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 열정과 통찰

결국에는 나를 마주하는 이야기
글 입력 2021.06.2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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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잠시 접었다.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다. 단단히 자리 잡은 현실의 벽이 너무나 두꺼웠고, 예술에 목숨을 걸 정도로 나의 열정과 근성이 충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노력에 따른 충분한 보상을 기대하지 못하는 일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틈새를 채워가며 어느 정도의 금전적 여유를 마련하고 싶었다. 공연예술만 바라보며 진로를 꾸려나가기에는 그것 외에도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그래서 만약 나의 능력으로 물질적 풍요를 채운 후에도 공연예술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절실하다면, 그때는 최선을 다해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자신에게 약속했다.


이것이 섣부른 판단에서 비롯된 결론은 아니다. 나는 끊임없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진로를 고민하는 과정을 거쳤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비슷한 상념 속에서 헤엄치는 중이다. 어쩌면 이토록 절박한 마음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응당 거쳐야 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잡념이 들 때면 예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을 붙잡아 묻고 싶어진다. 당신도 그랬나요? 당신도 나처럼 힘들었나요?


그래서인지 박희아 기자의 인터뷰집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를 읽고 나니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언어가 나에게 더 크게 와닿았다. 한국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도 있었고,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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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초에 대학을 휴학하고 공연예술, 그중에서도 연극 연출을 공부하기 위해 입시 학원에 등록했다. 연극과 뮤지컬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특정 대학에 들어가고자 나의 자아를 일정한 틀에 끼워 넣고 있었다. 수능을 다시 보고, 면접을 다시 봐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점차 내가 기대했던 방향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식품을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 공연을 보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인데, 한국 대학의 연극학과에서는 순수히 연극만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예술가가 될 수 없는 사람인가?


게다가 뮤지컬과 같은 ‘상업극’과 연극제에서 상을 받는 ‘순수극’을 나누어 평가하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대극장 뮤지컬을 좋아하면 철없고 덜떨어진 연극인으로 낙인찍히는 문화는 권위적인 예술가들의 허울에서 비롯된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를 읽어보니 예술가 이자람 또한 나와 비슷한 결의 고민을 했다. 그는 판소리를 부르는 국악인이자 밴드 가수이며, 뮤지컬과 연극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이 자신을 지금까지 끌고 와준 동력이라며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그는 스스로 사랑하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나름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 다채로운 결과물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과연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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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아: 국악을 하시는 분이면서, 밴드 음악을 하시고, 배우도 하시고, 정말 다양한 일을 하고 계세요.


이자람: 한국에서 그렇게 사는 건 엄청난 장점과 엄청난 단점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되게 극단적이라는 느낌이 있어요. (중략) 사실 어느 칸에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많은 곳이 예술계인 것 같거든요. 칸이 위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퍼져서 무척 다양한 색깔의 열매가 열린 곳이 예술계인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색과 높이와 칸, 크기를 자꾸 규정하려고 해서요.

 

289p.

 

 

상업적인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가난해서 주린 배를 움켜잡고 있어야만 예술의 아름다움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이 과연 옳을까? 이자람은 진솔한 언어로 독자에게 무엇이 예술이고 예술이 아닌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나 또한 생각이 깊어지는 대목이었다.


내가 입시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선생님에게 말씀드렸을 때, 반응은 ‘아쉬움’과 ‘재단’이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잘 해낼 것 같았는데, 아쉽다. 그러나 네가 연극을 업으로 삼을 만큼의 열정과 애정이 없어 보이니까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도 좋은 결정이야.


나는 답장을 보냈다. 저에게 열정과 애정은 충분히 있습니다. 저는 공연을 사랑해요.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연극학과에 들어가지 않아도 저는 계속 공연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겁니다. 그게 어떤 방법이 되었든 저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공연예술을 계속하고 싶고, 할 거예요!


나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 꿈을 포기하고 어떻게 살았어? 지금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힘들어하잖아. 젊었을 때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죽일 듯이 달려들고,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나서면 똑같이 달려드는 한국 사회가 싫어. 나는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면 좋겠어.


나는 참 의식의 흐름에 충실한 사람인 것 같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궁금하면 찾아보고 이상하면 들여다보고. 내 생각을 했다가 엄마 생각을 하고. 그래서인지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도 <직업으로서의 예술가>에서 최정원 배우가 인터뷰한 내용을 읽으니 엄마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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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한국은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다. 특히 여성 배우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듦에 따라 점차 TV 화면과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배우 최정원은 여성 배우들이 가질 수 있는 두려움을 전면으로 돌파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배우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세상. 그녀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었다.


나는 뮤지컬 <제이미> 속 최정원 배우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아이를 위해 희생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얼마나 애틋했던지. 마치 <빌리 엘리어트>의 아버지 같달까. 나는 그녀를 향해 얼른 일어나서 당신의 삶을 살라고 말하고 싶었다.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배우를 꿈꾸었던, 아니 아직도 배우를 꿈꾸는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각자의 꿈을 꾸는 아들과 어머니가 보였다.

 


최정원: 무대 위에서 제이미가 “엄마 때문에 진짜 못 살겠어. 진짜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서 나가거든요. 그때 부르는 노래가 “공허했던 아침 그게 이제 다시 그 예전으로 돌아가서 커피 맛은 써도 내 배에서 꼬물꼬물 대던 그 아이, 그래도 넌 내 아들이야” 이건데, 제 딸이 사춘기 때 했던 말이 생각나고 이 상황이 너무 슬퍼서 오디션 때도 가사 때문에 노래가 안 나오더라고요.

 

168p.

 

 

최정원 배우는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최정원: 지금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고, 서로 교감하는 것. 우리가 그냥 오늘 이렇게 만나고 끝이 아니라, 서로 교감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그 교감을 바탕으로 영감을 얻어서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내가 사랑받을 수 있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진심이 될 수 있는 거요.


(중략)

예술은 사랑의 선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덩어리 그 자체.

169,171p.

 


그렇다. 예술은 사랑의 덩어리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일이고 사랑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누구도 내가 예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나 또한 타인에게 예술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고 지적할 수 없다. 나는 나의 길을 찾을 것이다. 이 책 속의 예술가들처럼, 결국에는 나도 내 안에서 답을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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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예술가들의 진솔한 사유를 통해 조언을 얻고 싶거나, 성찰의 시간을 갖고 싶다면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를 추천한다.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기에 각자에게 와닿는 메시지도 전부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언어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참 멋있는 일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이들이 있기에, 나 또한 언젠가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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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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