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표현의 자유와 꼰대 그 사이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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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는 여러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될 만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고전이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을 쓴 작가가 식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면 그 소설을 읽어선 안 되는 것일까? 창작자와 창작물을 분리할지 말지는 그동안 개인이 선택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 선택이 강제된다면 동의할 수 있는가?
미국 상위 대학 인문학 수업의 변화
지난 6월 (2021.06) 업로드된 조던 피터슨 교수가 박연미 씨와 진행한 팟캐스트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미국 대학의 인문학 교육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컬럼비아 대학교 학생인 탈북자 박연미 씨가 바라본 제삼자의 시선과 조던 피터슨 교수의 견해가 담긴 대화가 방송됐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 민족, 언어, 종교, 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특히 다민족국가인 미국 등에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차별과 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하게 된 용어이다.
내용을 바라보기에 앞서, 조던 피터슨 교수는 전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이자 현 토론토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로, 문화 비평가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또 현대인의 심리를 파고든 책으로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특히 여러 사회의 견해와 방향성이 호도되는 데에 대학의 책임이 크다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박연미 씨는 국제무대에서 북한 인권 실상에 대한 증언으로 2014년 영국 BBC에서 선정된 '세계 100대 여성'으로, 탈북민이다.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된 이후 인권운동가로 여러 인권 개선에 힘쓰고 있다. 그는 2007년 탈북해 2년간 중국과 몽골을 거쳐 2009년 한국에 정착했고, 동국대 경찰 행정학과에 입학,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한국과 미국 두 곳의 대학 생활을 통해 제삼자의 시선으로 두 나라의 교육을 받았다.
Tyranny, Slavery and Columbia U | Yeonmi Park | The Jordan B. Peterson Podcast - S4: E26
진행된 팟캐스트의 주된 내용은 조던 피터슨 교수가 박연미 씨의 한국과 미국 두 개의 대학교 교육 경험과 인문학 교육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문화예술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의응답이었다.
박연미 씨가 말하길, 컬럼비아 대학교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교육은 더 기술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을 많이 배웠다고 말했는데, 컬럼비아 대학에서 배운 수업의 특이점은 '생각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교육이 주를 이뤘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하는 방식을 거의 새겨주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그가 들었던 대부분의 수업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빠질 수 없는 생각의 결론으로 이어졌는데, 그러한 방향성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면 불합리한 학점으로 이어지기에 자신을 검열하는 데 능숙해짐을 느꼈다고 말했다.
또 한번은, 제인 오스틴의 책을 읽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는데, 식민주의적 사상을 가진 작가이기에 모르는 사이에 세뇌를 당할 수 있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그러한 이유로 서양 고전 문학의 작가들이 꼰대고, 인종차별주의자며 노예제를 지지했기 때문에 대학 수업에서 서양 고전 문학 교육 찬성 여부를 학생들에게 묻는 교수들의 이메일 발송이 선행되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인문학 교육의 변화로, 박연미 씨가 느낀 점은 결국 예술작품 수용의 선택이 강제되고 있다는 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교육 자체가 올바른 선택을 장려하려는 목적인 듯 보이지만 무엇을 배울지 선택의 자유가 불분명한 교육의 현실이 옳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수업 주제의 교육 여부를 학생들에게 설문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러한 설문은 다수가 선택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물론 과거 문학이나 미술, 서양 고전 음악을 지금 우리 시대의 감수성으로 비추어 보는 것은 문화 수용자의 당연한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작품의 창작자들이 지금 시대의 감수성과 같은 작품을 만들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 올바른 예술 감상의 태도일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이란 해석하는 사람의 자유임을 잘 알고 있다. 또, 하나의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은, 문화 수용자의 숫자만큼 다양하게 나온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문화 비평이 존재하는 이유도,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된 담론이 문화예술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을 대학 수업에서 가르쳐선 안될까
그렇다면, 소설 <오만과 편견>의 창작자가 현시대가 추구하는 올바름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경우, 학생들에게 더욱 이상적인 교육 방식은 오만과 편견에 대한 감상과 비평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공유하고, 각자의 견해를 비교 확장해가도록 기회를 마련해주는 방식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적어도 문화예술 수용에 대한 자유의지가 선행되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인상 깊었던 토론 수업에선 찬성과 반대에서 한쪽씩 맡아 의견을 대면, 꼭 선생님이 그 역할을 스위치 해서 양쪽 의견 모두 피력하게 했다. 그땐 내가 방금 했던 말을 다시 반박해야 하는 근거를 생각해내야 해서 진땀을 뺐었기에 별로 좋아하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학생에게 모든 사고의 방향을 열어주고, 선택에 앞서 생각할 시간을 주려 했던 것 같다.
