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 잘 살아가자 [도서]

허새로미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글 입력 2021.05.0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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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새로미 작가의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다소 중의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출판사 봄알람의 에세이 시리즈 ‘출구 총서’의 첫 번째 권이다. 처음에는 이 책의 제목을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도대체 왜 죽음이 목적이 되어버린 걸까, 어떻게 저렇게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을까, 이 기록을 읽어나갈 수 있을까?’라는 섣부른 걱정을 했고, 용기 내어 책을 펼쳐보니 모든 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작가는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그걸 알게 된 순간 안심했고, 나도 모르게 "살아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때서야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는 35세에 신용카드 한 장을 들고 '집(원가족)'을 뛰쳐나와 행복을 찾은 저자 자신에 대한 글로, 그가 어떻게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책은 1부 ‘혼자되기’와 2부 ‘같이 살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원가족 내에서 ‘딸’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집을 뛰쳐나온 이후 어떻게 ‘혼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다룬다. 2부에서는 그가 반려동물과 함께, 또 다른 여자들과 삶을 공유하고 연대하며 새로운 가족이 되는 과정을 다룬다.

 

 


‘혼자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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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모부, 자신,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가족’이라는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딸’이 겪는 가족은 ‘아들’이 겪는 가족과 달랐다. 저자는 가족과 계속 접촉하는 것이 서로에게 해롭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에서 벗어나려 한다. 신용카드를 쥐고 집을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집을 뛰쳐나오기에는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그는 사무실 돌바닥에서 목도리를 베고 첫 밤을 보낸 뒤 혼자의 생활을 꾸려간다. 오늘 안 죽고 버텼으니 내일도 죽지는 말자는 정도의 계획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 바깥을 전전하는 동안 저자는 새로운 관계를 만나고, 그들에게 삶을 빚진다.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게 된 것이다. 새로운 관계를 꾸려 나가는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안다.

 

모두가 놓여있는 환경이 다르기에 저자의 상황이 나의 상황과 똑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그 모든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어떤 부분은 내가 겪어 본 상황이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주변 친구들이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가족 내에서든, 가족 밖에서든 언제나 한 번쯤은 스쳤을 이야기였다. 저자가 홀로 서기를 결심하고, 또 혼자가 되는 과정, 더 나아가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저자와 나의 삶은 완전히 다르지만, 책의 곳곳에서 내 삶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페미니즘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열여덟, 혹은 열아홉의 나에게는 조금은 생소하고 낯선 단어라서, 그저 '여성운동이요'라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일말의 관심을 가진 게 아니라, 선생님에게 그 단어를 지적으로 잘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게 아쉬웠다. 그때의 나는 안전하고 협소한 세계에서 살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환경은 드물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가족'이라는 형태 안에서 정서적 지원을 받았다. 그렇기에 안전하고 협소했다.

 

물론 일상에서 맞닥트린 차별이 완전히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차별을 '구조적 차별'이라고 인식한 건 대학 입학 이후다. 더 큰 세계에서 마주한 것들은 정신 건강에 썩 좋지 않았다. 2016년에 대학에 입학해, 서울에서의 삶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강남역 살인을 목격했다. 낭만이 가득한 줄 알았던 캠퍼스 안에는 젠더화된 차별과 폭력이 만연했다. 그 이후에야 나는 내가 상대적으로 '운이 좋게'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다정한 엄마 아빠, 오빠 둘, 그리고 ‘막내딸’인 나. 엄마 아빠는 내가 오빠들과 싸울 때면 ‘막내’ 그리고 ‘딸’이라는 이유로 내 편을 들면 들었지, 내가 ‘딸’이라는 이유로 나를 더 미워한 적은 없다. 남자 형제를 가진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차별이 낯설었다. 가족 안에서 나는 다소 ‘지랄 맞고’ ‘건방진’ 편이었고, 가족들은 그 모습을 보며 ‘세상에 이런 집이 어디 있냐’라고 장난기 어린 말을 툭 내뱉기도 했다. 그런 가족 안에서 살았다. 그래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이 말하는 가족에 대한 애증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민을 토로하는 친구들에게 ”그래도 가족인데 “라는 말을 내뱉은 적도 있다. (물론 지금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꼭 안아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딸인 내가 아들인 오빠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은 건 아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운이 좋아 ‘아들 못지않게’ 길러졌을 뿐이다. 엄마 아빠가 아무리 나를 사랑해도, 내가 ‘딸’답기를 은연중에 바랐다. 가끔 아빠는 ‘딸’이 만들어주는 요리를 바랐다. 엄마는 ‘딸’이 정혈대 뒤처리를 제대로 못해 펼쳐진 '민망한' 화장실 풍경을 목격하면, 집에 아빠나 오빠들도 있는데 칠칠치 못하다고 질색했다. 오빠들은 귀가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반면, 딸인 나의 귀가 시간은 제한적이었다. '아들'과 '딸'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두 오빠들과 다르게 행동하면 엄마 아빠는 "오빠들은 안 그런데, 너는 왜 그러냐"라는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다행인 건, ‘지랄 맞고’ ‘건방지게’ 자라온 나는 "내가 왜?"를 입에 달고 사는 인간이었고, 가족들은 그런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이들이었다. 즉, 서로 대화와 변화가 가능한 가족이었다.

