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홀로 속초 북스테이를 떠났다 ② [여행]

사실은 사람이 그리웠나봐
글 입력 2021.04.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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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여행 이야기이며,

독서가 중심인 내용은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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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시작은 혼자 있는 시간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였다. 사람에 지쳐 SNS를 멀리하기로 다짐해놓고 영화 SNS만큼은 포기하지 못하는 모순적인 나날을 보내던 참이었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어딜 그리 떠나고 싶었나”라는 리뷰를 적다가 어떤 의지가 생긴 것인지, 그저 그러고 싶었던 것인지 갑작스럽게 여행을 결심했다.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기에 주변인에게 같이 가자고 권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홀로 정한 여행 테마는 북스테이. 여행지 숙소에서 책과 함께 휴식을 취하는 여행이다. 장소를 물색하니 관광객들을 통해 알음알음 북스테이로 알려진 속초 게스트하우스가 제격이었다.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바라며 주섬주섬 책 몇 권을 챙겼고 단출한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여행에 큰 감흥 없이 살아왔던 터라 모든 것을 속전속결로 해치웠다. 3박 4일간의 여정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여행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낯선 사람들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이들과 우연히 대화를 나누며 순식간에 끈끈한 우정이 피어났다. 그들의 주도하에 예정에 없던 일정이 추가됐다. 관광 명소 가기. 평소였으면 머리가 지끈했을 테지만 그때는 달랐다. 그들과 뭘 해도 유쾌했다. 고독과 여유를 즐기러 온 원래의 목적은 잠시 잊고 못이기는 척 의견을 따랐다.


'아이참, 책 읽으러 온 건데'

 

 


일출이 만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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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하우스에서 첫 밤을 보내고, 새벽을 헤치며 동명항으로 향했다. 동명(東明)은 '동쪽에 해가 떠 밝아온다'라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일출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드넓게 펼쳐진 동해와 항구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일년 내내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조금 설레는 마음을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잠에서 덜 깬 채 몽롱했던 정신이 매서운 칼바람을 맞고 또렷해졌다. 발을 절로 동동 구르게 만드는 추위였다. 동명항 근처에 도착하니 부두에 정박한 배들이 눈길을 끌었다.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 삼아 놓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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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항 앞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암반 지역인 영금정(靈琴亭)은 해돋이 정자로 유명하다. 영금정은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곳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였다.

 

멀리서 해돋이 정자와 연결된 동명해교가 보여 탄성을 질렀다. 찬 바람에 움츠렸던 몸을 활짝 피고, 있는 힘껏 구름다리로 뛰었다. 그 입구에 서서 깊은 동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몸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잠시 두려웠다. 이내 천천히 영금정 현판이 걸린 정자 쪽으로 걸었다. 시원한 바람에 전해지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를 오롯이 느꼈다. 가슴까지 파도가 밀려들어 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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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일출을 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꽤 넓은 공간이었는데도 인파로 비좁아서 새해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우리는 두리번거리며 바다가 잘 보이는 위치를 탐색했다. 결국 구석 자리 한 편에서 탁 트인 시야로 담청색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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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지어 날아가는 새들과 바다를 가르는 어선이 아침을 열었다. 흐르는 콧물 따위 이미 관심 밖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자 몸에도 온기가 돌았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와”하고 환호했다. 해가 하늘에 걸려 붉은 기운을 내뿜었다. 덕분에 바다 표면이 환하게 빛났다.

 

옆에 있던 언니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고 알려줬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 앞에 펼쳐진 절경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셋이 함께여서였을까, 아니면 그곳의 사람들이 내지른 감탄사 때문일까. 그 겨울 바다는 여전히 녹화된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종이 지도는 처음이라



둘째 날은 거의 둘이서 활동했다. 우리를 연결했던 대장(디자이너) 언니가 이른 시간부터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침을 함께 먹고 헤어질 준비를 하니 섭섭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언제 혼자 왔나 싶었다.

 

“또 봐요”

 

나중에 보자, 시간 날 때 보자, 다음에 보자 등 평소에 흔히 하는 말과 조금 다른 결이었다. 우리는 꼭 다시 만나길 바랐다. 이 특별한 인연이 여행이 끝나도 이어지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망과 달리 지금까지 다시 그들과 재회한 적은 없지만, 그때 그곳에서 우리는 꽤 즐거웠기에 서로의 마음에 그 순간이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희소식이 하나 있었다. 교사 임용시험 발표를 기다리던 언니가 '합격' 통지를 받은 것. 결과를 확인하며 미세하게 손을 떨던 교사 언니가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손뼉을 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고시원 생활을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언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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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일정은 교사 언니와 함께했다. 영금정 다음 코스는 영랑호였다. 필자는 책을 읽기 좋은 카페 리스트만 찾아왔지만, 그는 남달랐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속초 명소를 담고 있는 종이 지도를 내밀더니 오늘은 스마트폰 도움 없이 다녀 보자고 제안했다. 반쯤 찢어져 너덜너덜한 지도를 보고 기가 막혔다. 우리가 고산자 김정호 선생님도 아닌데 멀쩡한 애플리케이션(이하 앱) 놔두고 뭐 하는 거냐며 핀잔을 주려다가 말았다. 그의 표정이 너무 신나 보여서 흥미가 생겼다.

