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금 여기, 직업으로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 -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고백과 자각

글 입력 2021.07.0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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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 스나이더의 『책 좀 빌려줄래?』에는 ‘위대한 소설가의 공통점’이라는 주제에 대한 앙증맞은 만화가 있다. 그 책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나열한, 세계의 내로라 하는 소설가들에게서 발견한 공통점들은 다음과 같다: 어린시절의 트라우마, 곤궁한 직업, 방탕한 시절, 병적인 야망, 방치된 배우자, 망상과 공포 등등.


수많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에게는 마치 필수적인 자질인 마냥 불행한 삶, 파탄에 이른 일상생활, 광기로 뒤덮인 사생활이 어쩌면 그들의 작품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예술가’에 대한 나의 이미지이기도 했다. 나의 머릿속에서 예술가는 낭만주의 시인관으로부터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듯하다. 일상을 매혹적으로 살아가면서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어떤 영감 하나를 재빨리 낚아채고, 몇 날 며칠을 몰두하여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다음 세기의 역작을 내놓는, 그런 각성의 순간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천재적인 사람들. 나와는 다른 사람들.


그러나 예술을 하는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은 그들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인 한편, 동시에 지독한 선입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나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일 것이라고 못 박아버리는 생각은 그들을 얼마나 평면적으로 눌러버리는 일인지. 그들의 예술을 쉽게 특별한 ‘재능’의 영역으로 치부해버리는 건 작업물들에 담긴 수많은 과정들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그들에겐 나와 같은 ‘현실’이랄 게 없을 것이란 생각은 그것이 선의든 악의든 그들이 가진 현실의 문제들을 경시하는 것이었다.


지금-여기, 직업으로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먼 곳에 있는 것만 같았던, 다른 평면에 위치한 것 같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나의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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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예술가: 고백과 자각』은 웹진 「IZE」에서 취재팀장을 맡았다가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박희아 기자의 인터뷰집 시리즈 ‘직업으로서의 예술가’의 첫번째 책이다. 이 책의 인터뷰이들은 가수, 배우, 음악가에 이르기까지 직업으로서 예술을 하는 다양한 ‘예술가’로 구성되어있다. 몇몇은 눈에 익을 것이고, 몇몇은 어쩌면 이번 기회로 처음 접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박희아의 인터뷰는 이 낯선 예술가들을 현재 가능한 가장 가까운 거리로 다가서게끔 한다. 그의 세심한 질문과 담백하게 풀어내는 인터뷰이들의 진솔한 대답을 듣다 보면, 기꺼이 시간을 내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고백과 자각』은 제목을 따라 ‘예술가의 고백’과 ‘예술가의 자각’의 두 장으로 이뤄져 있다. 1장은 “스스로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내어” 덤덤히 자신을 풀어낸 예술가의 고백들이 있고, 2장 ‘예술가의 자각’에는 예술의 개념과 역할, 직업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예술가들의 고민의 흔적들이 담겨져 있다.


 

 

“수하야, 킴은 극장에 놓고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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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예술가: 고백과 자각』의 많은 예술가들은 일상과 생활을 말한다. 일로부터 분리된 어떤 일상과, 영감으로부터 오지 않는 규칙적인 작업의 루틴에 대해 말한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오래 작업하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작업 스타일을 찾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쳤을 그들 자신이 택한 방식은 많은 경우 작업으로부터 스스로의 사적인 삶을 어느 정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음악가 이이언은 최근 한동안 자신을 ‘갈아넣고’ “소모하고 희생하면서” 작업하던 이전의 작업 방식으로부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서는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게 의미가 없”(134)다며, 이제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이전의 그가 자신의 삶의 어둠을 헤집으며 작업을 했다면, 이제 그는 삶을 구하는 법을 터득했다. 정해진 작업 시간에 맞춰 작업을 한 후 일상으로 돌아가 “일용한 즐거움”을 찾는다는 이이언. 그것은 이전의 “뼈를 깎아서 만드는”, 음악에 자신이 잠식되는 방식이 아니다.

