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토니 로빈이 그려낸 이세계(異世界)의 징검다리 [미술]

글 입력 2021.06.1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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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과 장식이라는 이름의 낯선 장르를 소개한다.

 

소위 P&D(Pattern and Decoration)라고 통칭하는 이 미술 운동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지속된, 당시의 주류미술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대담한 시도였다. 모더니즘과 남성성이 미술계를 지배했던 20세기 서구에서 장식미술 및 디자인 기법은 열등한 예술로 취급되었다.

 

장식미술은 여성적이고 비 서구적 색채가 짙은 열등한 작업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 그리고 실용적 목적의 창작은 진정한 예술로 인정하기 힘들다는 고상한 아집 덕분이었다. ‘장식적’이라는 표현은 경멸적 명칭이자 오욕에 지나지 않았다.

 

P&D 미술가들은 이 고착된 편견에 반기를 들며 동양적이고 기술적인 작업 스타일을 추구했다. 이슬람, 켈트족, 비잔틴, 아메리칸 원주민 등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반복적인 패턴을 생산하는 패턴 페인팅(Pattern Painting)을 즐겨 그렸다. 이들은 퀼트, 직물, 모자이크, 벽지 등에서 영감을 받아 꽃 혹은 기하학적 도형을 주로 사용하며 여성성과 추상성을 함께 담아냈다.

 

하나의 공예처럼 정교한 짜임새가 돋보이는 P&D 운동의 작업물은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작품과 기능적 오브제 사이를, 미술관과 실생활의 문턱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1970년대의 미술계가 절제된 미니멀리즘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패턴과 장식 운동은 극단의 영역에서 탄생한 하나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크기변환]모네 footbridge 1899.jpg

클로드 모네, [Japanese Footbridge], 1899

 

 

일본식 인도교의 형상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정원에 설치된 바로 그 다리다. 청순한 수련들 위로 우아하게 띄워진 다리는 정원 속 건축적 아름다움을 더했었다.

 

P&D 스타일의 캔버스에서 이 다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했을까? 패턴 페인팅의 선구자 중 하나인 미국의 토니 로빈(Tony Robbin)의 작품 <일본식 인도교>(Japanese Footbridge)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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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로빈, [Japanese Footbridge], 1972, 캔버스에 아크릴

 

 

일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로빈의 작품에서는 일본 미술 특유의 차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몽환적으로 흩뿌려진 색색의 점들과 번진 듯 그려진 선들은 신선세계를 연상케 하며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점과 선의 묽은 농도에서 조성되는 아스라한 분위기가 환상적이다. 크고 작게 반복되는, 완만한 아치형의 선들-작은 인도교들(footbridge)은 몽롱한 느낌을 한층 배가하며 깊은 몰입감을 가져온다. 정적인 사위(四圍)를 뚫고 도형들의 율동은 유려한 선율이 되어 공간을 휘감는다.

 

밑으로 곧게 뻗은 이파리 패턴과 다리 밑을 횡단하는 구름 떼는 화폭 전체에 구조적 안정감을 준다. 반쯤 드러난 다리에는 네 가지의 패턴이 절묘하게 맞물려 있으며, 각 패턴 또한 서로 다른 색과 붓터치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색과 곡선들이 눈앞에서 복합적으로 교차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튀어 오르지 않은 채 시각적 평온함을 선사하는 점이 놀랍다.

 

캔버스 위의 낯선 경치를 가만히 조망해본다. 저 먼 대기권을 뚫고 나가 마주할 수 있는 행성들의 세계가 연상된다. 패턴처럼 자리 잡은 다리들은 꽃잎 혹은 무지개 같아서 지상이 아닌 어딘가를 상상하게 한다. 현기증이 일 때 눈앞이 점멸하는 듯한 이상 현상 같이 느껴지며 기묘한 황홀감을 부른다. 정교한 설계로 배치된 기하학적 장식들이 지구가 아닌 세계를, 꿈 같은 판타지 속 장면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눈앞의 다리에 발을 딛고 그 디딤 선을 아슬하게 밟는 상상을 해보자. 까치발 밑으로 색(色)과 형(形)의 합주가 파도처럼 넘실댄다. 실재하지 않는 세계로 진입한다. 순간 희열이 느껴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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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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