 

둘 다 난생처음 가보는 길이라 걱정이 앞섰지만, 생각보다 우리의 여정은 순탄했다. 모르는 길은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고, 골목골목 길을 잃기도 하다 보니 글쎄 지도에도 없는 지름길을 찾아냈다. 철저히 스마트폰 지도 앱에 의존해왔기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수단의 문제가 아닌 용기의 문제였다. 이렇게 발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걸어도 어떻게든 길이 보인다는 점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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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영랑호의 웅장한 자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영랑호는 신라의 화랑 영랑이 이 호수를 발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삼국유사에 근거하여 전해진다. 화랑이 자신의 본분을 잊을 만큼 오래 머무를 정도로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송강 정철을 비롯해 구사맹·이상질·이세구 등 문인들이 시의 소재로 삼기도 했다고. 과연 그럴만 했다. 에메랄드빛 자연호수와 산책로를 빼곡히 감싼 나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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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호에 왔다면 범바위를 지나칠 수 없다. 둘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지막한 산이 보이는데, 그 정상에 속초 8경 중 하나인 범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마치 범이 웅크린 형상을 한 듯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등산 초입에는 범바위 옆 정자를 일컫는 '영랑정' 팻말이 꽂혀 있었다. 오르는 건 금방이었지만 거대한 바위에 압도되어 여운은 오래 남았다. “안 왔으면 후회했지?” 질문을 건네는 언니에게 동의한다는 의미로 크게 한 번 웃었다.

 

이후에도 종이 지도는 꽤 유용하게 쓰였다. 처음에 엉뚱하고 귀엽게 느껴졌던 탐험 놀이에 어느새 진지하게 참여하게 됐다. 속초 전통 시장을 방문할 때도, 다시 버스터미널로 돌아올 때도 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짚으며 동서남북을 가늠했다. 앱을 쓸 때는 몸만 돌려도 방향이 표시되는데, 종이 지도로 길을 찾으려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편리와 효율성을 극대화한 도구들을 사용하다 아날로그의 맛을 보니 색다른 경험이었다. 앱이 알려주는 최적길로 최단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개척한 길에서 새로운 사람과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마스다 무네아키 『지적자본론』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효율은 확실히 편리하고, 편리는 대부분의 경우 쾌적함을 이끌어 낸다. 단, 쾌적함과 행복은 등가가 아니다.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숲 속의 산책로를 지나가야 한다면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곳을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은 결코 효율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 어쩌면 효율과 행복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스다 무네아키, 『지적자본론』, 이정환, 민음사, 2015, 141P

 

 

저녁이 되자 교대 언니는 종이 지도를 선물로 주고 떠났다(커피도 사줬다). 숙소로 돌아오니 종이 지도는 제 몫을 다하고 완전히 찢어졌다.

 

 

 

마지막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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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북스테이라며, 독서는 언제해? 의문스러울 수 있다. 고백하건대 책을 성실하게 읽고 오진 않았다. 물론 숙소 자체가 북스테이를 표방했고 실제로 서점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유명 관광지가 목적이 아닌, 오직 독서를 위한 여행이라는 테마를 잡았기에 의식적으로 잠들기 전이나 이동 중 틈틈이 책을 읽기도 했다.

 

하지만 첫날 일행이 생긴 순간부터 책을 벗 삼아 안정을 취하려고 했던 목적을 잊었다. 의도치 않게 속초의 관광지를 휩쓸고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심지어 게스트하우스 운영진분들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볼 만한 곳들을 추천해 주셨다(그중에 지금의 칠성조선소가 있었고 당시 가오픈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북스테이는 얌전히 방에서 책을 읽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강박을 깨주셨다. 원래 세웠던 청사진은 나홀로 사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였는데, 3박 4일간의 여행 중 여럿이 함께했던 첫날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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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나홀로 보낸 시간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는 기억이지만, 책이 가득한 공간에 머물며 독서에 관한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조용한 공간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를 음미했던 마지막 밤은 분명히 행복했다. 다음날 짐을 싸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책, 사람과의 정서적 교감을 곱씹었다. 여행 전 공허했던 마음이 가득 채워진 느낌이었다.

 

언젠가 마음 놓고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돌아오면, 어느 계절이든 좋으니 독서 휴가를 훌쩍 떠나보길 권한다. 그 여행에서 얻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좋으니 말이다.


 

[김세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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