 

내가 견디지 못했던 건 ‘가족’보다는 가족이 위치한 ‘곳(지역-종교 커뮤니티)’이었다. 당시에는 이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지만, 더 큰 세계에 발을 담근 지금은 그때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 앞서 내가 ‘지랄 맞고’ ‘건방지게’ 자라왔다고 묘사했는데, 이건 가족 밖의 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모습에 가깝다. 대충 '여자애가 오빠한테 감히, 부모님한테 감히'의 뉘앙스로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 우리 가족은 기독교 가정으로, 나는 소위 말하는 ‘모태 신앙’이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서의 내 정체성은 ‘개인’이라기보다는 ‘누구의 딸’에 가까웠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둘 중 하나였다. ‘누구의 딸’답거나, ‘누구의 딸’답지 않거나. '모범적'으로 행동하면 '누구의 딸'다웠고, 그렇지 않으면 '누구의 딸'답지 않았다. (교회가 위치한 동네 자체도 좁아서, 밖에 나가면 나를 '누구의 딸'로 아는 어른들이 즐비했다.)

 

격정의 중2 시절을 보내던 나는 매사에 불만이 많아 교회에서도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곤 했는데, 당시 "(여자애가 왜 그렇게 뚱하게 있느냐) 좀 웃어라"는 말을 귀 따갑게 들었다. 집에서 하던 대로 오빠들을 대하면 교회 어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고, 뒤따라 오는 '여자애가 어떻게 오빠한테'라는 식의 귀여운 잔소리는 덤이었다. 집 안에서 듣는 소리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지만, 집 밖에서 듣는 소리는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사회적으로 '어른'이라고 여겨지는 이에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여자애'가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거기다가 일회적이지 않은 관계라면 말이다. 앞에서는 꾹 참고 있다가 뒤돌아서 짜증을 내는 게 끝이었다.

 

교회 내 성별화된 봉사도 참 고역이었다. 어릴 때부터 배운 피아노, 머리가 조금 자라자 (그 시절의 나는 좋아하던 아이돌 콘서트 DVD에 낚인 순진한 중학생이었다.) 반강요로 시작된 교회 반주 봉사. 중학교 때까지 받던 피아노 레슨을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공부에 집중하라는 이유로 그만두게 되었지만, 반주 봉사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계속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오빠들과 나 셋 다 피아노를 칠 줄 알았지만, 이 성별화된 봉사는 '부모님의 아들'인 오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물론 큰오빠 또한 드럼을 연주하며 찬양대 봉사를 했지만, 나에게는 선택권이 '피아노' 밖에 없었고 오빠에게는 '피아노' 더 나아가 '드럼'까지 있었다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피아노 반주 봉사가 너무 하기 싫었다.)

 

이 외에도, 나는 '성별화된 무언가'를 교회에서 가장 많이 목격했고, 가장 크게 체감했다. (구구절절 나열하지만 끝도 없지만, 그러면 논문 분량이기에 여기서 줄인다.) 자연스럽게 위기감을 느꼈다. 대학을 최대한 먼 곳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혹여나 가까운 곳으로 대학 진학을 하게 된다면 이곳에 매주 불려 올 것이 뻔했다. 수시와 정시 원서를 쓰면서도 '매주 고향에 내려올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대학'에만 지원했다. 주변에 위치한 지역 거점 국립대학에도 지원하는 게 어떠냐는 엄마 아빠의 권유는 단칼에 차단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왔고, 숨통이 막히던 지역-종교 커뮤니티를 벗어났다. 서울에서 교회를 가도 '나 홀로(개인)'니까 상대적으로 괜찮았다. 속된 말로 '마이 웨이'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차고 넘치긴 했다.)

