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스텔지아(1983) [영화]

글 입력 2021.05.1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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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탤지아’의 향수는 비단 물질적 고향이라는 개념에만 국한되는 것 같지는 않다. 더 나아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근거 짓는 것들을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거나 잃은 데서 비롯된 오래되고 근원적인 향수로 보인다.

 

‘나’라는 존재를 확신하고자 하는 노력은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이라는 장소의 기억으로 자신을 복기하고자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지만 고향은 하나의 표상으로 우리의 향수를 자극할 뿐 돌이켜보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쉽다. 소스노프스키가 자신의 고향 러시아를 그리워하다 러시아로 돌아가 자살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소스노프스키의 향수는 러시아에서 해결되지 못했던 것일 확률이 높다. 우리는 무엇을 잃었으며 무엇을 복구해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일까.

 

영화는 구원의 방식으로 경계 지움과 믿음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국경과 같은 경계를 없애야 한다는 안드레이(올레크 얀콥스키)의 말은 사소하지만 영화의 큰 맥락이 되는데,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경계가 허물어져 같이 존재할 수 있을 때에 세상이 진보하리라는 도미니크의 믿음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도미니크는 세계의 종말을 기다리고자 7년간 자신의 가족들을 집에 감금한 전적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광인으로 취급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도미니크의 광기를 두고 오히려 도미니크가 진실에 보다 가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푸코에 따르면, ‘광기’가 비이성의 형태, 하나의 질병으로 분류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의 공포를 자극하고 혐오를 부추기는 광기는 르네상스 시대에는 하나의 종교적 현상으로,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형태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의 대두와 함께 광기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따로 분리되어 사회적 격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도미니크는 이러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세상을 구원하고자 분신하며 인류가 지금 낭떠러지 앞에 몰려 있는 것 또한 정상인들이 비정상인과 경계를 지어 세상을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도미니크가 안드레이에게 역설한 1+1=1의 공식은 1은 또 하나의 개별적인 1과 합쳐져 2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같은 형태의 1이며 결국 1로 수렴되는 것이니 이는 이분법적 경계를 지우고자 하는 도미니크의 믿음에 기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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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의 주장대로 세상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정상인들의 이성도 절대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안드레이가 폐허 속에서 안젤라를 향해 내뱉는 농담 같은 이야기는 이러한 이성의 서투른 점을 밝혀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늪에 빠진 남자의 생명을 구했다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왜 구출했냐며 오히려 비난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규정해버리는 데서 오는 어떤 허점을 고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이성적 판단 아래 수반되는 행동들이 누구를 구출하고 구원하기에 부족하며 우리가 혹시 이성을 너무 신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꼬집는 듯하다.

 

그러니 이성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소용없고 쓸모없는 광인의 미친 짓으로만 치부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어야만 한다. 정상으로 분류되는 이성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면 우리가 이제 해야 하는 행위는 안드레이처럼 촛불을 이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안전하게 옮기는 일이다. 믿음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구체화되는 과정, 촛불을 온전히 옮기는 과정 자체에 구원이 자리할 수 있다.

 

피라미드가 실현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꿈을 꾸어 영혼이 다 같이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도미니크의 말과, 영화 초반부에 등장해 정성을 다 해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성당 직원의 말은 영화의 후반부 안드레이가 촛불을 옮기는 행위로 인해 실체화된다. 감독은 믿음의 과정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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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서사적 측면이 경계 지움과 믿음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영화적 차원에서의 구원은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경계를 흩트리는 연출에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적 편집으로도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지우고자 한다.

 

영화 속에는 환상적 장면들이 파편처럼 서사에 끼여 있다. 안드레이가 꿈을 꾸면 도미니크의 개는 현실 속 안드레이의 침대 곁으로 걸어 나오고 안드레이의 얼굴 다음에는 과거 고향의 모습인지 환상인지 모호한 장면들이 자주 나열되어 여기에 자리한 여성, 아이들과 혹시 시선이 마주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또한, 안드레이는 꿈속에서 길을 걷다 버려진 장롱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 대신 옛 도미니크의 얼굴을 마주하기도 하며 버려진 성당을 거닐다 초월적 존재의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영화는 이처럼 환상이라는 영화적 수단을 통해 소스노프스키와 안드레이, 도미니크를 점차 같은 선상으로 옮기는 듯하며 각자의 노스탤지어와 구원을 향한 믿음을 병치시켜 보여준다. 특히나 도미니크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사건과 안드레이가 온천에서 촛불의 불이 꺼지지 않게 옮기는 사건이 영화 속에서 같은 시간대에 놓여있다는 사실은 둘의 행위를 또다시 도미니크의 1+1=1이라는 공식으로 수렴하는 듯하다.

 

타르코프스키는 더 나아가 영화를 통해 직접 구원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당과 고향이 혼재된 기이한 공간에서 개와 함께 물을 바라보고 있는 안드레이의 모습을 통해 인간과 현실을 규정짓는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안드레이를 배치함으로써 일종의 영화적 방식으로 구원을 시도한 것으로 느껴지게 한다.

 

 

[김소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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