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를 키운 건 8할이 비디오 가게였다 [사람]

글 입력 2021.06.1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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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득한 어린 날을 생각하면 곰팡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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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하 비디오>의 스틸컷

 

 

낡은 셔츠 소매에서, 누렇게 뜬 장판에서, 길고양이에게 주려고 쌓아둔 백설기에서, 멍한 눈으로 책장을 훑는 어린 손님의 표정에서, 정말 자주 곰팡이를 느꼈던 것 같다. '보았다'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실제로 목격했던 바인지, 어린 나의 꿈과 환상이 뒤섞인 결과인지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 기억 구석에 가지런히 전시된 이미지들이라는 건 확실하다.


내가 정말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작은 비디오 가게를 했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비디오 대여점은 동네에 한 둘씩 자리할 정도로 익숙한 공간이었다. 많은 게 기억이 떠오르진 않지만, 문 하나 너머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다는 건, 환상과 현실이 묘하게 중첩된 공간에서 그 어떤 곳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동거하는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를 이룬 배경이 아닐까 싶은 지점이다.

 

나의 작은 유희는 이것이었다. 손님이 뜸한 시간이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비디오가 알알이 꽂힌 서가를 구경하곤 했다. 제목만으로도 설레는 까치발을 들고 목을 쭈욱 뺀 채 만화 제목들을 꼭꼭 씹다 보면 자꾸만 이상한 꿈을 꿨다.

 

그때는 그것들을 왜 그리 높이 꽂아놓은 건지가 의문이었다. 서가를 구경하고 나면 항상 발끝이 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분명 아이들을 위한 것이고, 아이들은 키가 작기 마련이니 아주 낮은 서가에 위치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아직도 그 영화들을 찾아보는 지금의 나는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어른들에게도 가끔은 빨간 메모로 가득한 달력을 엎어둔 채 정신없이 취할 환상이 필요하단 것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작은 손을 꼭 쥐고 서가 사이를 전전하던 그떄의 내가, 도시의 빽빽한 건물들을 바쁘게 가로지르는 현재의 나와 조우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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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을 안주 삼아 맥주나 따는 어른이 되어 보니 그건 모두가 묵인하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른들에게도 환상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깊은 밤, 털이 흠뻑 젖을 걸 개의치 않고 껴안을 수 있는 곰인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언제부터 부끄러워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게 참 안타깝다.

 

그렇게 나의 곰인형은 그 만화 영화가 되었다. 나는 가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고, 그보다 더 자주 피터 팬을 찾아 본다. '딸랑' 하고 가게 문이 열리면 내 앞에도 회중시계를 든 흰 토끼가 나타나길 기다렸던 유년의 나를 잊지 못하는 이유이다. 토끼를 기꺼이 쫓아가야지 하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던 그 순수를 말이다.

 

부모님께는 그때가 녹록치 않았을 시절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 비디오 가게의 곰팡이 냄새가 이상한 나라로 향하는 굴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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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스틸컷

 

 

아침이면 노란 해가 드는 우리 집은 더 이상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 하지만 매주 수세미를 들고 욕실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나도 내 기억 구석에 핀 곰팡이까지 닦아내진 못하는 것 같다. 그 시절부터 한 구석에 찬찬히 키워온 곰팡이가 자꾸만 나를 디즈니로 만드는 기분이다. 내 성장은 그렇게 끝없이 어른 판 디즈니를 찾아 헤매고, 부수고, 또 찾는 과정의 반복이었을지 모른다.

 

예술을 전공하고, 영화를 찍고, 글을 쓰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비디오 가게의 기억이 참 묘하게 느껴진다. 타인의 환상 세계에 둘러 싸였던 내가 이제 나의 것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좋은 예술가가 된다는 건 욕조 틈의 곰팡이를 박멸하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것 같다. 여러 아티스트들의 활동을 통해 예술이 지닌 선한 영향력과 그 의미에 대해 실감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써도 그때의 무엇이 어린 내 마음을 훔쳤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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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은 곰팡이를 한 움큼씩 품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그걸 잘 문질러 닦아주는 이들이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다. 확실한 게 하나 있긴 한 것이다. 축축한 마음을 먹고 자라는 그 곰팡이조차 소중해지는 예술을 하고 싶다는 것. 고루함에 못 이겨 풀밭에 드러누운 앨리스들을 일으키는 흰 토끼가 되고 싶다는 다짐.

 

까치발을 들어야만 했던 나는 이만큼 자랐고, 직접 회중시계를 쥘 수 있을 만큼 손이 커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풀밭으로 뛰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 것 같다. 자꾸만 등을 떠미는 어린 날의 디즈니 같은 존재가 부재한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어른이, 또 예술가가 된다는 건 날 삶의 방향으로 적절히 밀어줄 수 있는 바람을 잘 찾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자주 내 기억 속 곰팡이를 들여다 본다. 그게 자꾸만 날 쓰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날 키워낸 낡은 비디오 가게와 작고 노란 방과 그 곰팡이 냄새를 떠올린다. 그때 꿨던 요상한 꿈들과, 잠들기 전 천장에 아른대던 피터팬의 그림자 같은 것까지도. 그럼 자꾸만 내 이 기억을 꺼내고, 확장시키고, 또 발화하고 싶어진다. 난 이렇게 자라왔고, 이런 세상을 꿈꿨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말들을 말이다. 나를 따라 기꺼이 굴로 뛰어들 앨리스들이 몇이나 될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진다. 어린 날 자연히 이야기에 끌렸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를 끄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지를.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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