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광화문에서, [공간]

교보문고에 두고 온 시간들에 대해서
글 입력 2021.04.1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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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추억은 여러 요소에 기생한다.


내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익숙한 향기를 맡았을 때나 익숙한 노래를 들었을 때, 혹은 익숙한 음식을 먹었을 때, 나는 그것들과 관련된 기억들을 추억한다.


야자 시간에 많이 들었던 음악들은 나를 그 기억으로 데려가고, 해외여행에서 먹어봤던 과자는 나를 그 시간으로 데려간다. 장소도 마찬가지다. 내 추억이 묻은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그 시간들을 기억하게 된다.


그런 장소를 여럿 가지고 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역시나


광화문 교보문고라고 할 수 있겠다.

 

 

 

광화문에서, 읽었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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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보문고의 기억은 꽤 어렸던 날부터 시작된다. 그럴 때마다 가족 전부와 함께였다. 우리는 날 좋은 주말, 함께 교보문고를 자주 찾았다.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좋아하는 신발을 신고서.


교보문고에서는 입구에서부터 책 냄새가 난다. 새 책에서 나는 은은한 나무 향이, 어쩌면 깨끗하게 오래 보관된 책에서 나는 세월의 향이, 빳빳한 하얀 종이에서만 날 것 같은 기분 좋게 묵직한 향이 어우러진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내게 안정감을 줬다. 이 냄새를 좋아하는 이는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교보문고 향 디퓨저가 출시된 걸 보면 말이다.


그때의 교보문고에는 지금처럼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나에게 교보문고는 그야말로 방앗간이었다. 어렸던 나는 참새였고. 동생과 나는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곳이었지만 우리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은 항상 있었다. 옆에 책을 잔뜩 쌓아두고 편한 자세를 잡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엄마랑 사촌 언니는 우리가 자리를 잡고 나면 책 읽을 시간을 주셨다. 주로 카페에서 우리를 기다리셨던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주변의 것들을 완전히 차단했다. 소위 백색소음이라 불리는 잔잔한 소음들도 잘 들리지 않았다. 푹신한 의자와 내게 기대앉은 동생의 무게만이 내가 느끼는 전부였다. 그렇게 몇 권이고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책에 빠져 녹진한 기분이 들 때쯤이면 언니랑 엄마가 돌아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읽던 것만 마저 읽고 가겠노라 말하고 책에 다시 얼굴을 묻고 있으면 언니는 가끔 내 옆에 앉아서 기다려줬다.


나는 그곳에서 참 편안했던 것 같다. 서점이 아니라 꼭 내 방에서 책을 읽는 것처럼. 책을 읽는 동안 코끝에서 맴돌았던 은은한 교보문고의 향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 탓일까, 나는 아직도 교보문고를 갈 때마다 어린 나와 마주한다.

 

 


광화문에서, 먹었던 샌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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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샌드위치다. 우리 가족은 저녁때까지 교보문고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곤 했는데, 가끔은 그 전에 요기를 채우려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 샌드위치가 그렇게 맛있었다.


의외로 책을 읽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상황이 주는 특수함이 있었던 걸까. 평범한 샌드위치여도 교보문고에서 먹는 샌드위치는 맛이 달랐다. 마치 계곡에서 끓여 먹는 컵라면이, 캠핑 가서 구워 먹는 고기가 유난히 맛있는 것처럼 말이다.


네스카페의 치아바타 샌드위치였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교보문고에 입점해 있지 않다. 그래서 더 이상 그 맛을 다시 느낄 수가 없다. 다른 지점을 찾아가 그 샌드위치를 주문해 봤지만 묘하게 그 맛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교보문고의 샌드위치를 추억한다. 다시 맛볼 수는 없어도 떠올릴 수는 있으니까. 다시 책을 읽으러 가고 싶어서 서둘러 먹었던, 동생 혹은 사촌 언니랑 반쪽 씩 나눠 먹었던, 이젠 정말 추억으로 남아버린 그 샌드위치를.

