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책으로 지은 책으로 지은 책, 김겨울 작가의 '책의 말들'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4.2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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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처럼 퍼져 있는 생각을 액화시켜서 비커에 똑똑 담으면 그게 다시 책이 되는데, 그래서 이 책은 책들이 폐포 구석구석을 돌고 나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음 다른 모습이 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다. P.201

 

<책의 말들>은 작가 김겨울이 여러 책에서 ‘책과 관련된 문장’을 백 개 고르고, 한 문장당 한 편 씩, 총 백 편의 글을 씀으로써 완성한 책이다. 이런 구조를 두고 작가는 “이 책은 책으로 건축되어 있다”라고 표현했는데, 지금부터 나는 그의 건축법을 흉내 내가며 이 책을 추천해보려 한다.

 

나는 김겨울이 ‘책으로 만든 책으로 만든 책'에서 다시 ‘책과 관련된 문장’을 열 개 골라 그를 재료로 짧은 글을 한 편씩 썼다. 작가가 쓴 방법처럼 나 역시 때로는 문장의 원래 맥락에 따라서, 때로는 맥락과 상관없이 각 꼭지를 썼다. 모든 꼭지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고, 책을 읽다가 촉발된 세상에 대한 다른 생각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인용한 문장들은 모두 볼드체로 표기하였으며, 따옴표는 재인용 시에만 사용하였다.

 

이 글이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재미가 있다면 아마 재료가 되어준 본문 <책의 말들>의 덕일 공산이 크니, 그 책을 읽어 보길 추천한다. 만약 재미가 없다면 그건 재료를 잘못 뱉어낸 내 탓이고 본문의 죄는 없으니, 역시 그 책을 읽어보고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길 바란다.

 

 

대표이미지 출처: 유튜브 '겨울서점'

 

 

책은 삶에서 다가오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며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P.37

 

생활기록부에 넣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읽은 책을 제외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동안 내가 자발적으로 읽은 책은 한 손으로도 꼽는다. 사실 한 손을 다 쓰기도 민망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추천한 <아프니까 청춘이다> 한 권 말고는 제대로 읽은 게 없고, 수행평가로 제출해야 하는 독후감 역시 이 한 권 안에서 다른 문장을 뽑아가며 해결했을 것이다.

 

분명 그랬는데, 어쩐 일인지 지금은 책 읽는 전공에 책 읽는 동아리에 책 읽는 대외활동을 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읽기’를 업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 사이에 무슨 바람이 든 건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종종 ‘책 슬럼프’ 같은 게 왔다가 가는 걸 보면, 책은 그냥 그렇게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 하는 게 당연하다는 저자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스펀지 같은 청소년 시절에 좋은 책들을 더 쭉쭉 흡수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책을 가까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언젠가 책은 내게서 멀어졌다가, 또 다가오겠지만 그래도 잡을 수 있을 때까지는 내 옆에 붙여 놓고 싶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만화책을 몰래 읽으려면 교과서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P.141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만화책처럼 ‘불건전해 보이는 책’은 말할 것도 없고, 고전으로 꼽히는 ‘그럴듯한 책’조차 학교에서 -물론 수업 시간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 말이다- 펼쳐 놓고 읽는 건 꽤 선생님들의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루에 잠자고 먹는 시간 말고는 모두 수능과 내신을 위한 공부에 열정을 쏟아야만 하는 시기에, 감히 입시에 도움 안 되는 책을 읽고 있다니?

