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찾아낸 나의 평생 친구 [사람]

글 입력 2021.04.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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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 사진들이 담긴 앨범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내 의아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기껏해야 2~3살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아빠와 함께 셋이서 찍은 사진을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태어난 지 한 해를 겨우 넘기던 그 때, 이미 나에게는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 어린데!


 

남동생과 나는 딱 16개월 차이가 난다. 소위 말하는 ‘연년생’이다.

 

동생이 태어날 무렵의 나는 겨우 두 살이었다. 엄마아빠의 사랑을 고스란히 양보할 것을 요구하는 건 사실상 헛된 노력이 될 가능성이 높은 나이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쌍둥이보다 키우기 힘든 게 연년생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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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20년 전 무렵의 나와 동생

 

 

하지만 나는 다행히도,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비교적 ‘키우기 쉬운’ 아이였다.

 

엄마가 매일 밤낮이 뒤바뀌는 건 기본이고 유난히 극성스레 울어대던 동생과 치열한 육아 사투를 벌이는 동안 옆에서 혼자 조용히 놀곤 했던, 나름 순하고 점잖은 아이였다. 그러고 보면 감정 표현을 잘 하지 못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지금의 성격은 어쩌면 이 무렵부터 이미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런 나에게도 분명 동생이라는 존재는 환영할 만한 것이라기보다는, 거슬리는 존재였나 보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또래 아이들이 다 꿈나라에 가 있는 늦은 시간에 잠이 드는 아이였는데, 정작 엄마는 매번 그런 나를 혼낼 수 없었다고 한다.

 

동생이 잠들고 난 이후를 ‘온전한 자유시간’으로 생각하는 내가 너무 짠해 도저히 빨리 자라고 재촉할 수 없었다는 우리 엄마. 분명 그 당시의 나에게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는 것보다 동생이 없는 내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으리라.

 

  

 

비교체험 극과 극, 나와 동생


 

같은 배에서 나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닮지 않은 형제자매들이 많다지만, 우리 남매는 그 중에서도 외모부터 성격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판이하게 다른 케이스였다. 사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어린 시절의 우리 둘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쭉 나열해보자면 어느 것 하나 겹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형제관계를 밝힐 경우 의외라는 반응, 놀라는 반응이 나오는 건 다반사고 심지어 먼저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아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6년 내내, 또는 중학교를 다니는 3년 내내 우리가 남매라는 사실을 몰랐던 선생님들도 계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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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달랐던 우리는, 매우 자주 그리고 번번이 부딪혔다.

 

그 중에서도 우리 둘은 ‘공평한 것’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다. 1살 차이라도 하극상은 절대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한다는 부모님의 철칙에 따라 동생이 나를 깍듯이 ‘누나’라는 호칭을 붙여 부르기는 했지만, 사실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우는 마치 쌍둥이의 그것과도 같았다.

 

장난감도, 옷도, 과자도 모두 종류나 색만 다르게 해서 똑같이 나눠받았고, 세뱃돈도 차등 없이 동등하게 받았으며, 심지어 게임 시간까지 정확히 똑같이 분배받았다. 특히 게임의 경우 각자가 배분받은 시간에서 단 1초라도 넘기면 우리는 서로 그 꼴을 보지 못하고 앞 다투어 엄마에게 달려가서 누나가, 또는 동생이 게임을 나보다 ‘10초 더 했음’을 열렬하게 이르곤 했다. 그 정도로 각자의 몫에 민감하던 때였고, 동생은 나에게 있어 거의 철천지원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넌 나한테 안 돼



나는 그런 ‘1살 많은’ 누나로서의 존재감을 줄곧 능력과 성적을 통해 증명하려 애썼다.

 

겉으로 나는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시키는 일은 물론 그렇지 않은 일도 척척 알아서 해낼 뿐만 아니라 크게 될 아이라면 으레 가져야 할 적당한 욕심과 자신감까지 갖춘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학교 방송실에 나가서 최우수상을 여러 개 받아올 때 가장 큰 행복을 느꼈으며, 남들에게 ‘뛰어난 아이’로 인식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때였다. 그리고 이것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사실 알량한 내적인 동기 따위가 아니라, 내가 동생보다 뛰어나고 능력 있는 아이라는 것을 부모님께 똑똑히 알리는 데 있었다. 이는 동시에 내가 가진 지위와 자리를 결코 넘보지 말라는, 동생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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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황은 결코 내가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와는 너무나도 달랐던 동생은, 그 너무나도 다른 본인의 성격을 이용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나처럼 좋은 성적을 받아와서 부모님을 흐뭇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특유의 사교적인 성격, 그리고 넘치는 재롱과 애교로 항상 부모님을 웃게 만들었다. 나름의 완벽함을 유지하느라 항상 긴장 속에 살았던 나와 달리, 동생은 자주 덜렁댔고 허술했지만 언제나 여유가 넘쳤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나보다 동생에 대한 언급과 칭찬이 많아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절망했다. 분명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더 잘 하고 있는 건 나인데, 부모님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동생이 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렵의 동생에 대한 미움이라는 감정은 생각보다 꽤 깊고,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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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집에 남아 있는, 십여년 전 동생의 일기장들


 

