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결정적인 순간의 이름을 떼어 버리면, [사람]

글 입력 2021.04.27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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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한 꺼풀 벗은 여름이 되고, 여름이 쓸쓸해져 가을이 되었다가, 소복한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되면 우리는 한 해가 지났음을 실감한다. 갖가지 계절이 지나감에 우리는 굳이 숫자를 붙였다. 그래서 우린 대략적으로 3월부터 봄, 5월이 지나면 여름, 9월이 되면 가을, 12월을 맞이하면 겨울을 준비한다.

 

세 개씩 묶인 네 뭉텅이에 달린 이름을 다 떼버리고 나면 계절은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언제 여름이 되었는지 모르게, 언제 다시 추워졌는지 모르게. 무방비하게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문득 아, 계절이 바뀌었구나를 느끼고, 그저 날씨에 맞게 옷을 입을 뿐이다.

 

그저 흘러가는 계절에 맞게 바뀌는 옷차림처럼, 우리의 생각도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바뀌어갈 때가 있다. 큰 사건이나 계기가 있지 않아도 우리는 인생에서 꽤 중요한 전환점을 우연히 맞이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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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모르고 세상이 날 괴롭힌다 느꼈던 치기의 스물을 지나 몇 살을 더 먹고 난 지금, 그 순간을 돌이켜보면 신기하리만치 고요해진 현재의 내가 이상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좌절하고 절망하게 만들었던 유난스러운 고민들은 하나도 나아가지 못했음에도 이제는 꽤나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기까지 변한 것은 그저 시간이 흘렀음 뿐이었다.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 혹은 그 흔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렇지 않나. 위기에 처한 주인공은 소중한 누군가의 희생, 지혜로운 어떤 이의 조언, 또는 롤 모델의 한 마디. 그게 얼마나 사소하든 각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각성은 너무나 미미하고 흐릿해서 언제 나의 정신이 어느 무렵부터 조금 더 건강해졌는지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니 어라, 나 좀 괜찮아졌네, 스스로를 좀 더 돌보게 되었네? 하는 건조한 감탄만 하게 된다.

 

그 후로 나의 존재에 대한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이 돌풍이 언제 멈췄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는데, 이 우연한 소멸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희미한 각성의 가치는 그조차도 희미한 것일까 하는 이전보다 더 많은 의문들이 생겨났다. 어쩌면 이건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보금자리에 남은 잔해들을 청소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이 언제 지났는지도 모르면서 어느 날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진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았다. 사실 외투를 벗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 얼굴도, 체형도, 목소리도 모두 그대로였다. 환골탈태를 빗맞은 내가 유일하게 달라진 곳은 오롯이 표정 하나뿐이었다. 물론 그전이라고 해서 즐거울 때, 행복할 때 웃지 않고 매번 우울의 늪에 빠져 산 것은 아니었다. 그때도 잘 웃었고 장난기도 많았다. 그리고 속으로 배배 꼬인 심술을 삼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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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비공개 SNS에 끄적였던 글 일부이다.

 

어떤 것들로부터 고통스러워했는지, 나의 불안과 우울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도 모른 채 답답함을 토해내기만 하던 때였다. 저 때는 항상 바라던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나를 정신 차리게 해 줄 누군가, 그래야만 하는 상황, 혹은 생의 결말.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얼른 결론이 나길 바랐던 것 같다.


다시 지금, 나는 제법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구태여 불안과 절망의 원인을 찾으려 애쓰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표정과 말, 행동에 부여했던 괴상한 의미들을 지웠다. 그 자리를 사랑으로 채우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나의 불행 서사에 굳이 연민을 느끼지 않으려 한다. 대신 내가 누린 행복과 애정을 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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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던 절정의 순간은 온 적이 없다.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없이 그저 현재진행형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전의 버릇들이 여전히 나를 끌어내리려 할 때도 있지만 나는 내 인생의 2막이 열렸음을 확신한다. 내가 변했고 그러기 위해 매번 매주 새로운 원고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결정적인 계기 없이, 뚜렷한 기억 없이 그렇게 장을 넘겼다.


결정적인 순간의 이름을 떼어 버리면 이름 없이 흘러간 시간들이 있다. 본래 속도로는 보고 있기 지루할 만큼 느려도, 지금까지 적어간 타임라인을 앞뒤로 마구 휘저으면 시간에 따라 휘둘리는 내 아우성이 보인다. 나의 봄이, 나의 여름이, 내가 진보하는 순간을 나는 느낄 수 없다.

 

나는 다시 또 먼 미래에 지금보다 더 나아갔을 나를 꿈꾸며, 무명으로 찾아와 내 인생 어딘가에 뚜렷하게 남을 이름 없는 오늘을 보낸다.

 


[오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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