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노트 Sigak] 11. 나와 작품 사이의 ‘미지의 세계’

아는 것으로서의 미술이 아닌, 마주하는 태도로서의 미술
글 입력 2021.05.0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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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을 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글쎄요. 설명할 수 있다는 거?”


“설명할 수 있다,라.”


“음, 작품을 보면 작가는 누구인지, 그 의도는 무엇인지, 시대적인 배경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거라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작품을 보면서 왜 이런 게 느껴지는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거나... 막상 표현하려니 되게 애매하게 느껴지네요. ‘예술을 안다’라는 것이요.”


“그렇죠. 그래서 저도 ‘예술을 알고 말한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 궁금할 때가 많아요”

 

 

솔직히 저도 덜컥 겁이 날 때가 있거든요.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게 맞나?” 같은 질문들. 조금 사족을 더한다면 “내가 미술을 얘기해도 되는 건가,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 걸까?”라며 저도 모르게 하는 질문들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요, 미술을 다 알고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 어딘가 묘하죠. 왠지 우리는 미술을 모른다는 것을 자신이 무지하다는 의미처럼 느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처음이라면 더욱이나 아직 모르는 상태가 더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말이에요. 그리고 저는 미술을 ‘안다’라는 표현조차, 다른 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에는 느껴지지 않는 애매한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저번에 말했듯 어떤 틈이 있다는 느낌이 계속 든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난번에 그런 얘기를 했잖아요. 내가 한 작품 앞에서 무엇인가를 알고 느끼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을 또 다른 일들을 기억하려 하고, 미술이 존재하며 지니는 다양한 틈들과 그로부터 일어날 가능성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고요.


음...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관점이라면 우리는 미술에 대해 '알고 느낄 수 있는 것’과 ‘여전히 알아야 할 것’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니까요. '미술을 아는 일'을 따로 분리해서 명확하게 하려는 방금의 질문은 조금 무용할 수도 있겠어요. 예술이 지식의 차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상에서 파생될 무수한 의미들로도 존재한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이나요.


그렇다고 이렇게 대화를 끝낼 순 없겠죠. 그래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이 ‘모름’의 상태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요. 명확하기보다는 애매하고 막연한 상태를요. 우리는 미술 앞에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고, 그러기에 어떤 소통과 경험을 해왔던 걸까요.


다만 ‘모름’이란 표현은 조금 무미건조하게 느껴져서 저는 ‘미지’라는 단어를 사용해보려 해요. 미지未知. 아시겠지만 ‘아직 알지 못함’을 의미해요. 어쩌면 미술 자체를 누구도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미지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한편 그만큼 미지의 상태 혹은 세계라 비유할 수 있는 것이 미술이란 영역에는 정말 많기 때문에 조금 주제를 좁혀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는 '나와 작품 사이에 놓이는' 미지의 세계를 살펴보려 해요.


그러니까 이건 저와 작품 사이에 놓이는 어떤 세계 혹은 순간을 조금 더 느리게 살펴보는 이야기예요. 여전히 모르겠고, 확신보다는 질문이 떠오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지의 세계’가 그냥 흩어지지 않고 우리 앞에 응결되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정말 무엇인지 이해해 보려는 시도예요. 한편 당신이 마주하는 세계는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함께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추상적인 주제라 어렵긴 하지만, 오히려 그만큼 정답이란 게 없으니까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생각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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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미술은 안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는 일 같다고 하시면서 이런 얘기를 하셨었죠.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배경을 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작품 앞에서 어떤 것이 느껴지고 왜 그런 것이 느껴지는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요. 그걸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전자는 어떤 지식이나 정보에 관한 것, 후자는 개인의 감상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한 앞의 것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것 그리고 뒤의 것은 주관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고요.


지식이나 정보를 안다는 것의 의미는 비교적 명료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이 작품은 어떤 작가가 몇 년도에 어떤 의도와 배경을 가지고 만든 작품이다”와 같은 내용이 될 수 있겠죠. 미술사, 작가의 삶,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 혹은 작품이 어떤 인상과 느낌을 주는지 보편적으로 이해된 내용도 포함될 수 있겠어요. 즉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미술에 대한 모든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술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분명 필요하고 의미 있는 내용들이요.


그럼, 느낌을 안다는 건 무엇일까요? 사실 사람이 어떤 것에 느낌을 갖는다는 건 질문하기가 새삼스러울 정도로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미술에서는 꽤 무게를 지닌 질문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요. 아마 그만큼 중요한 화두일지도 모르겠어요. 일단 무어라 바로 대답하기 전에 떠올려 보고 싶어요. 작품 앞에서 어떤 것을 느끼고 떠올리는 일, 때론 난해하다는 생각에 느낌은커녕 막연하게 방황하는 일, 명확한 결론보다는 질문부터 하게 되는 일 모두를, 그러니까 앞서 ‘미지의 세계’라 표현한 상태들을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일일수록 아주 천천히 생각해 보고 싶어요. 거기에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러한 일들, 나와 작품 사이에 놓이는 이 막연하고도 또 막연한, 그러나 꼭 뭔가가 있을 것 같은 미지의 세계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그냥 작품 앞에 서면 불쑥 나타나는 걸까요?


