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잃어버린 복조리를 찾아서 [사람]

내 행운은 어디로 갔을까
글 입력 2021.04.0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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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여기도 문 닫았어?”

벌써 세 번째 허탕이었다. 여기저기 밥 먹을 곳을 찾아다니느라 어느새 점심때가 거의 지나있었다.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늘 어딘가 찾아가려 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가게들이 갑자기 임대문의를 붙이고, 휴가를 가고, 개인사정으로 쉬고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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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타임이나 휴무일에 방문해 허탕 치는 것은 이제 예삿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아, 너랑 어디 가려하면 꼭 이러더라.’하며 웃던 친구들도 이제는 정말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원래도 운이 없는 편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걸까.

그래, 뭔가 이상했다. 집에 돌아와 한참을 고민하다 그 이유를 알았다. 내 불운은 ‘그때’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지지리도 운이 없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때는 십년도 전으로 돌아간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처음으로 멀리 떠난 소풍에 꽤 신나있었다. 그래서였다. 그날 만든 복조리를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은. 집에 걸어 놓으면 복을 가져다준다는 복조리. 어린 나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지만 이미 떠나버린 버스가 다시 돌아올 리도 없을뿐더러 버스에 복조리가 있을 거라는 확신도 희미했다.
 
그렇게 공들여 만든 복조리는 써보지도 못하고 나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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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 행운은 아직도 거기에 갇혀있는 게 아닐까? 잃어버린 복조리에 갇혀있다 지쳐 다른 이에게 가버린 건 아닐까?



제 1장. 인생사 새옹지마


스스로가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님을 어렴풋이 자각한 때부터 나에겐 나쁜 버릇이 생겼다.
 
운의 총량을 제한하고 가늠하는 것인데, 자그만 행운이라도 있으면 잇따라 불운이 올 것임을 예상하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웬일로 대기 없이 버스를 타면 예상치 못한 행운에 조금 불안해졌다가도 자리가 없는 것을 보고 안심하는 식이다.

내게 예고치 않은 행운이란 대가를 요한다. 내가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이 생기면 또 좋은 일이 생기더라.
 
그렇다고 행운이 달갑지 않은 건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니다. 특히 새해가 되면 나도 모르게 소소한 행복을 빌며 제이레빗의 ‘Happy Things'를 듣곤 한다.
 
 
예상대로 일이 술술 풀려갈 때
이제부터 뭐든 내 멋대로 맘 먹을 때
아주 맛있는 걸 먹었을 때
세상에나, 힘도 안 줬는데 쾌변!

오, 보너스 휴가 떠날 때
사랑하는 그대도 함께
모두 상상만 해도 정말 기분 좋아
잊지 말고 Happy Happy Things!
 
 

 
 
총량을 한정지어 미리 불안해할 필요는 없지만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들에 나는 신호등이 내 차례에 바뀌기만 해도 한숨을 내쉬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왕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면 좀 큰 행복이었으면 한다! 신호등 제때 바뀌는 것 말고.



제 2장. 나는 내가 떨어질 것을 알고 있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은 기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아예 기대를 놓진 못 했다)
 
기대했다 실망하느니 차라리 낙심했다 기뻐하는 것이 낫다 생각한 것인지, 지원서를 쓰든 시험을 보든 일단 ‘떨어진 것 같아’하는 것이다. 그러다 정말 떨어지면 그럴 줄 알았다. 하는 거고, 붙으면 더 기쁜 거고.(아이러니하게도 떨어졌을 때 오는 상실감은 기대를 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더라)

이상하게도 내가 자신을 갖던 일이나 간절히 염원하던 것은 꼭 잘 이뤄지지 않더란 말이다. 그래서 ‘떨어진 것 같아’는 일종의 주문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꼭 붙었으면 좋겠다는.
 
헛된 기대를 버리려 한 후로는 스스로를 더 믿게 되었다. 내가 들인 노력, 시간만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과가 좋지 않을 때다. 모든 게 오로지 나의 탓이 되는 것이다. 실패를 거듭하며 그것이 온전히 나의 역량부족임을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떨어진 것 같아’는 실패했을 때,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애초에 안 될 것 같은 일이었다며 스스로에게 건네는 일종의 위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반면 성공했을 때, 이 결과는 온전히 노력의 성과가 된다. 때문에 만약 수상소감을 하게 된다면 겸손하게 ‘운이 좋았죠.’하기보다는 ‘정말 노력했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와서 기쁩니다.’하고 싶다.



제 3장. 넘어졌는데 안 다쳤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내가 굉장히 불운하고 부정적인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내가 정말 불운한지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아무도 안 걸리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지만 잔디밭이라서 다치지 않았다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불운하다고 해야 할까?

사실 행운과 불운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상투적으로 얘기하자면,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음식점 세 곳을 돌아 결국 도착한 곳이 너무 훌륭할 때, ‘이런 곳을 찾다니. 운이 좋았다.’할 수도 있고, ‘세 곳이나 갔는데 모두 문 닫다니, 운도 없다.’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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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감상에는 개인의 성향보다도 처한 상황이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반잔의 물이 담긴 컵을 보며 긍정적인 사람들은 반이나 남았다 하고, 부정적인 사람들은 반밖에 안 남았다 한다는데, 그것보다도 멀리서 걸어왔다거나, 그날 점심을 짜게 먹어서 물이 적어보였다고 하는 게 더 신빙성 있지 않은가.

지금 내가 스스로 불운하다 느낀다면 내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다. 넘어져서 다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프고 힘들다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나는 운이 나쁜 게 아니라 좀 힘든 상황에 처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제 4장. 잃어버린 복조리를 찾아서


그렇다면 이미 잃어버린 복조리는 대체 어떻게 찾아와야 하는 걸까? 애초에 행운을 가져다주는 복조리라는 건 정말 있긴 한 걸까?

과거를 뉘우치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무책임하게 ‘언젠간 되겠지’하고 싶어진다. 물론 침대에 누워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안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복조리란 것도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잃어버린 복조리 타령을 하는 까닭은 이렇다.

일이 이렇게 안 풀리는데, 이게 전부 내가 모자란 탓이라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잃어버린 가상의 복조리 탓이라도 해야 마음이 좀 더 편하겠다. (저번 오피니언에 썼던 오늘의 운세와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노력하되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는 않고 싶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언젠간 복조리가 돌아오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아이유의 Someday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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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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