 

 

 

광화문에서, 걸었던 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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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자랐을 때, 사촌 언니와 주말마다 자주 걸었다. 우리의 코스는 삼청동 거리를 걸어 광화문까지 가는 것이었다. 걷는 걸 아주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게 걷는 시간은 좋아했다. 햇빛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거기에 선선한 바람은 덤이었다. 특별한 대화가 없어도 괜찮은 시간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다는 것까지 완벽했다.


삼청동 거리는 정말 예쁘다. 구경할 것도 많고, 걷다가 가끔 사먹는 떡꼬치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소품샵에서 귀여운 양말이나 모자를 구경하기도 했다. 지금의 나도 여전히 행복을 뚜렷하게 정의할 수 없고, 그때의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 시간들이 행복했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조금은 지치게 된다. 맛있는 걸로 잔뜩 배를 채웠다고 해도, 긴 시간을 걷는 건 힘든 일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우린 광화문에 도착했다. 아, 이제 좀 힘든데, 생각이 들 때면 저 멀리 이순신 동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교보문고가 있었다.


그래. 그 산책길의 종착지는 언제나 광화문 교보문고였다. 더 이상 오랜 시간 머물며 책을 읽지는 않아도, 교보문고에는 여전히 볼거리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교보문고의 향은 여전했으니까. 시원하게 내려앉는 실내의 온도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펜들을 구경하는 건 조금은 지친 내게 다시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그 후에도 삶이 지칠 때면 교보문고를 찾았다. 산책길의 고단함을 달랬던 것처럼, 삶이 고단하다 느껴지면 항상 교보문고를 갔다. 익숙한 향이 날 반기는 그곳에서 신간을 뒤적이고, 가지고 싶었던 펜을 테스트해보고, 귀여운 공책 표지를 잔뜩 만나고 나면 또다시 걸을 준비가 되었다.

 

 

 

광화문에서, 들었던 노래


 

 

 

그보다 조금 더 자란 나는 이제 혼자서도 광화문 교보문고에 간다. 물론 지금도 지인들과 함께 교보문고를 가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항상 그렇진 않다는 말이다.


혼자서 길을 걸을 때면 꼭 음악을 듣는 편인 나는 교보문고에 혼자 방문할 때도 언제나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음악을 MP3 형식으로 핸드폰에 소장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계절이 지날 때마다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갈아치우곤 하는데, 신기하게도 교보문고에 갈 때마다 같은 노래를 듣고 있었다.


물론 언제나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자각했을 때는 전부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세레노의 ‘새벽 별과 소년의 노래’라는 뉴에이지 곡이다. 이 곡은 청아한 피아노 선율이 교보문고와 제법 잘 어울리는 노래다. 그래서 랜덤 재생을 설정해놓은 핸드폰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자동으로 교보문고가 떠오른다.


교보문고에는 밖에서 만났던 바쁘게 걸어가던 사람들도 그 안에서는 잠시 멈춰 섰으므로, 나 또한 잠시 멈춰도 되는 곳이었다. 잠시 멈춰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만지고 귀여운 엽서를 구경하면서 잠깐 놓쳤던 나를 다시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그 시간을 함께했던 노래라고 생각하면 이 노래에 조금 더 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노래를 위에 첨부했다. 한 번 들어보면 좋겠다.

 

 

 

광화문에서, 받았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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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에서는 서적을 비롯해 다양한 물건을 판매한다. 작은 음향기기를 팔기도 하고, 문구류와 음반 등도 판매한다. 물건이 많아서인가 교보문고에서 받았던 선물도 다양하다.