한 번은 우연히 동생의 일기장을 본 적이 있다. 항상 밝은 얼굴로 헤실헤실 돌아다니던 동생이었지만, 일기장에는 나름의 어둠이 가득했다. 상당수의 페이지들이 ‘나는 왜 누나처럼 공부를 잘 하지 못하고, 상을 많이 받지 못할까‘라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를 자책하는 내용들로 할애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의 나는, 동생의 이런 남모를 아픔을 헤아려주고 배려해 줄 정도로 사려가 깊지 못했다. 아직도 내 목표는 오로지 동생이 ’감히‘ 내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생각보다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에 기뻐했고, 부디 영원히 그러하기를 바랐던 못된 누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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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울 지역 각지에서 뛰어난 친구들이 모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공부를 잘 하는 아이’로서의 내 정체성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도, 도대체 왜 이러냐는 부모님의 실망어린 눈초리도, 갑자기 하루아침에 모범생에서 그저 그런 평범한 아이가 되어버린 나에 대한 주변의 시선도 아닌, 그저 ‘이제 내가 누나보다 공부 잘하네?’ 라는 동생의 단 한 마디였다.

 

 

'동생이 몇 살만 더 어렸더라면, 여자였더라면, 아니, 차라리 그냥 내가 외동이었더라면...'

 

 

위와 같이 간절히 바라던 시절이 있었다.

 

주변 어른들에게는 그저 1살차 연년생 남매의 그렇고 그런 평범한 싸움 정도로 보였겠지만, 당시의 나에게 동생이란 존재는 꽤나 큰 고민거리였다. 더욱이 이는 다른 인간관계들과는 달리 차마 쉽게 끊어낼 수 없는 것이어서 더더욱 나를 힘들게 했었다.

 

 

 

원수에서 동지로


 

그러나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동생은 중학교를 졸업했고,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동생도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내가 어른이 된 그 다음해 동생도 곧바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 아니 그 이상으로 큰 행운이고 자산이었다.


돌이켜보면 골칫거리로만 여겨왔던 동생은, 반대로 나와 다르기에 우리 집에서의 균형을 맞춰주는 존재였다. 엄마 아빠가 다툴 때 상황에 끼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던 나와 달리 동생은 항상 울면서 둘을 말리는 적극적인 중재자였고, 또 강력하게 내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을 중요시해 자주 부모님과 갈등을 빚던 나와는 달리,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또 다시 상황을 호전시키는 사람도 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항상 내 할 일이 우선이던 나와는 다르게 엄마와 아빠가 보내는 도움의 시그널을 절대 거절하지 못하고 먼저 나서서 하던 이 역시 결국 동생이었다.


내 동생은 항상 그런 아이였다. 가끔은 나에게서 호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고, 안타까운 상황은 절대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나 혼자 행복하기보다는 남들과 함께 행복하길 원하는, 그런 사람.

 

나와 너무나 다른 존재인지라 오랫동안 항상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결코 이해하지 못했었다. 뜨거웠던 어린 시절, 그리고 청소년기와 한 해 두 해 멀어져 가고 있는 이제서야 비로소 동생의 소중함을 알게 된 나였다.

 

 

 

이제는 둘도 없는 여행 메이트, 그리고 평생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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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떠난 남매 여행. 호주 멜버른 근교의 그레이트 오션로드에 있는 로드 아크 협곡에서

 

 

물론 둘 다 성인이 되고도 몇 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는 매일 아직 서로가 너무나 다른 존재임을 실감하곤 한다. 그러나 반대로 새롭게 발견하게 된 공통점도 있다. 바로 여행 스타일이다.

 

2년 전, 새로운 대륙에 가고 싶다는 내 무모한 일념 하나로 시작되고, 당시 N수생 생활이 채 끝나지 않은 동생의 비행기 표까지 내 마음대로 끊어버린 데서 본격적으로 그 시동을 건 2주간의 호주, 뉴질랜드 여행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우리의 인생 여행이 되어버렸다. 출발 전부터 누누이 들어왔던, 혹시라도 둘이 싸워서 각자 따로 귀국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부모님, 주변 친척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스스로의 우려는 직접 겪어보니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알고 보니 우리는 둘 다 철저한 계획 하에 발이 부르트도록 새로운 장소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각자가 원하는 여행 일정을 기꺼이 수용하고 조정할 수 있을 정도로 협업도 잘 되는 사이였으며, 또한 서로 성격이 다르기에 철저한 역할 분담이 가능했다.


온전히 둘이서만 붙어 지내는 2주 동안, 동생과 나는 한 번의 다툼도 없이 사이좋게 돌아왔으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11시간 동안의 비행 중에도 내내 우리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여행은 다음해 내 교환학생과 동생의 군 입대 전 마지막 휴식을 계기로 유럽 대륙으로의 여행으로까지 이어졌고, 여기서도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우리 남매만의 좋은 추억을 쌓고 돌아왔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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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호주 블루 마운틴에서, 나와 동생

 

 

현재 군 입대 1년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동생은 아직도 가끔 나에게 함께 갔던 지난 여행들을 회상하는 문자를 보내곤 한다. 그 누구도 아닌 동생과 나, 둘만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꼭 그 다음 여행을 기약하는 또 다른 내용의 메시지가 따라붙는다. 다시 한 번 호주로, 미국으로, 그리고 아프리카로.

 

오늘도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잠자리에 든 동생의 머릿속엔 앞으로의 남매 여행에 대한 너른 청사진이 끝없이 그려지고 있을 테다. 우리 남매가 ‘남매여행’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여행은 당연하게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함께, 조금 더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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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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