 

 

(작업 시간은 줄어드셨나요?) “아뇨. 오히려 늘어났어요. (중략) 사실 힘들 때는 책상 앞에 잘 앉지도 않고, 영감 같은 것이 오기를 기다리고. 안 오면 어떻게 해서라도 가사를 짜내고. 하지만 생활 루틴을 만들고 나서 상당히 편해졌어요. 작업할 때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을 느낀달까?” (135)


 

배우 김수하 역시 직업인이 아닌 ‘나’를 지키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는 한국 최초로 영국 웨스트엔드 무대에 선 여성 배우이다. 2015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미스 사이공]의 ‘킴’을 연기하게 됐을 때, 그는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서 잘해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한다. 하루 온종일 김수하가 아닌 ‘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상상 속 ‘예술가’ 같은 것인가. 자아를 잃고 캐릭터에 나를 내어주는 배우라니. 그런데 김수하는 그렇게 ‘킴’과 하나가 되었던 자신이 겪은 변화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연출님이 저를 부르셔서는 “수하야, 킴은 극장에 놓고 가야 해"라고 하시더라고요. 집까지 데려가면 안된다고, 그러면 제가 너무 힘들다고요. 그 이야기를 딱 하시는데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스스로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킴을 이불 속까지 끌고 온 거였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의상을 벗으면서 정말로 킴을 극장에 두고 왔어요,” (229)

 

 

그는 이후 집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취미생활을 찾고, 자신을 살펴보게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잘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김수하는 무대에서의 순간 집중력이 높아졌다고 말한다.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예술을 계속할 힘이 나온다고, 더욱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고 말한다.


삶을 예술로부터 어느 정도 구하자 오히려 예술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게됐다고 말하는 이들. 이러한 이야기는 예술가에 대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던 나로서는 매우 의외였다. 그들이 자신의 일상에 대해 풀어놓는 말들은 낭만주의적 예술가는 커녕 ‘직업인’의 삶에 오히려 가까웠다.

 

 

 

“그런 과정을 계속 거치는 거예요.”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고백과 자각』에서는 작업물이 아닌, 작업과정에 있었고 작업물을 만든 후의 예술가들의 이야기들을 듣는다.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몇 년을 바쳐 만든 것을 짧게는 몇 초 만에 평가받고, 그 가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사람들에 의해 매겨지는 것이 예술가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수많은 시간을 바친 작업물이 턱없이 짧아진 감상의 시간 앞에 보여지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건 좋네” 혹은 “이건 별로네”라는 평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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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이 전체 글 속에서 왜 들어오게 됐는지, 이 문장 속의 단어의 배열은 왜 이렇게 됐는지. 왜 이 재료를 택했는지. 왜 이 색은 여기에 이런 방식으로 배치되게 되었는지. 왜 숨을 여기에서 쉬었는지. 왜 여기에서는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는지.


이러한 것들을 깊이 헤아려 줄 사람은 극히 적다. 산들은 그것이 다만 한 개의 덩어리 진 구성으로서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끊임없이 쳐내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작업’이고 ‘노동’이다. <직업으로서의 예술가>에는 그런 고민의 시간을 계속해서 거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것은 한탄도 아니고, 그저 그들이 극히 짧은 작업을 내놓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했던 수많은 시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뿐이다.

 

 

“머릿속에 드는 수만 가지 생각들을 한 개의 구성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거고, 연습을 하면서 그 구성에 이르기 위해 주변 것들을 좀 쳐내는 거죠. 그런 과정을 계속 거치는 거예요.” (32)


 

김경수는 배우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 말한다. 물론 ‘윤리적 책임’이라는 거창한 말을 그가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배우란 “누구보다 철이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며, “옳고 그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할 줄 알아야”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악하고 선한 면모를 단순히 이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관객에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져야 하는지까지 고민한다고 당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쳐야 할까. 한 마디 대사의 존재 이유, 그 대사가 관객에게 전달될 느낌 등 한 마디의 말도 허투루 할 수 없다. ‘자기가 꺼내는 말의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경수의 인터뷰는 세심하고 지적인, 그러면서도 윤리적인 예술가의 지난한 작업의 과정을 희미하게나마 알려주는 듯했다.

