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아주 길고 가느다란 행복에 관한 소원

글 입력 2021.05.0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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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인의 행복도, 나 자신의 행복도 잘 빌지 못하는 편이다. 행복의 기원이 어떤 마음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고, 분명한 행복이라는 게 무엇인지 감을 잘 잡지 못한다. 어떤 것이 행복인지 생각해본 적이 언제가 마지막인지도 모르겠다. 행복에 대해 단언하지 않는 이유는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었고, 내가 행복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들이 역설적으로 나를 불행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늘 빠듯하게 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행복뿐만이 아니라 내가 다룰 수 있는 감정의 폭이 한없이 좁아지고 있었다. 우울감, 화, 침울함 등에 대해서는 상세히 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 즐거움과 관련해서는 유난히 말이 짧아졌다. 꽤 오랫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었다.

 

작년 한 해 학교를 쉬면서 스스로 감정을 어루만지는 작업을 많이 시도했다. 그 중심엔 내 가족들이 있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대화할 기회가 잦아지다 보니 그때부터 가족 소설을 자주 읽거나, 엄마 아빠의 행복에 대해 대신 말하고 싶어 하거나, 그들이 겪은 현대사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소소하게 가족들이랑 술잔을 기울이면 조금씩 내가 태어나기 전 부모님께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들려주시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미묘한 기분이 자주 들었다. 1순위로 지켜야 할 것이 내가 아닌 가족들이라면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현재로서는 부양에 대한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는 내게, 매 순간 가정을 1순위로 택했던 그들의 입장을 내가 언제쯤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을지 감도 잘 안 잡힌다.

 

나는 모든 순간에 있어 하고 싶은 일을 택했다. 음악을 배웠었고, 전공도 예술경영으로 택했다. 부모님은 행정학을 선택하길 원하셨지만, 나는 하기 싫은 일이라는 이유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택할 기회가 있었지만, 부모님의 삶에서는 선택이랄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있어 선택이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길고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고르는 것, 조금 더 좋은 조건에서 근무할 수 있는 것이었지 한 번도 그들이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에게 선택할 기회를 쥐여준 것은 부모님이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 선택이란 불가피한 조건 안에서 이뤄진 것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나서는 기분이 매우 미묘했다. 3녀 중 막내로 있으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었고, 부모님의 존재 자체에 당위성을 주장했던 것이었다. 나는 내 또래 친구들보다 좀 더 철들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편이었고 부모님의 고생, 언니들이 겪은 현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깊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택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것까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연년세세> 中, 황정은, 창비

 

 

그 마음에 대해 한동안 복기했다. 수없이 어루만졌던 그 마음을 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를 통해 좀 더 직시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현대사와 맞닿아있는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대 속에 가려졌던 개인의 존재를 이야기하며 자연히 우리 부모님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막내면서 늦둥이였던 나는 여러 선택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수 있었고, 내 가족들은 몇 안 되는 선택지 중에서 그나마 나은 조건을 가진 것을 선택해야만 했다는 것. 참 당연한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나는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니까. 라는 생각에 안일해 있었다.

 

장류진 작가의 <연수>라는 소설에서는 자식의 성공이 부모의 행복으로 귀결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보자면, 엄마의 성공이 나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과 마음의 크기가 동일할까? 나를 낳는다는 것과 내가 낳아지는 것은 똑같은 말이지만 무게의 차이가 조금 있는 듯싶다.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솔직히 지금도, 몇 년이 지나도 누군가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은 말로써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산업재해를 겪으셨다. 손가락에 감긴 붕대를 보면서 언젠가 꼭 이런 글을 쓰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몸에는 산업재해로 인한 상처들이 몇 개씩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왠지 내가 낸 것만 같아서 묘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아는데도 말이다. 일터에서 다친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손가락을 꿰매고 집에 돌아와서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을 보면서 아빠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붕대 감은 손가락으로 운전하고, 일을 하고... 손가락을 달고 '일'을 한다는 것의 이유를 알아버린 이상 이를 외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성애를 몇 십 년을 갖고 살아가는 아버지가 어루만지는 감정의 폭을 내가 대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주 상투적인 바람이지만 그래도 곱씹기 위해서 한 자 적자면, 요즘 그 누구보다 부모님의 행복을 빌고 있다.  낯 간지러운 것을 알아서 내 개인적인 공간에만 '우리 가족이 오랫동안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고 써 내려가지만 말이다. 행복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가정의 안정된 관계에서 오는 평안함도 행복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그저 이 평안함이 오래 지속하길 하는 마음이다. 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실실 웃을 수 있는 것, 가족의 재미난 영상을 찍고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것, 엄마 품에 안겨서 곤히 잠드는 것. 이 안온한 마음들의 다른 이름이 행복이라면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다채로운 감정의 폭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이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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