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세의 배타성과 맹목성 - 장미의 이름 [영화]

글 입력 2021.05.3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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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문득 ‘장미의 이름’을 영화로 보고 난 후 든 생각이다. 원래 이 구절은 다른 맥락에서 쓰였겠지만, 그만큼 이 영화의 기이하고도 충격적인 이야기 전개 때문에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기에 떠오르게 된 표현이다.

 

안개가 끼고 축축한 느낌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그 느낌과 같이 기이한 수도원에서의 살인사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서 겪게 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중세이며 사건이 일어나는 곳은 한 수도원이다.

 

중심이 되는 인물들은 수도사 ‘윌리엄’ 그리고 그와 함께 다니는 젊은 제자 ‘아드소’이다. 이야기 속에서 윌리엄은 굉장히 눈에 띄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중세 시대의 다른 종교인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하느님에 관한, 하느님을 위한 지식만을 추구했던 중세 시대의 분위기와는 달리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자연과학 지식을 포함한 고대 지식에 대한 존경의 관점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이러한 자신의 이성적인 지식들을 이용하여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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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며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중세의 삶의 모습이었다. 세계사를 배우며 중세는 서양사의 암흑기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사실 그 암흑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암흑기에 대한 묘사를 매우 사실적이고 세부적으로 묘사했다.

 

너무 하얗다 못해 창백한 수도사들이 살인 사건 앞에서 성경 구절만을 울부짖는 모습, 신앙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중세 시대를 묘사했던 그림 속에서 창백하게 다소 음침하게 무리 지어 묘사되었던 수도사들이 생각이 났다.

 

수도사들이 아닌 그 외 평민들의 극단적으로 피폐하고 동물적인 삶에 대한 묘사도 충격을 주긴 마찬가지였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학문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동물처럼 살게 되는 시기라니, 이쯤 되니 중세 종교에서의 선악의 구분의 기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여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물욕을 채우기 급급한 수도사들의 모습은 이미 그들 자체가 악마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난 후 위처럼 중세 시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문득 서양뿐 아니라 모든 역사 속에서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암흑기가 있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러한 암흑기들은 모두 이것 아니면 저것,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배타성, 맹목성’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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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타성과 맹목성의 사고방식은 사실 중세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것 같다.

 

정권과 유착된 소수의 종교 단체의 시위 속에서, 혹은 당연한 죗값을 받고 있는 전 대통령을 신봉하며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단체의 맹목적인 주장들 속에서, 혹은 요즘 코로나 시국을 한층 장기화시키는데 일조한 몇몇 종교 단체들의 무리한 종교 모임 강행의 모습 속에서 나는 중세의 수도사들의 모습을 본다.

 

처음에는 그들의 삶을 한층 상승시키기 위해 믿음과 종교를 택했지만, 어느새 그들은 믿음과 종교를 위해 그들과 주변인들의 삶을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뿐 아니라 나치즘, 자국 배타주의 등 반복되는 인간의 맹목적이고도 배타적인 믿음은 결국 상승보다는 추락이라는 반복적인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다.

 

왜 우리는 이러한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우리는 늘 무언가 배우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원래의 믿음을 놓지 못한 채 버티는 미련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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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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