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기억을 되찾는 연극 - 서교동에서 죽다

글 입력 2021.06.2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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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다양한 작품으로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극단 백수광부가 신작 연극 <서교동에서 죽다>로 돌아왔다. 나는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이 연극을 관람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탄탄하고 세련된 구성과 높은 완성도를 갖춘 공연이라 주변 지인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었다.

 

<서교동에서 죽다>는 제6회 벽산희곡상을 수상한 작가 고영범의 신작으로,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여 현재를 규명하는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활용했다.

 

연극을 보는 관객은 작가가 불러낸 잊고 싶은 기억, 그리고 잊어버린 기억을 무대 위에서 직접 대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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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망각의 바다를 떠다니는 기억의 조각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도중에 이따금,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법이다. 기억을 회상한다는 것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오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교동에서 죽다>가 감춰둔 기억을 불러내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연극이 시작하면 암전 효과나 안내 방송도 없이, 그저 관객이 들어오는 입구를 통해 배우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그리고는 관객을 향해 능청맞은 질문을 던진다. “오늘 많이 더웠죠?”,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와 같은 말을 건네면서 객석과 무대 사이의 제4의 벽을 깨는 것이다.

 

이처럼 전지적 관찰자인 화자가 등장하여 구구절절 극의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은 사실 희곡보다 소설의 작법과 비슷하다. 활자를 언어로 변환하여 무대에 옮긴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공연을 관람한 이후에 정보를 찾아보니, 고영범 작가는 애초부터 같은 소재를 사용하여 희곡과 소설을 동시에 집필했다고 한다. 확실히 기성 연극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구성이었다. 이후에 소설이 도서로 출간된다면 꼭 읽어보고 싶었다.


주인공은 관객에게 극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전달한 후, 한 ‘아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면서 자신의 뒤에 놓인 커튼을 젖힌다. 연극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커튼이 젖히면 관객의 앞에는 흰색으로 둘러싸인 무대가 펼쳐진다. 심지어 세련되고 현대적인 미니멀리즘이 구현된 무대 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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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무기력한 50대 후반 남성의 진솔한 고해성사가 펼쳐지는 연극 무대는 다소 우중충하고 어두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오히려 밝고 단출한 무대는 배우의 연기와 서사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흰 무대를 스크린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공간을 표현하는 영상 디자인은 극 자체를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서교동에서 죽다>의 본격적인 시작은 주인공 ‘진영’과 그의 조카 ‘도연’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6개의 막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주인공 진영의 조카 도연은 20대 후반 여성이다. 사범대학을 다니던 도연은 ‘글을 쓰겠다’라는 이유로 교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대학을 그만둔다. 그리고 ‘디지털서사콘텐츠창작학과’라는 웅장한 이름을 가진 학과에 새로 진학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글을 쓴다.


진영의 누나이자, 도연의 어머니인 ‘진희’는 암에 걸렸다. 그녀는 도연이 글을 쓰겠다는 이유로 안정된 진로를 포기하고 교육받을 기회를 놓친 것에 울분을 토한다. 한국에서 ‘독창적인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다면서, 각박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딸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동생 진영을 불러내 도연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요청한다.


그동안 미국에서 한량처럼 살던 진영은 진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한국으로 돌아와 얼떨결에 조카 도연을 설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 또한 한때는 글을 써서 성공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기에, 도연을 이해하고 “세상에서 무언가를 쓰는 젊은이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전해준다.


이처럼 21세기 한국에서 꿈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청년 도연과, 20세기 한국에서 꿈을 놓아버리고 결국에는 자아를 잃어버린 중년 진영은 점차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마주한다. 이들은 각자의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그동안 감추어둔 기억의 조각을 되찾는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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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과 진영은 이제는 번화가가 되어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홍대 거리로 놀러 가, 과거 서교동과 화곡동에서 벌어졌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추억하고 회상한다. 그들이 마주하는 사건들 속에는 극 중의 현재와 과거에 공존하고 있는 인물들이 모두 등장하고, 각 인물이 변화하는 과정이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즉, 이 극은 잘 짜인 군상극이자 추적극의 구조를 띤다.


연극을 관람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선과 악의 특별한 대결 구도가 없이 지극히 중립적인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면서도 그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 갈등을 잘 표현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곁에서 되풀이되는 부당하고도 안타까운 사건들 또한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 발생한 것보다는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양산해낸 것들이 더 많다. 이 세상에는 흑백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기에,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거나 떠받들며 입맛대로 판단할 수는 없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서교동에서 죽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극에는 어떠한 악인이나 죄인도 없지만,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 죽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소시민들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비극을 만들어내고, 근본적인 갈등을 바로잡지 못한 채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누군가 꽁꽁 감추어둔 사연을 전부 듣고 나면 딱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신이 그토록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의식중에 상대방을 마음대로 판단한 나의 오만함을 반성하게 된다.

 

연극을 통해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을 관람했다면,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으로 감상을 마무리하기보다는 비극의 메시지를 각자의 삶에 비추어 들여다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공연장을 나온 이후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며 관객 자신이 잃어버린 부분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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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에서는 관객에게 '꿈'과 '자아'라는 화두를 던진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면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챙기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마 많은 이들이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서교동에서도 그러했고 21세기의 홍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사람 사는 세상이 거기에서 거기라지만, 알게 모르게 두 손에서 놓아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연극은 진영의 이야기를 소재로 도연이 <서교동에서 죽다>라는 글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끝난다. 극에서 제시하는 서교동에서의 죽음은 상징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관객이 나름대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육체적 죽음만이 죽음일까? 아니면 꿈과 자아를 잃고 결국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 망각하는 것 또한 죽음일까?

 

이 연극을 통해 관객마다 각자 다른 여운과 교훈을 남길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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