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조선에 떠오른 새로운 태양 - 뮤지컬 창업

고려에서 조선이 되기까지
글 입력 2021.05.14 09:1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연극과 뮤지컬 중에 마음이 동하는 쪽은 항상 뮤지컬이었다. 볼 때마다 흠뻑 빠져들었다. 단조로울 수 있는 연극에 음악과 춤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 나는 모든 여유자금을 뮤지컬에 쏟아붓는 회전문 관객까진 아니지만, 뮤지컬을 마음 한 쪽에 완벽한 형태의 예술로 간직하고 있는 관객이었다.

 

 

창업 극장.jpg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대학로 극장에는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뮤지컬 <창업> 티켓을 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배우의 팬으로 보이는, 설렘과 두근거림을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사람도 있었고, 오랜만에 하는 문화생활로 한껏 들떠 옆 사람과 신나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잠시 뒤면 객석은 배우들을 따라가는 고갯짓과 음악에 반응하며 두근거리는 심장들로 채워질 것이었다. 내레이터가 등장해 퓨전 뮤지컬이니 영어를 써도 놀라지 마시라고 안내를 했고, 교과서나 시험 교재 속에서만 보던 인물이 무대로 소환됐다.

 

뮤지컬 <창업>은 고려 말기 혼란스러웠던 왕실을 다룬다. 당시 권력을 잡던 이성계, 이방원, 정몽주, 정도전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배신과 반란으로 얼룩진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까지. 시대극은 역사가 스포일러를 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조선 건국이라는 사건이 역사책에 옮겨지기까지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의 감정이다. 실제 인물로 분한 배우 연기와 연기를 한껏 증폭시키는 음악에 몸을 맡기게 된다.

 

 

 

현대적으로 풀어낸 ‘조선 창업’


 

<창업>은 퓨전 뮤지컬이다. 퓨전 뮤지컬(Fusion Musical)이란 기존의 형식에 다른 극의 형식을 가미하여 상연하는 뮤지컬을 말한다. <창업>은 사극에 현대극이 곁들여졌다. 기존 사극에서는 볼 수 없던 현대적 특징과 애절하거나 비장한 노래, 전통 의복을 입고 추는 나비 같은 춤이 잘 어우러졌다.

 

뮤지컬이 시작되고 단번에 알 수 있는 ‘퓨전’의 특징은 음악이다. 가야금, 피리 등 전통 악기 사이에 피아노나 드럼 같은 현대 악기가 돋보인다. 서양악기와 한국 악기를 결합해 퓨전 사극이라는 본분을 잊지 않는다. 이성계의 부인이자 조선의 1대 왕비 선덕 왕후는 ‘고려 힙합’이라며 스냅백을 쓰고 랩을 하기도 한다.

 

극 중 인물들은 격식체보다는 일상 어투를 사용한다. 한 나라의 왕조차도 ‘하오체’ 대신 ‘해요체’를 쓴다. 또한 어떤 약점을 아킬레스건이라 표현하는 등 영어를 사용하고, “무야호~”라는 유행어를 쓰기도 한다. 현대성이 가미됨으로써 권력자들의 위엄은 다소 삭감된다. 대신 극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가볍고 코믹해진다.

 

특히,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정몽주가 반란을 꾀하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현대 소품이 등장해 분위기는 코믹으로 노선이 변경된다. 이성계는 파란색 목 보호대를 차고 환자용 보조 보행기를 끌고 나온다. 이성계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전통 복장, 그리고 뜬금없는 소품의 이상한 조화가 경직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다.

