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떻게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까? [영화]

서양 철학사 &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바탕으로
글 입력 2021.04.22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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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는 아버지를 살해한 죄목으로 기소된 한 소년의 재판에 대한 결정에 있어 12명 배심원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이들이 만장일치로 유죄로 판결하면, 소년에게는 무조건 사형이 선고되게 된다. 즉, 이 재판에서는 소배심제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은 12명의 배심원들이 자의지에 의해서가 아닌 ‘무작위’로 차출되었다는 점과 소년의 유죄가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12명의 배심원들이 어떻게 합의점(만장일치)에 도달하게 되는지의 과정을 서양 철학사에 빗대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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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의가 시작되자마자, 배심원들은 유・무죄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기 위해 투표를 시행한다. 이 때 11명 모두가 유죄라고 생각한 반면, 단 1명(이하 A)만이 ‘무죄’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자 11명의 배심원들은 역성을 내며 명백한 유죄상황인데, 어떻게 무죄라고 생각할 수 있냐고 묻는다. 그러자 A는 자신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는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한다고 답한다. 사람들은 A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토론을 진행하면서 점점 그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했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며 무죄라고 했던 A의 의견에 동의하게 된다.


먼저,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판단을 절대시하고 있다. 한 남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년과 같이 빈민가에 자란 아이들은 모두 사회의 악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으며 자신의 경험의 판단이 진리라는 듯이 말하고 있다. 또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자신의 아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요즘 애들은 다 그렇소”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즉, 소박실재론의 입장을 보이며 경험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험주의는 경험을 인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여 경험을 지식의 토대로 삼고자하였다. 이로서 생득관념을 부정하고, 경험으로서 얻어진 지식은 참된 지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는 경험이 사람마다 다르며, 잘못된 경험의 기원으로부터 잘못된 지식 형성이라는 허점이 있다. 물론, 귀납적 방법을 토대로서 지식을 세울 수는 있겠지만, 하나의 오류라도 발견되면 그 지식은 거짓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경험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의견이 얼마나 그릇된 편견을 낳고 잘못된 결과로 귀착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음으로, 이성에 대한 회의가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배심원들은 자신의 의견을 ‘증명’을 통해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왜 우리는 의사소통에서 자신의 의견을 계속해서 증명하고자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증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올바르지 못한 생각이다. 우리는 어떤 의견을 수용할 때에는 증명보다는 ‘판단’이 더 적합하다. 사람들은 증명이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믿고 있지만, 증명은 대화 상황보다는 논리학이나 수학을 위한 것이고, 대화에서는 판단이 더 유용하다[1]. 이는 일상생활에서는 제대로 된 증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전제부터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성에 대한 믿음은 영화를 봤다면 영화제목이나 등장 배우를 당연히 기억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소년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측면에서 영화를 보러갔다고 했지만 영화 제목이나 배우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배심원들과 법조인들은 소년의 말이 거짓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이는 이성에 대한 막연한 믿음에 기인한 것이다. 이는 A가 한 배심원에게 그가 본 영화 제목에 대해서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해보라고 하고 그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면서 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깨지고 있다. 즉, 이성은 스트레스나 여러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얼마든지 왜곡되고 삭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증인에 대해 생각해보자. 배심원들은 여성 증인의 말을 옳다고 생각하여 믿고, 소년의 말은 거짓이라고 생각하여 믿지 않고 있다. 이러한 믿음과 판단의 출처는 어디 있는가? 바로 자신의 ‘이성’이다. 그들은 같은 증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성적 판단에 있어 여성 증인은 위증을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녀의 말은 참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한 배심원이 ‘안경 자국’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녀의 증언에 대한 확실성은 사라졌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이성의 능력이 완벽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cogito(사유하는 나)는 명석판명하게 인식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유하는 동안만 내가 존재할 수 있으며, 정신을 통해 물체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신 또한 명석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그는 ‘이성’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는다. 하지만, 그는 6성찰에서 일상 생활에서는 충분한 회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수 많은 오류를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한다[2]. 이로서 인간은 항상 자신이 오류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이러한 경우에 있어 철저히 회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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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인과관계의 확실성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소년의 집 아래층에 살던 노인은 “12시 10분에 사우는 소리를 들었고, 애가 ‘죽여 버릴거야’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 마루에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라고 증언했다. “죽여 버릴거야”라는 말의 표면적인 의미만 본다면 이 말이 원인이 되고, 마루에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아버지가 쓰러져서 죽음)가 결과가 된다. 하지만, 이 말은 정확한 원인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영화에서 한 배심원의 행동으로 밝혀진다. A의 모욕으로 열이 받은 한 남자는 A에서 “죽여 버릴거야”라고 말한다. 이 때 A가 그 남자에게 “정말 날 죽이겠다는 뜻은 아니겠죠?”라고 묻는다. 일반적인 우리의 상황을 그려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죽여 버릴거야”라는 말을 자신의 분노의 정도를 표현하기 위함이나 경고의 일환으로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이 말이 살인으로 100% 귀결되지는 않는다.


