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이 난해할 땐 곰방대 한번 피고 말지 - 연극 '그 곳이 멀지 않다'

글 입력 2021.06.29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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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태대각간 김유신과 태종무열왕의 딸 지소의 아들 원술은, 겉보기에는 남 부러울 것 없는 다이아몬드수저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는 화랑도 수업에서 친구 안남과 검술을 겨루다 패할 것 같아지자 다친 척 하여 모면하고 부모님을 의식해 늘 그랬듯 모의고사 성적표도 조작한다.

 

원술은 생일날 화랑도 친구 삼릉, 산새, 안남과 같이 클럽에서 파티를 하는데 서역에서 유학한 산새가 선물한 환각 성분이 있는 광대버섯을 접한다. 음주승마로 사고까지 낸 원술은 이를 본 친구 희명을 두고 도망치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집에 왔으나 결국 들이닥친 경찰에 체포된다.

 

한편, 나당전쟁 중인 신라의 유신은 원술이 이번 전투에 참여해서 가문의 명성에 맞게 공을 세웠으면 하고 원술은 아버지 눈총과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해 결국 무관시험에 합격한다. 원술은 출정 전날 친구 희명을 만나 지난 일에 대해 사과하고 결의를 다지며 이전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마음을 다잡고 전쟁에 나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목표가 없는건 아니에요


 

천 몇백년 전이라 한들 세대 갈등이 없었을까. 신라 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현대적 상상력을 더한 연극 <그 곳이 멀지 않다>는 영웅 김유신과 그의 아들 화랑 원술의 이야기를 다른 각도로 보여준다. 사회 권력의 중심을 이루는 보수적인 주도 세대, 그리고 새 삶의 방식을 꿈꾸는 자유로운 젊은 세대 간 대립은 사실 특별한 내용은 아니다. 세대가 반복될 때마다 나타나는 주제 의식임에도, 이 연극은 역사적 인물을 재치 있게 뒤틀고 가벼운 개그 코드를 더해 극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간다.

 

맥락없는 욜로 라이프의 긍정인가 하면 이 역시 아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래 얽매여 수많은 기대 혹은 질투를 등에 업고 지쳐가던 원술. 그가 진정한 자신을 찾아나서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는 것이다. 자신의 주변을 지키던 이들은 원술 그 자체를 바라보기보다 뒤에 있을 김유신을 떠올리며 그를 좇았다. 자신과 친해져 권력을 얻어보려 하거나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을 높이려 하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원술은 도저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나로서 존재할 수 없으니 그 어떤 노력도 무의미하게 다가올 뿐. 거창한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내일을 맞이할 힘은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자신을 지켜준 진정한 친구 삼릉과 멀리서 믿고 응원해주는 희명의 마음에 공명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목표가 없는건 아니에요. 원술은 자신의 아버지인 김유신에게 당당히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어 희명에게 삶이 난해할 때 피는 곰방대를 선물받고 길을 나선다. 연극의 끝은 곧 이야기의 시작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가 왜 이렇게 기분 좋게 다가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후련한 엔딩이었다. 말 그대로 '그 곳이 멀지 않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가는 원술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경쾌한 울림을 준다.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여여케미



역사상 원술은 김유신의 아들이나 극중 무대 위에서는 성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원술을 맡은 김유민 배우님과 희명을 맡은 정제이 배우님이 빈 무대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볼 때, 그 가슴 떨림이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원술의 모습이 평면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희명과의 관계성에서 짚어볼 수 있다. 극중 희명의 캐릭터성은 독보적이다. 흐르는 물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시간에 몸을 맡기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복장부터 자유롭다. 2천년 후쯤 유행할 만한 옷을 지어 입고, 가끔은 댄서가 되기 위해 춤을 배우며 또 가끔은 가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래를 부른다. "나, 이번엔 가수가 되어볼까 해." 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매력이 가슴을 두들긴다.

 

이토록 자유로운 성향을 지닌 그녀이나 오히려 본인이 바라는 삶의 지향점은 아주 곧고 단단하다. 그리고 그 단단한 심지로 길을 잃은 채 휘둘리는 원술을 은근슬쩍 받쳐주는 것이다. 음주 승마로 원술이 사고를 쳤을 때 오히려 경찰에 신고하며 그가 정신 차릴 수 있도록 도와줬고, 전쟁을 나가기 전이나 돌아온 후나 자신을 찾아온 원술을 무심한 듯 따스히 맞아주며 그의 행보를 응원한다. 원술도 희명이 내미는 손이라면 언제든 기꺼이 붙잡는다. 음주 승마 사건 당시 자신을 신고했음에도 그것이 자신을 위해 한 행위라는 것을 알기에 도리어 그녀에게 사과를 건네러 가고, 전쟁에서 돌아와 길을 떠나기 전에도 꼭 돌아와 그녀를 만날 것임을 약속하며 의연히 웃는다. 매번 살을 부대끼며 같이 지내지 않아도 서로 진정한 신뢰 관계에 있음이 너무도 잘 엿보인다.

 

우정과 사랑을 선 가르는게 우습겠지만, 분명 '우정 이상 사랑 미만'이란 표현이 주는 간질거림은 있다. 멋진 여성 배우들이 시간을 거슬러 신라의 한 마을 어귀에서 다시 만날 날을 쿨하게 약속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심장을 몇 번이나 부여잡았는지 모르겠다.

 

 

 

전형적인 캐릭터에 뜬금없는 개그를 버무리면



전형적인 캐릭터에 뜬금없는 개그를 버무리면? 아주 맛있다.

 

연극 <그 곳이 멀지 않다>에서 각 인물은 성격 유형의 전형성을 드러낸다고 여겨질만큼 조금 뻔하다. 세대 간 갈등이라는 주제에서 충분히 연상되겠지만, 엄격한 아버지와 자식에게는 유한 어머니, 부모의 그늘에서 힘을 잃어가는 아들, 대나무처럼 곧은 성격의 선생님,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친구와 멋대로 살아가는 망나니같은 친구의 조합까지. 보편적인 캐릭터성과 익숙한 플롯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래서 뜬금없이 터져나오는 B급 개그 코드가 더 맛있게 어우러진다.

 

이게 웃길까? 싶은 것들이 너무 웃겨서 어이없다. 평소 B급 개그 코드를 어색해함에도 불구하고 이 무대 위에서는 플롯과 캐릭터의 밸런스가 완벽했는지 한순간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원술이 자신의 특기로 은신술을 소개하며 각종 나무를 따라하는 모습이나 그런 능청스러운 은신술에 홀랑 넘어가는 주변인들처럼 각 캐릭터의 성격을 극적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 깊다. 그리고 김유신이 선생님에게 촌지를 전하기 위해 만났으나 긴장감을 과장하며 강렬한 음향 효과와 인물 구도를 연출하는 등 영화에서 볼 법한 장면을 구성해 이색적인 유머러스함도 놓치지 않는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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