저는 가령 “이 작품은 어렵다”라는 생각마저도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떠올리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작품을 바라보고 이해해 보려던 크고 작은 움직임이 있지 않았을까요. 한 대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말하려면, 그 대상을 분명히 ‘봐야’ 하니까요. 우리가 살아가며 목격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일일이 사유하지는 않잖아요. 즉, 저는 보다 한 명의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일어나는 ‘보는 행위’를 생각하고 싶어요. 근데 범위를 한정할 수 없는 현대미술을 생각하노라면 보는 일만이 관객의 행동이 아니겠네요. 보고, 만지고, 듣고, 참여하고, 움직이는 모든 행위를 함께 데려와 보자고요.


그러니까 저는 어떤 미지의 세계가 나와 작품 사이에 놓이려면 우선 관객인 나의 관심 어린 시선과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내면에 무엇인가가 떠오르고 이어질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못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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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시메옹 샤르댕, The Attributes of Painting and Sculpture, c.1728

 

 

그럼 작품은 그저 덩그러니 놓여 관객을 기다리는 걸까요.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을 생각하면 결코 그렇게만 판단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은 ‘그냥 말하면 되는 일’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죠. 특히 예술가의 경험과 사유 속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치며 구축된 고유의 예술적 언어를 통해 나타나는 작품은 더욱이나 ‘그냥 말한다’라는 표현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깊은 사연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날 거예요. 그러기에 저는 예술이 말하는 어떤 의미, 가치, 메시지 같은 것이 그저 한 두 개의 문장이나 단어로 가둬지기에는 더 복잡하거나 입체적이거나 섬세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고민과 시도를 해왔을 거예요. 어떤 의미를 전하는 일, 자신이 구현한 작품을 통해 관객이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경험하고 발견하는 순간을 위해, 예술가는 사람이 살아오며 마주하는 장면과 지니게 되는 관념, 이미지나 상징, 그러한 것이 상대에게 전할 감각과 그로부터 파생될 여러 질문들까지 많은 것을 그려보고 고민했을 거예요. 이렇게 몇 단어만을 나열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더 많은 것을 깊이 헤아리며 예술가 자신의 관점으로 마주한 세계를 구현하는 과정을 가졌을 거예요. 우리는 그 결과로 나타난 작품을 마주하는 것이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작품을 탄생시키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능동적인 움직임과 사유를 촘촘히 응축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잠시 길고 복잡한 얘기가 되었지만, 저는 이러한 관객과 작품이 마주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미지의 세계에 주목하고 싶어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저 있기 때문에 시선에 담아두고 스쳐갈 뿐인 무미건조한 상황이 아니라, 각자 하나의 주체로서 서로 마주하여 상호적인 시간을 가지는 순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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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The infinite recognition, 1963

 

 

이런 질문이 떠오르실지도 모르겠어요. 편하게 말하면 뭔가가 느껴지는 것 같을 뿐, 여전히 잘 모르는 상황인 미지의 상태가 이렇게까지 생각할 일인지요. 그리고 명확하게 이해되는 내용이 없는 상태가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인지 구분하고 판단하는 일이 정말 의미가 있는 건지, 그리고 그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도요.


지금 우리는 그 사이에서 질문하고, 막연하지만 바라보고 생각하며 떠올리는 일들에 대해 조심스레 더듬으며 헤아려보려는 두루뭉술한 여정을 지금 이 대화에서 걷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이에 대한 어떤 답을 드리기보다는 처음 얘기했던 내용을 다시 상기해보고 싶어요. 우리 모두는 각자 미술에 대한 것을 알고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여전히 모르고 파악할 수 없는 상태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을요. 이 자체로도 우린 완전히 무어라 단언하기에는 모호하고 유동적인 상태 위에 놓여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어쩌면 인간과 예술 자체가 이미 그런 존재일지도 모르고요. 저번에 얘기한 ‘틈’처럼요.


“느낌을 안다는 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여기서 다시 떠올려볼까요. 그리고 미술에 대한 지식을 안다는 것이 언제 비로소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싶어요. 그런 중에도 미지의 상태가 ‘존재하는 것’이 되고 비로소 의미란 걸 갖게 하는 건 무엇일까요. 난해하다며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은 어렵게 느껴진다”라는 한 뼘의 생각을 조금 더 하게 하는 건 무엇일까요.


정해진 정답은 없기에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대답이 나올 수 있을 거예요. 그 사이에서 저는 ‘태도’라고 답하고 싶어요.


