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라이프 오브 파이로 보는 '영화적 비교우위' [영화]

글 입력 2021.04.2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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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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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안셀무스의 유명한 신학적 명제이다. 이해보다 믿음이 선행한다니, 어쩐지 궤변처럼 들리기도 한다. 보통 믿음이란 이해에 비해 비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운명적이기까지 한 행위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마치 날아오는 공에 속수무책으로 맞듯이,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가 뇌에 박혀버리면 ‘믿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안셀무스는 이를 완전히 부정하고 든다. 믿음은 이해의 하수인일 뿐이라고. 이 명제에 대한 영화적 설명이 바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에 매료된 관객으로서 안셀 무스의 이 유명한 말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공처럼 날아와 머리를 강타하는 명제였으니.

 

이렇듯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대개 믿음과 신앙에 대한 서사라고 말하고, 이와 관련한 많은 담론이 진행되어 왔다. 물론 그 주제 자체에 집중하는 것도 흥미롭겠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다소 다른 시각을 취해보기로 했다. 영화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 ‘영화적 상상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지닌 '영화적 비교우위'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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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비교우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독특한 신앙심을 지닌 인도 소년 파이의 표류기가 주를 이룬다. 동물원을 운영하던 부모님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길을 오르다 동물들을 함께 태운 배가 침몰했고, 홀로 생존한 파이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긴 표류를 함께한다. 그러나 영화는 여타 표류기로서만 막을 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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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는 동일한 제목의 원작이 존재한다. 캐나다 퀘백 출신 작가 얀 마텔의 장편 소설로, 위의 사진이 그 표지의 모습이다. 영화와 소설 사이의 상호작용이나 각색은 흔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의 수많은 분석점 중 원작과의 비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함은 ‘영화적 비교우위’를 설명하기 매우 좋은 케이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소설의 비교우위 역시 뚜렷한 서사이지만, 아카데미 촬영상과 시각효과상 등을 수상한 만큼 영화적 상상력이 인상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종이 위 평면의 이야기를 한 순간에 입체화하는 영상 서사매체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증명한 작품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 꼽아보았다.

 

 

1) 시대적 배경의 구현, 파이의 뿌리를 찾아서

 

<라이프 오브 파이>에 대해 말할 때 호랑이와의 표류라는 독특한 설정과 바다의 환상성에 매료된 나머지 간과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야기의 뿌리에 관한 것이다. 파이의 고향 ‘폰디첼리’는 인도 땅 중에서도 드물게 프랑스령이 내려졌던 곳이다. 영화에서 폰디첼리는 여타 인도와 달리 환상적인 선경으로 묘사된다. 이는 분명 감독이 의도를 가지고 연출한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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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티첼리의 수영장 정경

 

 

파이 가족의 동물원은 신화 속 에덴 동산을 옮겨놓은 듯한 세트에서 촬영되었다. 그리고 파이 이름의 뿌리이기도 한 수영장은 인도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구화된 모습이다. 인도 하면 떠오르는 색감과 상이한 화면 분위기, 유럽식 건물과 프랑스어로 된 간판이 그 이유이다. 청아함, 청량함 등의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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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공간인 줄 알았던 곳에 천천히 물결이 일어나면서 지느러미 같은 팔을 뻗는 사람의 움직임은 너무나 신화적이라 눈을 의심할 정도이다. 심지어 이곳은 ‘깨끗한 영혼을 위해 방문해야 하는 곳’으로 묘사되기까지 한다. 인도인이 갠지스강이 아닌 프랑스식 수영장을 신성시하다니. 폰티첼리는 쨍한 원색과 넓은 공간감을 활용해 촬영되었다는 점은 분명 어떠한 의미를 함축한다.

 

해방 후에도 프랑스의 이미지가 다분히 잔존한 폰디첼리는 한 마디로 인도지만 인도 같지 않다. 이는 책의 피상적인 묘사를 영화적으로, 또 이미지적으로 생생히 구현한 첫 번째 예시이다. 다른 인도 지역과 폰디첼리의 대비를 미장셴으로 확연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파이는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타고 났으나 동시에 인도스럽지 않음을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인물이다. 파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거기에 있다. 바다와 리처드 파커의 변덕에도 특유의 해학적인 태도를 지켜간 파이의 비범함이 몇 십장의 서술 대신, 단 한 장의 이미지로 대변된다니 이것은 영화가 줄 수 있는 기적이기도 하다.

