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 캐릭터들의 발자국을 따라, '현기증' [영화]

글 입력 2021.06.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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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현기증>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대표작이다.

 

할리우드 영화사에 길이 남은 고전으로 기록되어 수많은 시네필과 평론가들에 의해 재해석된 작품이기도 하다. 형식적 실험과 더불어 내용적 서스펜스 면에서도 뛰어난 혁신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나에게 여성 주조연의 활약이 눈에 띄는 영화였다. 해서 그들의 궤적을 따라 페미니즘적 분석을 시도해보았다.

 

 

 

주연 매들린- 로라 멀비의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본 <현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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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멀비는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를 통해 관객은 영화 관람에 있어 관음증적 태도를 취하게 되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하의 할리우드 영화는 이러한 관음증을 서사적으로 구현한다고 설명했다. 영화 <현기증>에서도 이러한 구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남성 스카티는 능동적인 존재로서 여성 매들린, 후에는 주디를 쫓고 또 관음한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의뢰에 의한 비자발적 관음이었을지 몰라도 스카티는 점점 주체적인 선택을 내리게 된다.

 

카메라는 그 자체로 여성을 훔쳐보는 시선이다. 영화 <현기증>에서 나타난 카메라의 시선은 단순히 형사가 용의자를 쫓으며 응시하는 시선과는 다르다. 특히 미행이 아니라 ‘스토킹’이라는 점에서 폭력성을 내제한다. 관음 당하는 이의 의지는 배제되었기에 좀 더 은밀하고, 심지어는 성적이기까지 하다. 매들린은 스카티의 눈을 통해서만 묘사되기 때문에 수동적인, 일축하자면 ‘인형 같은’ 인상을 준다. 결점은 없고, 그 표정은 신비로운 선경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답기보다는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를 보듯 몽롱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것은 남성의 일방적인 시선이 조직해낸 환상이다. 여성 매들린은 일상에 스며든 시선의 폭력성을 견딜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고, 로라 멀비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스카티는 물론 관객들에게까지 ‘보여지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매들린이라는 한 명의 주체적 인간으로 비춰지는 것이 아닌, 남성의 인식이 만들어낸 ‘여성’의 형상을 한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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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방적인 시선이 전환을 맞이한 것은 매들린이 스카티의 존재를 인식한 후이다. 둘은 함께 눈을 맞추고, 시선은 교차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후에는 입맞춤을 하며 서로를 동시에 인식 및 응시한다. 그러나 이것이 두 남녀 사이 완전한 시선의 평등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불륜이라는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책임은 오직 여성의 것으로만 치환되는데 이는 매들린의 자살 행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스카티는 법의 심판을 받긴 하지만, 정신 이상 판정을 받을 뿐, 매들린이 자살한 일은 그저 불가피한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된다. 남성의 관음증적인 시선은 이렇게 여성의 생과 주체성을 빼앗은 후에도 쉽게 용서 받는다.

 

후에 주디를 대하는 스카티의 태도 역시 매들린의 경우와 유사하다. 주디를 발견한 그는 이전과 똑같이 그를 일방적으로 관음하며 스토킹한다. 그는 주디에게 과거 매들린의 의상과 헤어 스타일을 강요하는데,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은 여성을 하나의 이미지로서 소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스스로 여성에게 씌운 프레임을 실제로 강요하는 폭력적 행위로까지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스카티가 광적인 모습으로 연출된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자신만의 색깔과 정체성을 잃은 여성은 또 다시 대상화되고, 남성의 진열장에 놓인 손목시계나 구두 한 켤레 같은,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소유물로 전락한다.

 

영화 <현기증>은 스카티의 시선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이를 폭로하는 영화의 지향성은 현재 타인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반추하게 하는 효과까지 지닌다. 우리는 타인에게 특정 이미지성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 지, 일방적인 시선으로 그의 존재를 가두고 있지 않은지 시사점을 남기는 부분이다.

 

 

 

조연- ‘미지’ 역할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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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우드(Midge Wood)는 극중 스카티의 대학 동창으로 등장해,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와 약혼까지 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초반에 스카티와 원만한 교우 관계를 이루는 미지는 극이 진행될수록 은밀히 잔여되어 있던 그를 향한 사랑을 표출한다.

 

그러나 중심 네러티브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 보이는 인물이다. 미지는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고 히치콕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유일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흥미를 돋운다. 이 캐릭터를 창조한 히치콕의 의도와 미지의 서사적 기능은 무엇일까. 영화 전체를 관조하면 미지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영화 <현기증>은 여주인공 매들린의 환상적이자 몽환적인 이미지가 여타 현실의 인물들과 큰 대비를 이루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특히 남자주인공 스카티가 초반에 쌓은 일상적인 인상과 크게 대비된다. 서사적 미스테리는 이러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물이 점차 사건을 쫓아가며 내면의 비범한 감정과 충동을 인지 및 표출하는 과정을 통해 심화된다. 여기서 미지는 스카티의 출발점인 ‘일상성’을 담보하는 인물이다. 극 초반에 미지의 작업실에서 이뤄지는 둘의 대화 장면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미지와 스카티는 마치 여느 멜로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전형성을 띄며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한다. 샷 사이즈와 카메라 무빙은 매우 안정적이고, 배우들의 연기는 일상적이다. 스카티는 불의의 사고로 형사를 그만 둔 일과 앞으로의 행보 등을 편안하게 발화할 만큼 미지와 신뢰 관계를 쌓은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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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극 후반에 여러 사건을 겪은 후 표정과 생기를 잃은 스카티의 모습과 크게 대비된다. 미지는 사건을 겪은 후 인물은 어떤 면에서든 변화해야 한다는 일종의 서사적 법칙을 준수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 싶다. 오래된 이성 친구와 안정적인 우정 관계를 맺고 있는 스카티의 일상과 안정성을 보여주는 일환으로 미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미지와의 관계의 안정성은 곧 스카티가 지닌 일상성의 유지를 의미한다. 서사가 진행되고, 미지와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은 곧 예전과 달리 매들린에게 감화된 비범함으로 가득 찬 인물이 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미지는 매들린과 다른 특성을 지닌 여성이기도 하다. 원색의 악세사리와 안경을 착용한 미지는 모던한 이미지지만, 매들린은 이에 비해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일상적 배경 속에서 등장하는 미지에 비해 매들린은 다소 환상적인 장소와 조명 효과들로 인해 강조된다. 또한 성격과 분위기 면에서도 비밀로 가득 찬 매들린과 수다스럽고 솔직한 미지는 확실히 대비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매들린이라는 인물의 미스테리와 환상성을 부각한다.

 

또한 미지가 아닌 매들린이 주연으로서 스카티와 맺어지게 되는 당위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영화 <현기증>의 긴장의 저울 양측에 놓인 인물이 스카티와 매들린이라면, 미지는 그 축을 담당한다. 조연이며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더라도, 미지로 인해 두 주인공의 속성은 더욱 강화되어 나타나고, 관객은 감상 전체에 걸쳐 이렇게 구축된 이미지를 소비한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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