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육체를! [미술]

글 입력 2021.04.0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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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않는 존재를 오랫동안 관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관찰에서는 대개 피 관찰자의 감정이 소거된다. 봄비에 젖은 잎사귀 위에 맺힌 이슬이 몇 개인지 세어보는 일은 아주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무던하게 시선을 받아내는 이파리처럼, 이차원의 세계는 포식자의 시선에 언제나 순종적이다. 그러나 대상이 생동하는 피조물로 바뀔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상 혹은 공연예술 관람을 제외하고 일상에서 누군가를 집요하게 감상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혹은 공공장소에서 나는 일부러 시선을 흐트러트린다. 배회하던 애매한 시선은 대부분 공중 위 어딘가에 불안정하게 안착한다. 그러니까 기실 망막에 상이 맺히는 순간은 별로 의미가 없을 때가 많다. 혼자서 돌아다니는 예의 바른 이들의 숙명 같은 것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도 핸드폰에 고개를 파묻는 게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싶다.


 

bill viola anima.jpg

빌 비올라, 아니마, 2000, 컬러 비디오 삼면화, 3개의 LCD 플랫패널, 41.3x190.5x5.1 cm, 82분

 

 

그래서 빌 비올라(Bill Viola)의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당황스러웠다. 대표작 <아니마>의 세 패널을 감상한 후 다른 작품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척추를 스쳤다. 다시 <아니마>로 고개를 돌리니 패널 속 인물들의 고개가 왼쪽 밑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속으로 짧은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우습게도 갑자기 해리포터를 떠올렸다. 마법 세계에서는 액자 속 인물이 움직인다는 걸 처음 목격했을 때, 해리가 느낀 경악의 감정이 갑자기 심장께로 밀려왔다. 물론 비올라는 마법사가 아니고 시립미술관도 호그와트 따위의 마법 세계가 아니다. 어찌나 천천히 재생되던지 비디오라는 걸 순진하게도 잊어버린 탓에 잠깐 그런 상념에 빠졌다. 인간의 찰나를 코앞에서, 그토록 오래도록 쳐다본 경험이 거의 전무한 이들에게 비올라의 작품은 마법처럼 황홀하다. 그러나 이것을 ‘찰나’라고 부를 수 있나? 이 기다랗게 늘여지고 느려진 순간을?

 

움직이는 인간을 무례할 정도로 지긋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영화관 특유의 관람 각도와 전자기기의 두꺼운 스크린 같은 익숙함을 부수고 나와, 관람자와 동등한 위치와 크기로 재현된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 장인의 솜씨로 섬세하게 재현된 회화 같은 생물들. 신기함도 잠시 곧바로 나는 대상의 곳곳을 뜯어보는 일에 도취했다. 내 눈길이 해부자(解剖者)의 시선에 가깝다고 자각했을 때는 살갗에 생경한 소름이 끼쳤다.


 

[크기변환]bill viola.jpg

 

 

빌 비올라는 삶과 죽음, 인간 감정, 무의식, 종교, 물질과 정신 등 추상 세계에 속하는 것들을 화면 속 시각언어로 구현하여 보여준다. 짧은 영상에 슬로우 모션, 되감기 기법, 클로즈업 등을 적용하여 주제의식을 표현하면서, 그의 비디오 및 미디어 아트는 육체가 지각할 수 없는 것들을 지각하게 하는 통로로 기능한다. 비올라의 가장 유명한, 대표적인 기법은 바로 슬로우 모션(slow motion)이다. 짧은 기록은 보통 10분 내외의 길이로 불어난다. 위에 언급한 대표작 <아니마>는 원래 1분 길이의 영상으로, 이를 82분에 걸쳐 천천히 재생시킨 것이다.

 

늘이고 또 거꾸로 되감으면서 비올라는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순식간에 예술가는 전능한 존재로 격상하여 시간을 지배한다. 손에 쥘 수 없을 것 같던 존재가 물질성을 획득한 채 인간의 손안으로 떨어진다. 비올라가 조작하고 변형한 시간은 관람자에게 독특한 기회를 부여한다. 우리는 전능자 혹은 초능력자가 능력을 발휘하는 신비로운 현장에 동참하게 된다.

 

백색소음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시간을 촘촘히 쪼개어 의식한다. 근육의 팽창과 수축, 피부의 떨림, 움직이는 섬유, 물과 불의 낙하와 상승,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무한하고 느린 반복. 연속적인 시간의 연기(延期) 속에서 감상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 모두를 캐치하게 된다. 동시에, 늘어난 시간만큼 감상자의 감정 또한 증폭되고 사방으로 번져간다. 찰나의 것들은 결국 영속성에 가깝게 보존되고 또 재현된다. 감상자는 고고학자가 되어,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경이로운 찰나를 발굴한다.