 

가끔 본가에 내려가 교회를 방문하면, 과거에 느꼈던 불편함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또 한 번 느낀다. 나와 작은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 그래서 함께 본가에 내려가곤 하는데, 교회에 가서 듣는 말은 사뭇 다르다. 오빠가 듣는 말은 학업과 관련해 고생하고 수고한다는 격려가 주인 반면, 내가 듣는 말에는 '다 컸으니 시집가도 되겠다' '여자는 공무원이 최고' 등의 '여자'가 전제된 말이 끼어 있다. 물론 오빠가 나보다 공부를 잘해서, '학벌(이라는 말이 불편하기는 하지만)'의 차이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선에는 '성차'라는 맥락이 분명 존재한다. 가족들이랑 같이 지내는 건 참 재밌고 좋은데, 이를 위해 감당해야 하는 주변적 리스크가 컸다. 가끔은 괜찮으나, 평생은 참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 자신을 위해 조금은 거리를 둬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성년자 시절, 내가 꾸려 갈 미래의 '(정상)가족'에 대해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니다. 그래도 막연히 남들처럼 ('정상 가족'을 꾸려) 살겠거니-, 은연중에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더 큰 세계에서 마주한 것들은 정신 건강에 썩 좋지 않았고, 그 부조리함을 깨달아버린 지금은 '정상 가족'에 대한 과거의 생각을 발로 뻥-차서 버린 지 오래다. 가족 안에서 아무리 ‘아들 못지않게’ 자랐다고 한들, 바깥에서 부딪치는 시선까지 '아들 못지않은'건 아니었다.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혼자'를 바라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혼자 잘 살고 싶다. 원가정을 떠나 '혼자되기'를 실현한 저자의 삶과, 원가정과 조금 먼 곳에서 (거리를 두며) '혼자되기'를 꿈꾸는 나의 삶은 분명 큰 차이가 있지만, 어딘가 비슷하다.


 

 

'같이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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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를 바라고 있지만, 사실 '완전한 혼자'는 불가능하다. 어쨌든 삶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글에서 "집을 나와 가족과 연락을 끊었고, 이전에 알았던 친구들이 모두 결혼하고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는 시절에 이제는 정말 혼자가 된 나는 수시로 우울했고 여전히 밤에는 술을 마셨다. 마음의 닻을 내릴 데가 필요했다."라며 당시의 심정을 고백한다. 그렇게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만난다. 또한 저자는 집을 나온 지 일 년 만에 드디어 보증금 천만 원을 모아 월셋집을 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 가족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을 만난다. 원가족을 떠나 여자들과 새로운 관계 만들기를 시작한 것이다.

 

언제든 가방 하나 들고 어디로든 떠나겠다고 하던 저자는, 비로소 잘 살아보겠다고 세간을 마련하고 집을 돌보기 시작한다. 그는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마을을 짓겠다는, 지금 여기서부터 진짜 집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막연했던 미래를 조금이나마 그려봤다. 나 또한 '혼자'를 바라고, 동시에 '완전한 혼자'는 아닐 수 있는 주변과의 관계를 바라고 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조금 먼 이야기다.

 

다만, 요새 '혼자되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다. 대학 시절의 대부분을 학교 기숙사와 외부 기숙사에서 지냈던 나는 1년 전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물론 혼자는 아니다. 지금 내가 지내는 서울의 자취방은 작은오빠와 함께 사는 곳이다. 동대문구에 위치한 우리 학교와 관악구에 위치한 오빠네 학교의 타협점을 찾기란 참 어려웠다. 각자 기숙사에 살던 시절에도, 어쩌다 만나는 날이면 어디서 만날 지를 가지고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철이 좀 든 건지, 둘의 남은 학기를 고려해 위치를 정하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집을 구하러 다니던 당시 나는 마지막 학기만을 앞두고 있었고, 오빠는 더 많은 학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오빠네 학교 주변에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나쁘지 않은 곳을 발견했다.