한 시대에서 받아들이기에 논란의 소지가 있는 문화 예술 작품일 경우, 감상의 자유와 해석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수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만이 더 나은 문화예술을 위한 길일까? 그런 표현은 아예 해서는 안 될 실패이자 잘못일까? 그런 창작물은 아예 없어져야할까?
논란이 있는 창작물의 귀책 사유
몇 달전, 웹툰 작가 기안 84가 그린 웹툰 '복학왕'이 여성 혐오의 논란에 휩싸였다. 스펙이 부족한 여성 인턴이 남자 상사와 성관계를 거쳐 정직원이 된 내용이 포함되었고, 여성 인턴이 자신의 배 위에 있는 조개를 내리치는 장면에 대해 논란이 거세졌다.
이 논란에 대해서 혐오와 비하인지, 표현의 자유를 과하게 억압하는 것인지 대중들의 의견이 분분했는데, 이 논란에 대해서 작가의 작품이 옳지 못하다는 결론이 난다면, 이 작품은 앞으로 모든 인터넷 플랫폼에서 삭제되는 것이 당연한지 아닌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문화예술도 완전무결하지 않기에, 분명 어떤 이에게는 무해하고, 어떤 이에게는 상처가 되는 작품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작품과 나아가 창작에 대해 비평하는 태도이다. 나에게 해함을 주었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무한의 비판으로 벌해도 되는 자격은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할까.
디즈니 실사화 영화에서 흑인 인어공주 캐스팅에 대해 많은 이들이 비난하며, 영화 제작을 막는 의견은, 다양한 해석을 막는 또 다른 자유의 억압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비난들이 대다수 의견이라면 그 어떤 표현도 부정할 수 있는 권리가 형성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권위가 될 수 있고, 결국 아니꼽게 보는 꼰대와 무엇이 다를지.
뉴노멀 시대에 문화 예술 해석법, 이해와 담론이 필요하다
결국 이렇게 기존의 많은 기준이 전복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뉴노멀 시대에, 문화 예술 콘텐츠에 대한 현 수용자의 태도에 따라 앞으로의 문화예술의 흐름이 확연히 변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현재 다소 격렬해지는 의견 대립으로 내 입장과 다른 의도의 작품일 경우, 무작정 비난하고 보는 태도는 지양해야 함을 느낀다.
즉, 한 작품에 대해 좋음, 싫음과 그 이유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문화예술 발전과 감상을 돕는 일이지만, 그 감상과 피드백이 다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기조가 심화-확장된다면 우위를 점한 여론에 의해 예술가와 활동가들의 자가 검열이 더욱 심해질 것이고, 표현과 활동이 획일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과거 역사에 있었던 문화 검열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여서인지, 우리는 무엇이든 말하고 볼 수 있는 자유가 너무나도 당연했고, 그렇기에 앞선 미국 대학의 사례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물론 박연미 씨가 문화 인류학자도 아니고, 인권 운동가이며 한 사람의 식견으로 전체를 낙인찍어선 안된다. 이 역시 하나의 담론일 뿐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확장하고 있는 우수한 문화예술작품을 앞으로도 많이 보고 싶기에, 수용자인 우리가 잘 보고, 잘 듣고 있는 것인지 그 방향성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에 앞서 내 의견과 같든 다르든 여러 해석과 관점을 이해해보려는 열린 태도로 수용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단순히 누군가를 벌하고 싶은 것인지, 충고를 통한 더 나은 방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위함인지 자신에게 지속해서 질문을 던진다면 더 나은 담론이 문화 예술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문화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 삶을 더 행복하고 나은 삶으로 채워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에 있다고 생각하며, 일생에서 접하는 문화예술을 보고 한 사람의 삶이 바뀌기도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각자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러 표현에 대한 '이해'와 적절한 피드백을 조금이나마 노력해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혹시 그런 너그러운 담론이 이어진다면, 예술가나 제작자가 저지른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깊이 반성할 시간을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며, 나아지고 발전된 작품으로 우리를 더욱더 즐겁게 만들어 줄지 아는가?
"저는 정말 많은 고전 도서를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문학이 융성하던 18세기로 시간을 훨씬 거슬러 올라가 책을 읽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지금의 제 모습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_ 박연미
[고유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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