태도가 없다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누군가가 의미를 말하고 반복해도, 결국 그것이 진심으로 가닿는 곳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헤아리려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의 내면일 테니까요. 그 사람이 가진 태도의 무게와 결만큼, 그 미지의 세계란 것도 그런 무게와 결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대면하는 순간도 관객의 태도에서 시작될 것이고요. 미술뿐만 아니라 사람이 의미란 걸 발견하고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이 그러한 태도로부터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즉, 결국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 예술 세계 속에서 각각의 주체가 중심을 잡고 무엇인가를 말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건 결국 그 사람의 태도인 것 같아요. 당장 매번 새로운 미술을 마주하는 우리가 아주 가까이서 조금 더 선명하게 지니고 살필 수 있는 것이 태도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작품으로부터 다가오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판단하는 일은 결국 그러한 나 자신과 그런 내가 작품을 마주하는 태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모름’의 상태, 이 ‘미지의 세계’를 판단하는 일까지요.

 

이 태도란 건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을 거예요. 그 관객이 살아온 삶, 경험, 사유, 그렇게 갖춰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그 순간의 관심과 호기심, 작품을 마주하려는 마음가짐 등등. 이렇게 말하니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아요. 결국 ‘나’라는 사람이기에 가진 것들이니까요.


이따금 이런 질문을 해요. “우리가 미술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이전에, 우리가 미술을 어떤 태도로 마주하는지 살펴볼 수는 없을까” 미술은 정말, 정말 정말 무궁무진하니까요. 지식을 아는 일, 그것만으로 관객으로서의 나를 가늠하는 게 과연 얼마나 의미 있을까 조금 의심스러울 때가 있어요. 무궁무진한 만큼 알아야 하는 일은 끝이 없으니까요.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미술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마 대부분의 미술 관객이 알 때보다 모를 때가 많고, 확신하기에는 여전히 더듬고 더 바라보게 되는 때가 많을 거예요. 저 역시 그런 무수한 미지의 상태에 놓이는 한 명의 관객이고요. 그런데 그런 중에도 무언가를 질문하고 생각을 이어가볼 수 있게 하는 건 결국 그 미지의 상황에 처한 제 시선과 태도를 살피는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왜 이런 게 느껴질까’, '왜 이 부분이 자꾸 시선에 밟히는 걸까', ‘이 작품은 너무 어렵다. 아직 모르겠어’, ‘이 느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하지’, 라면서요. 물론 아무것도 안 떠오른다며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실제로도 정말 모르겠어서, 막연히라도 잘 와닿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지나칠 때도 있었고요.


이러하고 저러한 여러 순간들 중에서, 그래도 어떤 것이 제 내면에서 시작되고 경험이 일어나던 순간은 조금 더 머무르려는 태도를 선택한 때에 있던 것 같아요. 이건 분명한 것 같아요. 들여다볼수록 머물러볼수록 미묘한 느낌들이 조금 더 선명하게 와닿는 것 같았고, 그런 경험들이 쌓이니까 작품 앞에서 제 느낌을 찾아가는 발걸음의 형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작품 앞에서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나를 이해하고, 내가 느끼는 것을 통해 작품을 살펴보며 무엇인가가 오고 가는 과정이 여전히 ‘미지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흩어지지 않고 조금씩 응결되며 의미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 같았어요.

 

아마 저는 그런 순간들, 매번 새롭게 나타나는 미지의 세계를 내면에 쌓아가며 미술에 계속 시선과 마음 두고 있는 관객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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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 이야기가 당신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어요. 이런 저와 달리 당신은 어떤 태도로 예술을 마주하고, 어떤 의미를 읽어내곤 했고, 어떤 순간을 경험하곤 했는지 궁금해지네요. 어쩌면 예술의 꽤 많은 다채로운 이야기는 아직 알지 못한 지식이 아닌 생각보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러니까 내가 지닌 태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당신은 여전히 질문하게 될지도 모르죠. 그 미지의 세계라 표현한 것이 정말 의미가 있는 건지, 그 막연함과 모호함을 두고 과연 우리가 어떤 의미를 논할 수 있는 건지요. 그건 누군가가 완전히 내려줄 수 있는 답이 아닌 것 같아요. 아마 그 역시 그것을 마주한 당신의 태도가 답할 수 있는 것이겠죠. 그런 서로 다른 태도들 사이에서 저는 그 미지의 세계에 조금 더 시선을 기울이며 머물러보면 조금 더 많은 것이 보이고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는 한 사람이자 관객인 거고요.


어떤 태도가 좋다, 나쁘다,라는 건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기준도 없고요. 다만 그 미지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려는 관객으로서의 이야기는 할 수 있기에, 오늘 그런 이야기를 했을 뿐이에요. 그런 관객이 세상 어딘가에 있고, 지금 여기 앉아있고, 지금까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렇게 마무리되어가는 거예요. 어느새 이렇게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났는데, 이제 남은 이야기는 오롯이 당신에게 달려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아닌, 당신의 미지의 세계, 그것을 마주한 태도는 어떠한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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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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