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버더펜스 : 경계를 넘어서 [영화]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글 입력 2021.06.1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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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오버더펜스>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오버더펜스(Over the Fence).

 

오버더펜스란 '울타리를 넘어감'을 의미하는 말로, 야구에서는 이를 '홈런'이라고 표현한다. 야구 경기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바로 이런 홈런이 터지는 순간일 것이다. 홈런이 터지면 최소 1점은 먹고 들어간다. 만약 모든 베이스에 주자가 위치해 있다면 4점이라는 엄청난 점수를 얻을 수 있다. 1점 1점이 중요한 스포츠 경기에서 최대 4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런 요소가 있기에 사람들은 홈런에 열광하는 것일 테다.

 

홈런은 경기 내내 한정되어 있던 야구장이라는 영역을 뛰어넘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한계를 넘어서며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와 동시에 국면의 전환을 꾀하기도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는 재미가 있다.

 

그렇기에 경계를 뛰어넘는 행위, 새로운 가능성을 불러오는 행위를 오버더펜스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영화, <오버더펜스>는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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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혀있는 시라이와, 자유로운 사토시


 

영화 내에서 시라이와는 자신의 감정이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울타리에 갇혀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전 사랑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안그래도 자신이 만든 벽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가 깊지 못하던 그는 사랑의 실패를 겪은 후로 더 높은 벽, 더 단단한 벽을 만듦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반면 사토시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인물이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티를 내고, 화가 나면 화를 낼 줄도 알고, 다소 기괴하다 생각할 수 있는 행동들을 남들이 보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진심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전달한다.

 

시라이와에게 사토시는 '부담스러운 사람'이고 사토시에게 시라이와는 '응답하지 않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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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으로 표현하는 새들의 구애방식



한편 영화 내에선 '새'가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만큼 새가 품고 있는 의미가 많다는 방증이다.

 

우선 새의 특징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새는 어떤 존재인가? 새는 언어적 표현을 할 수 없다. 그저 울음소리만 낼 뿐인 생명체다. 좋아해, 사랑해, 보고 싶어 같은 구체적인 말을 할 수 없다.

 

그 대신 그들은 '몸짓'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난 너에게 관심이 있어'라는 표현으로 그들은 춤을 추고 과장된 몸짓을 하며 상대의 이목을 끈다.

 

그리고 보통 새들은 수컷이 암컷에게 구애의 춤을 춘다. 또는 수컷이 암컷을 유혹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공작새가 있다. 공작새 수컷은 굉장히 크고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날개는 길이가 50c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데, 이런 커다란 날개는 어찌보면 생존에 불리한 조건이다. 포식자에게 노출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개가 크고 화려한 공작새들이 많은 것은 그것이 생존에 어떤 '역할'을 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번식에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공작새들을 관찰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날개가 훼손된 수컷 공작은 암컷에게 선택받을 확률이 낮아졌다고 한다. 날개가 암컷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만약 공작새가 몸짓 이외에 이성의 관심을 끌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까지 큰 날개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불필요한 날개들을 진작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새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새들 또한 몸짓, 춤이 이성을 유혹할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그런 각자만의 독특한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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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영화에 적용해본다면 여주인공 이름이 사토시(보통은 남자 이름으로 쓰임), 남주인공 이름이 시라이와(보통은 여자 이름)인 이유를 알게 된다.

 

사토시는 구애의 춤을 줄곧 흉내내곤 한다. 백조의 춤, 독수리의 춤을 추고 목청껏 새소리를 내지르며 시라이와에게 다가간다.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다. 조심스럽고 수줍은 듯한 백조의 사랑, 거침없이 강렬한 독수리의 사랑 모두 그녀의 열망이자 바람이다. 어떤 사랑의 형태든, 그녀는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고 진정한 사랑을 원하고 있다. 그런 모든 의도가 순수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아름답다.

 

반면 시라이와는 전 부인과의 사랑에 실패했다는 상처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영화 후반, 시라이와는 전 부인을 만나 전보다 훨씬 밝아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말이지, 평범하게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어.

헤어진 아내를 만나고 역시 내가 그 사람을 아프게 만들었단 걸 깨달았어.

나랑 헤어지고 밝고 건강해졌더라고.

내가 전혀 몰랐던 거야.

지금도 아무것도 몰라.

넌(사토시) 스스로를 망가졌다고 말했지만

난 남을 망가뜨리는 쪽이니

너보다 훨씬 나빠.

 

 

시라이와는 자신이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어디 모난 곳 없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그런 보통 사람의 인생을 살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전 부인은 그렇게 주장하는 시라이와를 보며 "나한테는 평범하지 않았어"라고 얘기한다.

 

왜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인식의 차이가 발생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갈라서게 만든 것일까?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시라이와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시라이와의 표현 방식에서부터 그런 분열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앞서 시라이와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라고 얘기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표현할 줄 모른다. 좋건 싫건 기쁘건 슬프건 그는 온전한 자신의 상태를 남들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렇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가 '표현에 인색한 사람'임은 확실하다.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들을 향한 표현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듯,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들을 향한 표현을 잘 해낼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

 

표현에 서툰 사람은 자신의 표현 방식을 객관적으로 볼 기회를 놓치게 된다. 자신의 표현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혹여나 이것이 오해를 불러올 여지는 없는지, 잘못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진심이 정말 잘 전달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라이와의 사랑은, 전부인에게 사랑으로 와닿지 못했다.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시라이와는 그녀를 향한 표현 자체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표현이 없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말로 시라이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시라이와가 결혼 반지를 아직까지 빼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점은 분명하지만 그는 그녀를 향한 사랑의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 어떠한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서 그녀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리 만무하다.

 

결국 표현하지 않는 사랑이란, 사랑이 아닌 것이다.

 

 


경계를 넘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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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방식의 차이는 결국 두 사람을 파국으로 이끌었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겨주고 말았다. 헤어진 아내를 만나며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시라이와이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점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만약 시라이와가 이런 점을 알지 못했다면 사토시와의 사랑에 또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라이와는 사토시를 초대한 소프트볼 시합에서 당당히 홈런을 날리며 자신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넘어간다. 경계를 넘어가는 공의 궤적은, 그의 사랑이 새롭게 시작됨을 알려주는 축포같기도 하다.

 

이제 시라이와는 자신의 연인을 외롭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더이상 사랑없는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더 세심히 살피고 주의깊게 바라볼 것이다. 이전보다 더 많이 표현하고 행동하며 얘기할 것이다.


한 마리의 새는 자신을 밖으로 꺼내준 또 다른 새의 바람에 응하여 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간다. 서로의 경계를 이전보다 자유롭게 드나들며 상대를 이해한다. 나에게 부족한 것을 인지하고 새롭게 배워나간다. 비록 완벽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한번 경험했던 것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토시와 시라이와의 사랑은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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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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