중학생 때, 헤드셋이 그렇게 가지고 싶었다. 이어폰이 아닌 헤드셋을 쓰고 다니는 게 그렇게 본새가 났더란다. 그 당시 무언가를 받아낼 수 있는 수단은 성적이 가장 강력했으므로, 다음 시험 성적을 잘 받아오면 헤드셋을 사주기로 엄마와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헤드셋은 시험을 보기도 전에 내 손에 들어왔다. 시험 때 쓸 문제집을 살 겸 교보문고에 들렀는데, 함께 갔던 사촌 언니가 깜짝 선물이라며 헤드셋을 사주신 것이다. 심지어 내가 책을 고르고 있을 때 몰래 사 온 거라 감동이 두 배였다. 너무 가지고 싶어 해서 사주는 것이라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내밀어진 헤드셋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잘 써오던 헤드셋은 최근 이어패드가 바스러져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깜짝 선물을 줬던 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교보문고의 추억을 함께 떠올리게 해주는 그 헤드셋을 선뜻 버릴 수는 없었다. 그 헤드셋은 지금도 내 방 책꽂이에 있다.


아빠에게 책 선물을 받은 곳도 교보문고였다. 하루는 동생과 아빠를 교보문고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신간도 잔뜩 구경하고, 예쁜 문구도 원 없이 구경했다. 두 시간가량 구경하고 나니 당이 떨어져서 카페에서 달콤한 음료로 당을 충전하기도 했다. 잘 놀았다 싶어 이제 그만 가자고 했더니, 아빠가 책을 한 권 사주고 싶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서점이다 보니 당신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책을 한 권씩 사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책 선물은 언제나 내 책꽂이 한편을 차지하고, 준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조금 더 신중하게 책을 골랐다. <봉제 인형 살인사건>을 보면서 아빠를 떠올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장르이다. 또 내 동생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를 고른 것을 보니 말이다.) 오래 고심하다 고른 책은 <아몬드>였다. 그 책 역시 내 책꽂이에서 항상 아빠에게 책을 선물 받은 그날을 기억하게 한다.


스스로에게 줬던 선물도 있다. 나는 책 욕심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다른 소장 욕구도 크지만, 특히 책에 대한 욕심이 엄청 많다. 그렇지만 내 방은 한정된 공간을 가지고 있으니, 예전처럼 마구잡이로 책을 사 모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책을 전부 정리하면서 이제는 30권도 되지 않는 책들만이 남은 지금, 책을 구매할 때는 정말 고심하게 된다. 정말 좋아하는 책일 것, 또 읽고 싶은 책일 것. 엄격하게 정한 두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책들만이 구매될 수 있다.


그 기준에 모두 부합하는 그 책을, 스스로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 재작년 겨울이었다. 친한 친구들과 교보문고에 방문했다가 겨울 한정판 <나미야 잡화점>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따뜻한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어 정말 좋아하는 책인데, 여태 본 것 중에 가장 예쁜 표지를 가진 친구를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이제 스스로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는데! 책에 대한 진심 70%, 알바비를 쓰고 싶은 마음 20%, 조금의 충동 10%가 합쳐진 나를 위한 선물은 생각보다 두껍다. 그 책은 교보문고에서 충동적이었던 나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내가 한 충동구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구매였다.

 

 

 

광화문에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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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던 날부터 제법 커버린 지금까지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를 갔다. 그 속에서 축적된 추억들은 그 시간만큼이나 방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른이 되어도 기억에 남을지 몰랐던 기억들까지도. 그래서 나는 교보문고에 갈 때마다 각기 다른 추억들을 꺼내 곱씹을 수 있다.

 

하나의 장소에서 여러 시간을 추억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크게 와 닿는다. 그 시간이 지난 만큼, 나도 자랐고 그 공간도 변했으니까. 이 글을 끝까지 읽어 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분명 여러분들에게 큰 의미가 될 테니까.


앞으로 나는 계속 교보문고에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또 다른 추억으로 내게 남게 되겠지. 언젠가 멋진 어른이 된다면 내 집에 교보문고 디퓨저를 놓자고 다짐할 정도로 좋아하는 장소이니만큼, 그런 추억을 계속 쌓아갈 장소로 적합한 것 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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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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