 

신발도 주목해볼 만하다. 인물들은 성격과 어울리는 신발을 신고 있다. 고려의 권력을 손에 쥐던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은 전통 복장처럼 보이는 검은색 삭스 스니커즈를 신는다. 정몽주는 그의 일편단심을 엿볼 수 있게 새하얀 스니커즈를 신는다. 야망의 아이콘 정도전은 날렵한 첼시 부츠를 신고, 전투력이 강한 무사들은 투박한 워커를 신는다. 선덕공주는 발랄한 복장과 어울리는 꽃신을 신는다. 뮤지컬 <창업>은 전통 복식과 현대 신발을 섞어 연출함으로써 퓨전의 느낌을 살렸다.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 무대와 조명


 

뮤지컬은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한 공간에서 라이브로 진행해야 하는 뮤지컬은 무대장치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작은 변화로 큰 효과를 꾀하면서.

 

<창업>의 무대에는 연꽃, 잉어, 호랑이, 산수 경산을 표현한 무대 소품이 대칭으로 설치돼 있었다. 무대 중앙에는 계단 높은 곳에 왕좌를 놓아 왕실의 분위기를 연출했고, 같은 곳에 여닫이문을 설치해 문을 닫으면 또 다른 공간을 연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창업 무대.jpg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정도전과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정몽주의 대립은 조명으로도 표현된다. 대칭을 이루는 무대 양 끝에 선 두 사람은 각각 파란색과 흰색 조명을 받는다. 한 공간에 위치하나, 다른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의 대비가 조명으로 배가됐다.

 

빔프로젝터를 활용해 무대를 꾸민 점도 특별하다. 빔프로젝터를 조명처럼 무대에 직접 쏘아 ‘무대’라는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했다.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말이 달리는 영상이 무대에 쏘아진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사고가 났다고 급히 외치는 소리와 함께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데 일조한다.

 

빔프로젝터는 영상을 쏘아 무대를 꽃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기도 하고, 정몽주의 기세에 눌린 선덕여왕과 이방원이 도망치는 숲을 만들기도 한다. (조명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영상은 기존 무대 장치와도 무리 없이 어우러져 관객이 효과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했다.

 

 

 

역사책 속, 명대사 명장면


 

역사책에 기록된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 대결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이 ‘하여가’와 ‘단심가’라 불리는 시조를 읊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고려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정몽주에게 급진 개혁을 도모한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이성계가 사냥 중에 낙마해 몸을 다쳐 벽란도로 요양을 하러 갔던 순간이다.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방원은 이성계를 황급히 개성으로 모셔오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형식상 병문안을 온 정몽주에게 이방원은 시를 한 수 읊는다. 하여가(何如歌)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칡넝쿨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천년만년 살고지고

 

- 이방원의 하여가

 

 

이방원은 시조를 통해 자신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냐는 질문을 한다. 정도전은 단심가(丹心歌)로 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도전의 단심가

 

 

정도전은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담아 답변한다. 두 사람은 결국 뜻을 모으지 못하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보낸 부하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된다.

 

 

창업 무대 배우.jpg

 

 

교과서에서 본 일화를 뮤지컬로, 눈앞에서 보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옛사람, 이미 죽은 사람, 실존했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배우를 통해 환생한 것 같았다. 배우들이 감정을 담아 노래를 부르는 모습, 인상을 찌푸리거나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역사 속 인물에 이입할 수 있었다. 활자에만 갇혀 있던 역사가 생동감 있게 무대에 펼쳐졌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로 역사의 실제성을 느꼈다.

 

*

 

마지막으로 뮤지컬 속 명장면을 꼽자면, ‘조선 창업’을 주제로 한 노래를 합창하는 장면이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무대로 나와 각자의 위치에 선다. 특정 인물 위주로 비췄던 조명이 무대를 눈이 부실 정도로 밝고 환하게 만든다. 인물들은 객석 너머 각자의 목표, 각자의 ‘조선’을 바라본다. 화음 섞인 멜로디는 무대를 가득 채운다. 모든 역사가 다 그렇다는 듯, 다르고 또 같은 사람들이 조화를 이룬다.


이 장면만으로도 뮤지컬 <창업>을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창업] 메인 포스터.jpg

 

 

[임채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