 

 

2) 침몰 장면- 그저 추락하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침몰선에서 떨어져 나온 파이의 장면을 비교해보자. 소설에서는 ‘화물선이 거품을 내고 트림을 하면서 물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불이 깜빡 하더니 꺼져버렸다.’의 단 두 문장으로 마무리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를 위해 꽤나 긴 러닝타임을 할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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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다른 세계로 타임워프라도 할 듯, 혹은 바다가 아닌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듯 연출된 장면은 파이가 완전한 전환점을 건너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피상적인 묘사에 그쳤을 뿐인 소설에 숨을 불어넣는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선경에 파이의 뒷모습을, 후경에 가라앉은 배와 불빛을 배치한 화면 구도는 굉장히 안정감 있고, 폭풍우가 몰아치던 장면에 비해 고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파이를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그 괴리감에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나타난 단 두 줄의 서술은 영화적으로 재탄생하며 바다의 야생성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는 파이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한다.

 

 

3) 공간적 고립성

 

<라이프 오브 파이>는 표류 장면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작품이다. 원작 소설이 파이의 표류를 ‘체험’하는 위치에 감상자를 놓는다면, 영화는 비교적 관찰자적 위치를 취하게 한다. 이는 두 매체의 본질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소설은 시간적 고립성을, 영화는 공간적 고립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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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미처 다 묘사할 수 없었던 바다의 폭력성과 광활함, 아주 무너뜨리기 보다는 꼭 잔잔한 파도와 고래의 선경을 내려 희망을 심어주고 마는 교활함을 영화는 생생히 시각화한다. 아무리 세계 최대 규모의 인공수조로 촬영했다지만, 태평양의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느껴지는 것은 영화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체험이 분명하다.

 

영화는 공간성을 표현하기에 최적화된 매체이다. 바다가 보여주는 동화같은 풍경은 그 이면에 잔인한 칼끝을 세우고 있는 동시에, 생의 끝에 몰린 파이에게 목숨을 바쳐서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일깨운다. 소설이 파이의 지친 여정을 체감하게 한다면, 영화는 이 서사가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생과 사의 모순을 한 순간에 재현한다.

 

 

4) 줌인(ZOOM IN)과 감정 표현

 

<라이프 오브 파이>의 가장 뛰어난 점은 마지막 반전에서 드러난다. 조금 가볍게 비유하자면, 평생 한쪽으로만 입던 아끼는 자켓이 실은 양면 점퍼임을 깨닫는 느낌이다. 어른이 된 파이가 이를 소설가에게 설명하는 장면은 두 명의 대화 상황을 촬영할 때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구도를 그대로 차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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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스된 카메라는 안정된 바스트 샷을 유지한다. 배우 역시 편안한 표정과 일상적인 어투를 사용해 연기한다. 그러나 구조된 직후, 일본 보험사 직원들에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파이는 온통 흰 색의 이질적인 배경을 등에 지고 있다.

 

카메라는 천천히 줌인하고, 배우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파이에게 점차 다가선다. 같은 발화자가 말하고 있지만, 이렇게 상이한 촬영 기법은 이야기의 진실성과 개연성을 재단하던 관객들의 이성에 차가운 물을 퍼붓는다. 파이가 울고 있어. 저건 진정성의 증거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자 해도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매력은 서사가 지닌 침전물이다.


*   


지금까지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영화적 비교우위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담이지만, 원작 소설을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발표 특성 상 영화의 비교우위에 대해 설명했지만, 소설만이 지닌 매력도 넘치는 작품이다. 소설적 비교우위를 설명하라고 해도 이 정도 분량의 글을 써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얀 마텔 특유의 단면이 날카로우면서도 옥 같이 따뜻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파이처럼 무분별하게 숭배하고픈 문장이 한 둘이 아닐 정도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마지막 반전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글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관객들은 선택을 강요당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을 ‘믿을지’에 대한 선택인지, 어떤 것이 더 '이해할만 한지'에 대한 선택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답이 있다는 걸 전제하는 순간 우리는 답을 찾는 행위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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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답과 오답의 개념 자체가 해체된다면 우리는 그저 믿는다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에 뛰어들 것이다. 각자의 믿음은 모두 다르겠지만, 믿음이 이해에 비해 우위성을 지닌다면 그 어떤 믿음도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같은 풍경 사진을 보고도 누군가는 해질녘 노을이라고, 또 누군가는 새벽녘 해돋이라고 하지 않는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참혹한 현실을 잊기 위한 철없는 소년의 우화이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라이프 오브 파이’ 그 모든 것을 품은 파이의 생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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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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