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의 히어로, 피넛 버터 팔콘

글 입력 2021.04.0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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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증후군을 앓아 가족에게 버려진 잭과 그를 맡은 요양원에서 일하는 엘리너, 그리고 한순간의 실수로 가장 아끼던 형을 잃은 타일러. 사회가 규정한 이상적인 인간의 기준에 못 미치는 그들이 영화 내내 그려가는 여정은 호화롭게 반짝이지도 않고 울퉁불퉁하지만, 그 서투른 진심은 자연을 닮았다.


물결처럼 잔잔히 흘러가다가, 불시에 들이닥친 폭우나 돌풍에 하염없이 흔들리기도 하고, 숨죽여 있다가 모든 것이 멈춘 후엔 다시 햇빛을 향해 고개를 드는 풀숲의 풀처럼 고집스럽게 그들은 나름의 용기로 꿈을 이루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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탯줄이 아닌 우연으로 맺어진 가족


 

잔인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레슬러의 세계에서 처음 휘두르는 폭력은 주먹이나 발길질이 아닌 말이다. 분위기를 압도하고 흐름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몸을 지배하는 정신을 먼저 죽이기 위한 선제공격이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그 순간에 잭은 자신보다 훨씬 몸집이 거대한 상대방에게 선포한다.

 

 

당신은 나의 생일파티에 올 수 없어.

 


요양원을 탈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룸메이트 칼 할아버지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때도, 자신을 버린 핏줄 대신에 자신과 함께인 타일러와 엘리너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일 때도 잭은 그 애정을 생일파티에 초대하는 것으로 보답한다. 그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인 생일파티는 그 누구도 함부로 초대받을 수 없는 가장 사적이고 소중한 자리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곳에 초대된 손님은 피를 나눈 이들이 아니었다.


잭이 타일러와 동행하게 되었을 때, 타일러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자신의 병을 소개한다. 그걸 내뱉는 순간의 표정과 몸짓이 더 이상 좌절의 모양새를 갖추지 않아서, 그것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세상의 좋은 것, 싫은 것 제대로 알기도 전에 요양원에 갇혀 버린 잭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자신의 병과 그것이 본인을 낮추게 만드는 수단이라는 사실이 그동안의 잭이 꿈을 좇는 동안 받았던 멸시와 상처를 보여주었다.


타일러는 잠시 멈칫하지만, 그 따위 사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신경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조롱과 모욕의 먹잇감이 그저 눈에 난 다래끼, 얼굴의 뾰루지 정도로 치부되는 순간이다. 그저 잭이 가진 질병일 뿐이니 그것은 우리의 동행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무신경함은 아마 잭에게는 따스한 위로만큼 듬직한 격려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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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증후군과 방화범. 서사는 제하고 편견이 입혀진 그들끼리는 언제나 거의 맨몸이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멍청한 선입견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꼬질꼬질한 옷차림과 자연인처럼 쏘다니는 그들의 삶을 누가 초라하다고 말할 수 있나.


충동과 도전을 알려주는 타일러와 안정과 포용으로 품어주는 엘리너가 만났을 때, 그들은 이성과 감성을 맡아 자주 부딪혔다. 잭의 보호자로서, 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엘리너에게 타일러와 잭의 여행은 기막힌 기행이었다. 적어도 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는 있도록 현명하게 대처하려던 엘리너가 결국 그들의 여정에 함께하게 된 것은 냉철한 이성을 녹인 따뜻한 감성의 무모함 탓이었을 것이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힘


 

영화 안에서 관객이 좇아가는 여정은 잭의 것이다. 가장 작고 연약한 청년이 정말 맨몸으로 요양원을 뛰쳐나와 세상에 부딪히는 터무니없는 모험을 세상의 부조리에 꺾이며 살아 온 엘리너와 타일러가 돕는다. 제대로 된 운동도 안 해본 아이의 프로 레슬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세상 물정 다 아는 어른 둘이 나선 것이다.


