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의 모든 영화 같은 순간들 - 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

글 입력 2021.05.1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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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영원하지 않다. 불과 몇 년 전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그때 나와 친했던 사람 중에서 지금도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생각해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단지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이가 내 곁에서 사라졌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나를 포함한 모든 이가 예외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야기는 영원하다. 2021년을 살아가는 나는 최근 책과 영화를 넘나들며 1990년대의 프리랜서와 기원전 5세기의 철학자와 남북전쟁을 겪은 부부를 만났다. 이미 이 세상에 사라진 지 오래인 그들에게 유대감을 느끼며 그들이 살아 숨 쉬었던, 내가 태어나기 전의 그때를 그리워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야기를 남긴다. 영화는 이야기로써 유한한 사람의 인생에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여기 나처럼 영화가 지닌 영원한 생명력을 사랑하는 또 다른 영화 팬이 있다. 영화가 안겨주는 겪어볼 수 없는 종류의 슬픔과 환희, 고통과 그리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과 그들을 보는 나의 감정이 일치하는 순간은 마법에 가깝다. 그 마법 같은 순간을 나는 글로써 붙잡고 그는 그림으로써 기록한다. 그 영화 팬은 바로 맥스 달튼이다.

 

 

 

사무치도록 그리운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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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 전시는 이름 그대로 아티스트 맥스 달튼이 자신에게 영감을 준 영화의 중요한 순간을 그린 일러스트를 선보인다. 어디서나 자신 있게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꽤 많은 영화를 봤다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엔 내가 본 영화보다 안 본 영화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렇지만 맥스 달튼과 나의 영화 취향이 제법 잘 맞는 것인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 위주로 그림을 그려서인지 다행히 전시회에는 내가 본 작품들이 많았다. (후자인 걸 알지만 전자라고 믿고 싶다)

 

이 전시를 보기 전에 미리 봐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영화는 당연히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었다. 웨스 앤더슨은 기발한 상상력과 완벽 그 자체인 비주얼로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그만의 독특한 족적을 남기는 영화감독인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다양성 영화인데도 국내에서 무려 8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해 작품성과 대중성 모든 면에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맥스 달튼 본인이 웨스 앤더스의 팬임을 적극적으로 자처한 것답게 5부로 구성된 전시 중 3부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리고 노스탤지어’라는 이름으로 그의 영화에 대한 작품으로만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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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한 비주얼 속에서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모험을 펼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분명 밝고 귀여운 영화이다. 그러나 끝까지 다 보고 나면 그토록 사랑스러운 날들이 지금은 과거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뿐이라는 게 씁쓸하면서 동시에 그 페이지 한 조각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많은 작품이 과거는 흑백으로, 현재는 컬러로 묘사하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는 알록달록한 색채들로 표현되는 오래전 과거가 마치 직접 겪어본 어제처럼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 

 

 

이동진 평론가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남긴 한 줄 평을 이해하기엔 당시 막 수능을 끝마친 나는 너무나 어렸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질료는 경험이 아니던가. 그 한 줄 평만 읽고는 경험한 적 없는 세계를 어떻게 그리워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뛰어난 영화 한 편은 잡다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 없이 그 자체만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납득시킨다. 무언가를 그리워해 본 적이 없었던 그때의 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고 처음으로 내가 겪어본 적 없는 구스타브의 세계가 미친 듯이 그리웠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진실은 아직 그렇게 긴 세월을 살아보지도 못한 나도 매 순간 실감할 만큼 자명하다. 그리고 나는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편승하지 못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이 영화는 나만 과거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고 공감해주는 것 같아서 커다란 위안을 안겨주었다.

 

맥스 달튼의 그림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묘사하는 시간대뿐만 아니라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봤던 몇 년 전으로도 나를 돌려보냈다. 지나온 적 없는 어제와 지나온 어제로 가득한 분홍색 전시장을 제 발로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았다.

 

<스타워즈>, <티파니에서 아침을>, <백 투 더 퓨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고전 영화에 대한 그림도 많았다. 나는 물론 맥스 달튼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그 영화들이 전처럼 ‘옛날 영화’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우리 중 누구도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은 영화가 그림의 주요 모티프이긴 하지만 영화 속 한 장면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영감을 영화에서 얻을 뿐, 맥스 달튼만의 독창적인 시선으로 익숙한 영화가 낯설게 다가오는 경험을 선사한다. 여러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공통된 묘사 방식이 있는데, 같은 시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한 그림에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007> 시리즈의 인물들은 수영장 파티에, <백투더퓨처 2>의 인물들은 2015년의 길거리에, <아멜리에>의 인물들은 횡단면으로 나타낸 건물에 한데 모아 관람객이 최대한 많은 인물을 한 번에 보도록 만들어졌다.

 

이 전시는 사람이 참 많았다. (어린이날이라 정말 사람이 많기도 했고) 위의 언급된 작품들뿐만 아니라 <스타워즈>의 인물들, 웨스 앤더슨 영화의 인물들, 영화 속 연인들 등 다양한 사람을 한 그림에 모은 작품이 눈에 자주 띄었다.

 

전시장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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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개성으로 무장했지만 옆집 이웃처럼 친근한 웨스 앤더슨 세계관의 사람들과 그의 작품과 사람을 애정하는 맥스 달튼의 태도가 잘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그 문장을 보고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생각났다. 영화는 언제나 내게 이 땅 위에서 험난한 생애를 이어가는 모든 사람이 특별하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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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의 명작 멜로 영화 <이터널 선샤인> 역시 횡단면의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앞서 언급한 작품과의 차이가 있다면 이 그림은 같은 시공간의 여러 사람이 아닌 다른 시공간에 있던 조엘과 클레멘타인 두 사람을 모았다는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에 상처받은 남녀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억을 지우지만, 그 기억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가치임을 깨닫는 몹시 감동적인 멜로영화이다. 기억을 지우려던 조엘이 그 기억을 사수하려는 과정에서 클레멘타인과 나눴던 수많은 추억이 떠오른다. 맥스 달튼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처음 만났던 버려진 집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행복했던 기억은 물론 서로에게 권태를 느끼거나 상처를 남겼던 기억까지, 사랑의 모든 순간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냈다.

 

그 그림을 보니 웨스 앤더슨의 말을 이런 식으로 변형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인생 중 어느 한순간도 평범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시간을 초월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2010년대에 20세기를 경험하게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1985년에 30년 뒤의 세계인 2015년을 보여준 <백 투 더 퓨처 2>나 인류가 달에 착륙하기도 전에 우주의 공포를 알려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처럼 어떤 영화는 미래로 달려가기도 한다. 또한, 영화는 일상에서 절대 만날 일 없는 사람을 만나게 한다. 영화 덕분에 나는 좁은 생활 반경에서도 킬러, 스파이, 우주비행사의 삶을 지켜보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들은 나의 인생도 한 편의 영화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나의 과거를 떠올리거나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고, 나 자신도 미처 몰랐던 새로운 나와 마주하기도 했다. 평범하다고 여겼던 수많은 순간이 사실은 모두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

 

전시 관람을 마치고 영화관으로 달려가 최근 재개봉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봤다. 장대한 서사를 끝까지 지켜본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며 의지를 다지는 스칼렛 오하라를 보고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한 내일을 마주할 힘을 얻었다.

 

영화 일러스트 전시를 보고 4시간짜리 영화를 본 정말이지 영화스러운 하루의 끝에서 저마다의 가치로 빛나는 영화 속 사람들과 그 덕분에 영화처럼 빛나는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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