또한, 노인은 소년이 아버지를 살해한 후 계단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A의 실험으로 인하여 거짓임이 드러난다. 이처럼, 명백해 보였던 인과성을 의심하게 되면서 판단에 있어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와 같이 흄은 근대 합리론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조차 의심하지 않았던 ‘인과성’에 대해 의심했다. 흄은 인과성의 관념에 대한 인상이 없음을 깨닫고, 원인에 인과성의 관념을 유발하는 속성이 있는지를 고찰하였으나, 그렇지 않음을 알아내었다. 이로서 그는 인과성은 우리의 습관에 의해 발생하는 ‘항상적 연결(constant conjuction)’이라고 결론 내렸다. 관념들 사이의 항상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유연한 힘(gentle force)이 있는데, 이 힘의 속성이 유사성, 시간적 선행성, 근접성이다. 하지만, 근접성과 시간적 선행성이 전제되어도 오비이락(烏飛梨落)과 같이 인과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사례가 발생하자 흄은 ‘필연적 연결성’이 덧붙여 필요함을 알아낸다. 하지만 필연적 연결성 또한 관념만 존재할 뿐 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흄은 이 때 자연주의자(naturalist)의 면모를 보이며 심리학적으로 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반복은 우리로 하여금 결합된 대상들 속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게 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대상들 자체 내에 어떤 새로운 성질을 산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반복의 관찰은 마음속에 새로운 인상을 산출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충분한 수의 예들에서 유사성을 관찰한 뒤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언제나 그것을 수반되는 것으로 넘어가려는 마음이 결정되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필연성은 이러한 관찰의 결과이며, 우리의 사고를 한 대상으로부터 또 다른 대상으로 이행하려는 마음의 내적 인상 또는 결정에 불과하다[3].

 

 

이처럼 경험론과 합리론에서 각각 의심했던 것을 바탕으로 칸트는 “모든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하지만,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나오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경험(감정, 직관)과 이성(지성, 개념) 모두를 중시하여 인식(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서 선험적 종합 판단synthetic a priori judgement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2 더하기 3은 5이다”를 예시로 들어보자. 데카르트는 이를 본유적 관념이라고 생각하였다[4].


반면, 흄은 지식을 관념들간의 관계와 사실들 간의 문제로 나누면서 수학적 문제는 전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수학적 관념 또한 경험을 바탕으로 얻어진 관념들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며, 이 때 이 관념들을 이어주는 것이 상상력이라고 설명한다. 칸트는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을 합쳐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2+3=5라는 것은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 때 2와 3 각각의 개념에 5라는 개념이 함유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손가락 계산법과 같이 직관보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에서 12명의 배심원 모두가 대화를 통해 합리적 결정에 도달한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배심원들은 이성, 경험(감각), 인과성 모두를 의심하였고, 이를 종합하여 결국에는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우리는 평상시에 '합리적', '이성적'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이 갖는 함축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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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플라톤의 선의 비유 참고

[2] 데카르트는 4성찰에서 인간이 오류를 일으키는 이유는 인간은 최고 존재자인 신과 비존재자인 무의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자로서 무를 본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무는 완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서 결여를 뜻하다. 신이 인간에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무한으로 주었기 때문에 유한자인 인간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한 6성찰에서는 인간이 오류를 범하는 이유를 신체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인간은 분할 불가능한 정신과 분할 가능한 육체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다고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정신이 신체의 각 부분에서 감각을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공통감각인 뇌로부터 감각을 전달받기 때문이다.(인간의 몸은 송과선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

[3] 코플스톤, 영국 경험론, 이재영 역, 서광사, 1991, p.372-373.

[4] 방법적 의심 중 악령의 가설을 들어 2+3=5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이는 3성찰과 4성찰을 통해 신은 기만자일 수 없다는 점이 증명되면서 본유적 관념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김소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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