그들의 존재는 현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뭉침은 판타지에 가깝다. 그 정도로 너그럽고, 꿈에 눈이 먼 사람들은 현실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비현실적인 설정을 납득시키는 힘은 잭에게서 나온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로 현실에 찌든 사람들의 눈도 멀게 하는 힘, 꿈이란 그런 것이다. 온전한 성공이 보장되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일단 응원하고 싶어지는 무책임한 희망이 계속해서 우리를 영화 속 타일러와 엘리너로 몰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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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넛 버터 팔콘, 즉 잭은 모두의 판타지였다. 어른들은 레슬러가 되겠다는 잭의 꿈이 곧게 뻗지 못할 것을 알고 있지만, 어리석고 무모하지만 지켜주고 싶은 자신들의 동심을 닮아서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에게 득이 되지 않아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잭을 도왔던 이유에는 어리고 치기 어린 청년의 꿈을 짓밟지 못하는 그들의 천성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그의 꿈이 실현됐을 때 함께 피어날 저들의 희망을 위하는 마음도 있었을 테다.


이미 굳은살이 박힌 자신들의 어릴 적 소망까지 잭의 꿈에 털어 넣은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잭보다도 더 그의 꿈에 진심이 되었다. 작은 사각형의 싸움터에 올라선 잭이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잭이 드디어 첫발을 뗀다는 기대에 부풀어 열띤 응원을 내뱉는 어른들이 있었다. 가장 작고 연약한 청년이 누구보다 빛나길 바라게 만드는 힘, 그것은 가장 열띤 꿈을 가진 자만이 끌어당길 수 있는 리더쉽이다.

 

 


나의 히어로, 피넛 버터 팔콘


 

이 영화는 영웅 영화다. 그러나 일반적인 영웅 서사와는 다르다. 피넛 버터 팔콘의 이야기는 끈기와 열정, 용기로 똘똘 뭉친 주인공이 조력자를 만나 마구 치고 올라서다 큰 시련을 만나 고전하고, 끝내는 승리를 쟁취해 정상에 올라서는 완벽한 기승전결에서 벗어나 있다.


그저 이어지는 대로, 되는대로 흘러가는 이 영화가 끝에 닿은 결말은 결과주의와 어엿한 성공을 염원하는 입장에서는 다소 밍밍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싱거운 결론은 입안을 맴돌며 오랫동안 상쾌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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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넛 버터 팔콘이 깨지고 넘어져도, 일반적인 레슬러의 모습을 갖추지 않아도 이 영화를 봤다면 누구도 그를 무시할 수 없다. 다소 부담스럽게 내놓은 맨몸도, 어디 사는지도 잘 모르는 제 영웅을 찾겠다고 우기는 모습도, 그가 영화의 끝에서 얻게 된 결론조차도 그가 세상에 대고 외치는 자신의 열정임을 알게 된 순간 모두 근사하게 보여질 것이다.


잭과 그의 가족이 영화에서 내려준 결말은 내가 애써 갈고 닦은 어여쁜 꿈의 결말이 조금 모자라도, 그저 그렇게 끝이 나버려도 괜찮다고 말한다. 맺은 결실이 부실하고 어설프더라도 그것대로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악착같이 성공해 정상에 선 사람들이 건네는 “너도 할 수 있어”라는 위로보다, 당장 눈앞의 시련을 멋없게 헤쳐나가는 잭의 여정을 보며 나는 더욱 큰 울림을 받았다.


요양원 창문에 달린 쇠창살을 뚫기 위해 속옷 한 장 달랑 입고 온몸에 로션을 덕지덕지 바른 채 세상에 나온 잭. 그는 엄청난 초능력도, 무지막지한 무기도 없다. 그가 고대하던 프로 레슬러로 세상 꼭대기에 자신의 깃발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회가 규정한 비교적 멀쩡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자신의 꿈을 그들에게까지 선사하는 그가 나에게는 누구보다 강인한 히어로다.

 

 

[오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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