 

책을 딱히 좋아하지 않던 그 당시에도 ‘학교에서 책을 읽는 게 혼날 일이라니 참 이상한 나라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는데, 친구 동생들에게 전해 듣기에는 그 이상한 나라는 아직도 꾸준하게 이상한 것 같더라. 지금의 내가 학교로 돌아가면 아마 공부가 입시 공부가 다냐며 바락바락 대들지 않을까 싶은데, 그게 아니어도 이미 선생님들께 혼난 기억이 많으니 당시에 책을 좋아하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이해가 가지 않던 책이 조금씩 조금씩 이해의 범위 안으로 들어올 때면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P.189

 

어쩌다 이런 경험을 아주 조금 해보는 바람에, 대학원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주로 급여를 받으면서 대학원에 다니는 자연계열과 달리) 인문사회계열 대학원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지 말라며 빨간 불을 켜는 수많은 인간 신호등을 보면서도, 대학원생들을 교수님의 노예에 비유하는 수많은 자조적인 인터넷 밈들을 보면서도, 석사에서 그만두면 학사보다 취업이 안된다며 말리는 친구들의 우려를 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차라리 공부하다 정신 차려 보면 새벽 2시가 되어 있는 일(놀랍게도 그런 일을 자주 겪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이 흔하다면 운명을 받아들이고 겸허히 진학을 결심할 텐데. ‘공부 맛’을 애매하게 알아서 졸업이 코앞인데도 이렇게 계속 고민 중이다. 그래서 대학원 가신 분들, 다들 대체 어떤 계기로 결심할 수 있으셨던 건가요?

 

 

대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나는 성서와 쿠란과 토라를 다 읽어 보겠다는 결심을 한 패기 넘치는 인문학도였다. P.147

 

내게 종교가 없고, 또 내가 종교라는 걸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여러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게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말은 종교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데,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웠던 것들을 되새겨 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잘못했으면 사과를 해야 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돼요. 폭력은 나빠요. 친구의 잘못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해요.”

 

생각나는 대로 예시를 몇 가지 들어봤는데, 일단 나는 이 중에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첫 번째 예시만 봐도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닌가.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파악하고,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내가 피해를 준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게 내 잘못이 맞다’라고 인정한 뒤, 그에게 용서까지 구하라니. 정녕 유치원에서 이런 고급 과정을 가르치고, 원생들에게 실천을 요구해도 된다는 말인가!

 

이처럼 당연한 것들을 평생 노력해도 지키기 힘들어서, 그리고 지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너무 고통스러운데, 그런데도 꼭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 종교가 만들어진 건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보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면, 그렇게 힘들어도 이상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뜻인 것만 같아 괜히 가슴이 조금 따뜻해지곤 한다.

 

 

멍청한 짓을 저지른 후 그걸 수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P.77

 

그래서 내 일기장이 그 모양이 됐다.

 

 

“마음을 위로하는 책을 추천해주세요” P.83

 

그니까 그런 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든 이 책만 읽으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책. 그런 게 있으면 나는 꼭 그 책을 낱낱이 분석해선 달달 외우고, 누구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말겠다. 눈앞에서 애정하는 이가 우울해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조급한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전부 헛소리처럼 느껴질 때, 그때만큼 스스로가 한심하고 무능력하게 느껴지는 상황도 없다.

 

그러니 뜬금없지만 제가 애정하는 여러분,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주로 어떻게 해주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우울함이 찾아오기 전에 미리 저에게 알려 주세요. 저는 잘 숙지해 두었다가 언젠가 당신이 내가 필요해질 때,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수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짜 낭비, 그러니까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연습도 하지 않고 공연도 하지 않고 맥주만 마시는 그런 시간 낭비를 하면서, 진은영의 「대학 시절」 같은 시를 읽으면서, 침대에서 구르며 갑갑해했더랬다. P.151

 

내가 젊다는 사실마저 부담스럽던 때가 있었다. ‘이 귀하다는 시간을 겨우 이렇게 쓰고 있다니?’ ‘이 특권 같은 삶은 어쩌다 하필 나한테 와서 이 난리지?’라는 생각을 밥 먹는 횟수보다 더 많이 하던 때. 무언가 하고 싶은데 무얼 하고 싶은지는 몰랐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대체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지를 몰랐다. 그런 시기를 보내며 천 번을 흔들리고 이제는 굳건해졌다면 정말 좋겠지만 지금도 난 바람 한 줌에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중이다. 여전히 종종 이 삶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해질 때가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바람이 또 부는구나, 그럼 또 멈추겠지- 하며, 그 시기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굴러가곤 한다.