 


‘아, 나는 노래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부르는데, 저기서 노래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자기가 꺼내는 말의 이유는 정확하게 알고 있구나’ 하면서. (203)

 

 

 

“어차피 돈도 안 되고, 히트도 못 칠 거 내가 하고 싶은 거 실컷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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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가치있는 노동, 수많은 작업들 중에서 이들이 하필 예술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이렇게도 힘든 일이라면 말이다. 저마다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고백과 자각』의 많은 예술가들에게서 내가 발견한 것은 ‘지키고 싶은 고집’이었다.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고집, 어떤 것을 좇고자 하는 고집. 그런 고집을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가수 김형중은 현재 테크노락밴드 EOS에서 활동 중이다. ‘좋은 사람’과 ‘그랬나봐’라는 그의 대표곡을 떠올린다면 쉽사리 떠올릴 수 있는 행보는 아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랬나봐’를 부르던 자신을 찾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비록 수입이 덜할 지언정 EOS에서 음악을 하는 현재의 생활이 좋다고 말한다.

 

 

“가장 화려했던 시간이 이제 나에게는 가장 힘든 시간으로 기억에 남은 거예요. 그래서 과감하게 그걸 버릴 수 있고, 과감하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거고.” (63)

 

 

그러나 그는 그것이 ‘그랬나봐’를 부르던 시절에 대한 부정도, 후회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 시절이 버팀목이 되어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하게 됐다고 말하는 김형중. 과거와 현재를 대하는 그의 태도와, 그의 행보는 직업으로서의 예술에는 생계를 이어나가는 일도 분명히 필요한 한편, 무언가를 계속 좇는 열망이 원동력이 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다.


배우 박준면은 소위 ‘씬스틸러’ 배역들, 감초 역할을 하는 배역들을 많이 맡았다. 그는 배우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그 누구보다 사랑과 열정을 지닌 사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실컷’ 하고자 하는 가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박준면이 맡았던 즐거운 배역들을 통해서 그를 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예상치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음악은 매우 어둡다. 박준면은 그 역시 사람들이 느낄 수 있을만한 그러한 괴리를 알면서도, 음반 활동만큼은 “마음대로, 이기적으로 하고 싶”다고 말한다.

 


“대중에게 기쁨과 아픔과 외로움 같은 온갖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음반 활동만큼은 내 마음대로, 이기적으로 하고 싶어. 어차피 돈도 안 되고, 히트도 못 칠 거 내가 하고 싶은 거 실컷 할래.” (16)


 

 

“그런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인상을 준다는 것을”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고백과 자각』의 프롤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생각보다 방대해진 분량에도 불구하고 원고를 줄이지 않았다. 어느 한 줄 낭비되는 문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5)


대단한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어느 한 줄 낭비되는 문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태도라니. 그러나 첫번째 인터뷰였던 박준면의 인터뷰를 읽자마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고백과 자각』에는 어느 한 줄 낭비되는 문장이 없다. 그 문장이 매우 아름답고 유려해서이기 때문이 아니라(물론 그렇기도 하다), 자신의 내면의 고민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 사람들의 문장은 쓸모없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의 모습이 성실하게 자기를 연구해온 사람의 태도라 좋았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인상을 준다는 것을 본인만 모르는 건 아닌지. (290)

 


오랜 시간동안 삶의 영역에서 고민해왔을 내면을 정리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그것을 하나 하나의 단어로 정제해서 표현해내기까지 예술가들이 거쳐왔을 고민의 과정을 생각한다면, 이 책의 모든 단어와 문장은 값지다. 박희아의 인터뷰는 그러한 값진 이야기들을 충분히 따뜻하게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사람들은 매력적이다.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고백과 자각』에 실린 인터뷰 속에서 모든 예술가들은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하나의 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얼마나 자주 인터뷰이들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했던지. 박희아는 프롤로그에서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가 또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6)”라고 말했다. 세상에 새로운 예술가를 알게 되다니, 이 역시 얼마나 기쁜 일일까.

 

 

[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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