 

 

 

 

비올라의 또 다른 작품 특징으로는 이원적 구조를 통한 철학적 탐구정신을 꼽을 수 있다. 작품 <밤의 기도>에서는 병치된 두 개의 화면 속 서로 다른 두 장면이 합쳐지며 하나의 플롯을 완성한다. 왼쪽 화면에서는 한 여성이 촛불을 점화하고 있다. 영상이 점진적으로 줌 아웃될 수록 보이는 촛불의 개수가 늘어난다. 어두운 방 안에서 고요히 불을 붙이는 여성의 모습에선 경건함까지 느껴진다. 점화가 주로 기다림과 소망을 담은 종교의식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상기해본다. 고독하게 행위를 이어 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에서 갈망이 읽힌다.

 

오른쪽 화면에는 어떤 빛에 이끌려 걸어오는 인물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는 흰 점처럼 보이던 물체는, 영상이 재생되면서 흰옷을 입고 걸어오는 한 남성임이 밝혀진다. 앞(관람자의 위치)에 자리한 창백한 빛은 초자연적 존재가 강림이라도 하는 것처럼 중앙의 몸을 성스럽게 비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발광체는 괴이한 아우라를 남성에게 선사한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가 화면을 채운다. 망설임 없이 직진하는 발걸음은 빛의 지점이 남자의 지향점이자 목표임을 알려준다. 영상이 클라이맥스에 치달으면서 광휘의 존재가 서서히 밝혀지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흥미롭다.

 

남자 앞에 자리한 것은 타오르는 불로, 영상 후반부에 접어들 때부터 화면 아래쪽에서 불티가 날리기 시작한다. 주저 없는 인물의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불꽃은 점점 강렬해진다. 여인이 점화한 촛불의 불티가 날려 남자의 화면에 불이 붙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상자는 이제 빛의 기능을 담당하는 ‘불’이, 분리된 두 화면의 매개물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불은 화면 가득히 자리한 어둠을 뚫고 인물 개인의 열망을 비추는 듯하다. 어둠이 죽음과, 빛이 삶과 대응한다는 것을 미루어 보면, 빛을 향한 인물들의 여정은 죽음을 초월하는 삶의 가치를 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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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비올라, 밤의 기도, 2005, 2009, 컬러 비디오 이면화, 리어 프로젝션, 2.01x5.28 m, 9분 20초

 

 

결국 <밤의 기도>에는 두 가지의 이원적 요소가 자리한다. 화면 안에서는 배경의 어둠과 타오르는 속성의 빛이 이원적 구조를 구성한다. 움직임을 통해 동적으로 갈망을 드러내는 남성과 내면을 탐색하는 듯한 정적인 분위기의 여성은 전체 화면에서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기원을 담은 행위와 어둠에 대한 극복 의지는 두 화면을 하나로 잇는다. 불꽃을 뚫고 걸어 나오는 남자와 점화를 마친 후 다가오는 여인의 검은 형체로 페이드 아웃되는 결말은, 그 합일을 시각적으로 빚어낸다.

 

비올라는 합쳐진 모든 극점을 초월하는 영역을 제시한다. 어둠과 빛, 여성과 남성, 죽음과 삶, 그 모든 극단을 넘어서는 세계를 좇는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이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연인 간의 사랑을 은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극점의 목록에 유한과 무한 또한 추가된다. 죽었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유한의 세계와 무한의 세계로 이분화되지 않는 어딘가에서 가치는 서식하고 있을 것이다.

 

*

 

비올라는 그만의 방식으로 현실을 해체하고 또 요리한다. 그에게 일상이란 곧 인간이다. 인간이 가지는 근본적 사유, 본능적 열망, 존재론적 고민과 같은 관념들은 비올라의 손을 거쳐 물질의 세계 속에서 육화한다. 그의 예술에는 언제나 유려한 움직임이 있다. 일그러진 시간과 공간을 유영하면서, 어지러운 철학적 주제들이 놀랍도록 패널 위로 쉬이 흘러내리는 것을 목도한다. 꿈결 같은 정신적 공간에서 우리는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생의 단편으로 익사한다. 꼭 마치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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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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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장현
    • .....예술?
    • 0 0
  •  
    • 이런 글은 어떻게 쓰나요....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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