 자아들 중 특히 인간의 가장 어둡고 사악한 원형을 ‘그림자’라고 명명한다. 하루 살아낼 에너지도 부족한 우리가 굳이굳이 누군가를 경멸하며 바득바득 에너지 소모를 일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해당 대상에게서 우리의 ‘그림자’를 보기 때문이다.

 

 

 

'크루엘라'와 '에스텔라'


 

*경고!! 하단 내용에는 영화 <크루엘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영화 <크루엘라>의 주제의식은 주인공의 두 자아, ‘크루엘라’와 ‘에스텔라’의 관계성 속에 담겨 있다. 이때 ‘크루엘라’는 그림자적 성격을 가지는 자아이며 ‘에스텔라’는 페르소나적 성격을 가지는 자아다. 크루엘라는 주인공의 본모습에 해당하는 모습으로서 태어났을 때부터 반은 검고 반은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다소 반사회적인 인물이다. 에스텔라는 본래의 강렬한 흑백 반반머리를 적갈색 염색으로 숨긴 채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는 착하고 너드미 넘치는 소녀다.

 

극 중에서 전반부를 지배하는 것은 에스텔라다. 주인공은 에스텔라라는 이름으로만 불리며 그 자신도 자기를 에스텔라라고 인식한다. 여기서 ‘에스텔라’라는 이름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어머니 캐서린은 주인공에게 지속적으로 ‘크루엘라를 꺼내 놓지 마라’는 요지의 압박을 가하고, 어머니를 잃은 후 맞이한 친구들도 도둑질은 할지언정 ‘가족’과 같이 평화적인 가치를 그녀에게 강요한다. 즉, 에스텔라라는 이름에는 세상이 주인공에게 요구하는 바람직한 요소가 집약되어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동경하던 패션 디자이너 바로네스 남작 부인의 의상팀에 취직하는 그 기적적인 순간까지도 에스텔라라는 이름을 쓴다. 주인공이 자신을 ‘크루엘라’라고 처음 명명하게 되는 것은 남작 부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원수였음을 알게 된 다음 날 아침부터다. 주인공은 자신의 것이었던 목걸이를 되찾기 위해 낮에는 충실한 직원 에스텔라 노릇을 하고 밤에는 복수심에 불타는 패션계의 루키 크루엘라가 되어 남작 부인의 명성을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크루엘라가 등장한 이 시점부터 주인공은 점차 에스텔라를 잃기 시작하는데, 극 중후반부에 가서는 급기야 에스텔라여야만 하는 낮 시간대에도 크루엘라적인 모습 ― 어딘가 삐딱해 보이는 눈빛과 실소를 터트리는 등의 살벌한 태도 ― 이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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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크루엘라의 이러한 모습들은 사실 그녀가 증오해 마지않는 남작 부인의 모습과 상당히 많이 닮았다. '그림자 뒤의 그림자'라고나 할까. 주인공이 에스텔라였던 시절, 남작 부인은 피 흘리는 에스텔라의 손을 보고도 “이런 색깔의 천을 가져와”라고 무미건조하게 일갈한다. 사람이 다친 것보다 옷이 먼저이다. 그리고 극 후반부에서는 크루엘라가 달마시안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저 강아지들로 옷을 만들면…” 남작 부인과 마찬가지로 크루엘라에게는 강아지의 생명보다 옷이 먼저가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남작 부인처럼, 크루엘라는 점점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가 되어간다.

 

크루엘라가 서서히 에스텔라의 영역까지 뻗어나갈 무렵, 주인공은 남작 부인과 단둘이 식당에 간다. 이때 남작 부인은 주인공의 디자인 덕분에 자신의 컬렉션이 성공한 것임에도 건배사를 아주 당당하게 “For me(나를 위하여)”라고 외친다. 주인공은 이에 매우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자신을 위해 밤마다 트럭을 몰고 분장을 하는 등 쇼맨십에 기꺼이 동참해주는 친구들을 향해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 “고마워.”라는 말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불만을 가지는 친구들에게 주인공은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런 건 에스텔라나 하는 거야.”
 

 

이처럼 크루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작 부인을 증오하면 할수록 그녀와 더욱더 비슷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림자를 증오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것에 대한 집착을 키워가는 우리의 모습이 크루엘라에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럽 추가: 크루엘라를 위하여!


 

앞서 우리는 에스텔라를 페르소나로, 크루엘라를 그림자로 보았다. 그런데 크루엘라도 남작 부인 앞에서는 오히려 페르소나에 가깝게 보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크루엘라는 에스텔라(白, 페르소나)와 남작 부인(黑, 그림자) 사이에 놓인, 마치 그녀의 머리색처럼 태생적으로 '반반'인 존재이다.

 

필자가 보건대 크루엘라는 딱 적당히 미친  캐릭터다. 수많은 영화 리뷰들은 크루엘라가 마치 조커와 유사한 빌런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악동'이지 사악한 '빌런'은 아니다. 가령 크루엘라는 결말 부분에서 재스퍼와 호레이스에게 "내가 가진 것은 너희가 전부야."라고 실토하며 자신이 혼자서는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끝까지 "왜 나만 빼고 무능력한 거야?"라고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주변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완벽한 빌런, 남작 부인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크루엘라는 자신을 실제로 죽이려고 했던 남작 부인과 달리 달마시안들을 실제로 죽이지는 못했다. 이것 역시 그녀가 인간성을 모두 버리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나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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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듯 크루엘라는 '적당히' 미쳐있고 기존의 가치 또한 포기하지 않은 (어찌 보면) 중립적인 존재임에도, 캐서린과 재스퍼 및 호레이스에게는 끊임없이 "너 말고 에스텔라를 불러오라"는 요구를 받고, 남작 부인에게서는 "죽어라"는 협박을 받는다.  다시 말해 중간자인 크루엘라는 선에게도 악에게도 그 존재를 부정당하는 반선반악의 존재라고 볼 수 있겠다.

 

이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장면은 죽다 살아난 크루엘라가 남작 부인에게 복수하는 대목이다. 주인공이 죽었다고 보도가 난 이후 처음으로 열린 남작 부인의 컬렉션 전시에서 크루엘라는 자신의 그림자인 남작 부인과의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한다. 그녀가 선택한 전략은 싸움도, 분노도 아니었다. 다만 '당신의 그 모든 위협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자신의 온몸을 드러내 남작 부인 앞에 들이밀었을 뿐이다.

 

남작 부인은 크루엘라의 형상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수많은 고객을 마주한 채―부정할 수 없이 다가온 크루엘라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며―인정하기 싫은 그 문구를 기어코 자신의 입으로 외치게 된다.

 

 
"To Cruella! (크루엘라를 위하여!)"
 

 

그리고 이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들을 무자비하게 지워버리려는 세상에 대한, 크루엘라의 값진 승리일 것이다.

 

 

** [카페에서 영화 마시기] 시리즈는 메인 테마 1개와 시럽 추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필자가 격주 금요일 저녁에 본 영화를 대상으로 로스팅됩니다.

 

 

[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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