 

 

그래서 알아듣지 못하는 위로 속에서 생을 마감할 때, 내가 누울 자리마저 책에 양보하기로 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싶다. P.33

 

내가 무언가를 이 정도로 사랑할 수 있을까? 굳이 책이 아니라 무엇이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신이든 꿈이든, 이토록 열렬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마냥 행복해 보이는 것은 아니고, 가끔은 고통스러운 때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걸 보면 딱히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까 두렵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어쩐지 내가 아무것도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일까 봐 두려운 이유는 왜일까.

 

 

누구도 읽을 일 없는 이 책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쓰는 태도를 우리는 품위라고 부른다. P.153

 

내 몸은 운이 좋게도 아직 큰 병에 걸린 적은 없지만, 삶의 질을 조금씩 떨어뜨리는 잔고장이 잦은 편이다. 학창 시절부터 허리와 발목이 안 좋아서 오랜 시간 걷거나 앉아있는 날이 계속되면 약간씩 절뚝거리기도 하고, 일 년에 두어 번은 몰려오는 구토감에 새벽에 잠에서 깨곤 한다. 반나절이나 하루 정도 고생하고 나면 원상태로 금방 돌아온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서, 그런 일을 겪어도 놀라지 않고 ‘음, 당분간 산책은 그만해야겠다’ 혹은 ‘병원 문 여는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지’라고 생각하며 담담하게 대처하곤 하는데, 그런 나도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하는 날이 있다.

 

내 몸이 더 노화되어, 더 자주 이런 일을 겪게 될 때를 상상하게 되는 날이 그렇다. 걸을 때마다 허리와 골반에 바늘로 쑤시는 통증이 느껴지는 게 ‘일상’이 된다면, 그때도 나는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을 무례하게 밀치고 빈자리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을까? 수면의 질이 점점 떨어지고 체력이 고갈되어도, 타인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니라 친절로 대답할 수 있을까?

 

그니까 이건 ‘과연 내가 품위를 지키며 늙을 수 있을까’라는 의심에서 오는 공포다. 여기서 품위란 대단한 교양이나 우아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곤봉을 들고 감시하고 있지 않아도 지켜야 할 걸 지키고자 하는 태도, 애써서 굳이 ‘더 나은 선택’을 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몸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품위를 지키고 싶다면 몸부터 챙겨야 한다. 그러니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계시는 여러분, 저와 함께 허리를 펴고 고개는 들고 모니터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확보합시다. 그게 스스로와 서로에게 품위를 지키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일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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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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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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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echae_lope_da
    • 얼마전 개포도서관과 믿음문고에서 진행하는 김겨울 작가님 강연을 인스타라이브로 보고 김겨울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소개받고 책의 말들이라는 책을 읽어봐야지 생각했는데 이 글을 보고나니 그 생각이 더욱 강해지네요.

      아울러 조예음 에디터님 나름의 각 문장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도 너무 흥미로웠습니다. 어릴적 독서기록장과 현재의 독서, 종교에 대한 따뜻한 생각, 위로와 사랑과 젊음에 대한 글 등등... 유쾌하고 신선하고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ps. 저는 이런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글을 읽을 때, 독자에게 말을 거는 글을 읽을 때 위로를 받습니다. 제가 하지 못한 생각을 보는 것에서도 위로를 받고, 특히 제가 하던 생각을 남들도 하는구나를 알 때 더 위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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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la
    • leechae_lope_da부족한 글인데도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 역시 이채이 에디터님의 글을 잘 따라 읽고 있습니다. 제 글이 위로가 되었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꾸준히 좋은 글을 쓰...쓸...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성스러운 피드백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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