 

작은오빠는 자기네 학교와 가까운 그 집이 마음에 들었는지 당장 계약하고 싶어 했고, 집 자체는 괜찮았으나 위치나 주변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유지했다. 안전 면에서 평판이 좋은 동네도 아니었고, 집을 찾아오기까지 지나쳐야 하는 많은 골목들을 실제로 보니 더 불안했다. 엄마 아빠도 내 떨떠름함에 동의했는지, 들뜬 오빠를 뒤로하고 공인중개사에게 한 곳 정도만 더 가 볼 것을 요청했다. 차를 타고 달려 두 번째 집에 도착했다. 오빠네 학교와 조금 멀어지지만, 집이 깔끔했고, 서울 외곽이기에 가격도 적당했고, 주변 환경도 (대학가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나름 괜찮은 곳이었다. 물론 여기도 내가 다니는 학교와는 많이 멀지만, 그래도 처음에 봤던 집보다는 안전한 공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두 번째로 본 집에 지금 1년째 살고 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썩 마음에 들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심심하고 외롭다. 아직 대학생인 나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대학 주변에 머물러 있는데, 대학과 정반대 되는 위치에 살게 되며 당연했던 관계가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이다. 고민거리가 있으면 불러내던 친구, 같이 카페에서 과제하던 친구, 배고프면 같이 배달시켜 먹자고 부를 친구, 기타 등등 ‘동네 친구’라고 할 만한 존재가 없어졌다. 내가 가장 안정감을 느끼던 관계를 잃은 것이다. 너절한 경험들을 거치고 거쳐온 '우리'는 '여자'의 일상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유대감을 쌓아왔고, 그렇기에 서로에게 적절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러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는 건강하고 안전한 관계였다.

 

과거에는 너무나 당연했던 이들을, 지금 만나기 위해서는 어디서 만날지, 무얼 먹을지, 뭘 할지 등을 고민하며 ‘각 잡고’ 약속을 잡아야 한다. 여기에 맛집과 인스타 감성의 카페는 있을지 몰라도 일상성은 없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초반에는 괜찮지 않았다. 특히 작은오빠가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방에 들어오기 전, 몇 달 간은 나 혼자 지냈기에 더욱 괜찮지 않았다. 낯선 동네였고,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어디 한 곳 나가려면 지도 애플리케이션은 필수였다. 외롭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작은오빠가 이사 온 후 나름 즐겁게 지지고 볶으며 이런 감정은 조금씩 옅어졌지만, 와중에도 친구들과의 일상이 떠오르곤 했다. 친구들과의 관계 자체가 무너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의 그 당연함과 익숙함이 그리워졌다. 특히 오빠가 ‘아무렇지 않게(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기에 선뜻 나갈 수 있다는 의미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날이면, 종종 배알이 꼴려서 시비를 털었다. 억울하면 나도 나가라고? 학교까지 왕복 3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니까, 그건 ‘빅 이벤트’다. 오빠와 지내는 것도 물론 재밌다. 하지만 여자인 친구들과 눈짓만으로 감정을 공유하던 과거의 순간을 어떤 '재미'와 비교하겠는가.

 

코로나 19 상황이 지속되며, 올해는 작은오빠가 본가에서 수업을 듣고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지금 혼자 서울에서 지내는 중이다. 1년 전 느꼈던 외로움과 불안을 지금도 종종 마주친다. 동네 지리에는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이 동네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다. 저자가 글로 풀어놓은 '자매들과의 관계'가 부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혼자되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같이 살기'에 대한 열망도 키워가는 중이다. 언젠가는 정말로 '혼자'가 될 텐데, 그때는 반드시 친구들,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혼자, 그리고 같이 '잘' 살아가고 싶다. 물론 나와 친구들은 대학 졸업과 취업 준비, 그리고 사회 초년생 사이라는 과도기에 놓여있어, 몇 년 뒤에 뭐가 어떻게 될지는 한 치 앞도 모르지만 말이다. (미래의 새로운 관계도 늘 환영이다.)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를 읽으며 나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용기와 실마리를 얻었다. 아마 '여자'라면, 그리고 '여자'의 삶에 공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이 책에 대해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이 책을 선물하고 싶은 몇몇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들려주고 싶다. “딸들에게 하나의 위로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을 돌볼 의무가 있다. 우리는 더 잘 살고 더 건강하고 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제까지는 상상도 못 해보았을 만큼 더욱 그렇게 되어야 한다.”

 

삶다운 삶을 살고 싶다. '죽으려고 사는' 삶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살아가는, '살아 있어서 다행인 삶' 말이다. 친구들에게 이 책을 건네며, '우리 잘 살아가자.' 그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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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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