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바람만 불면 지워지는 그림이라도 - 더스트맨

글 입력 2021.04.0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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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공기 중에 먼지가 눈에 잘 안 보이는데, 빛줄기 옆에서 관찰하면 먼지가 반짝거리는 게 보여요. 잘 안 보이는 존재라도 각자 이야기가 있어요. 이 그림처럼.


<더스트맨> 中

 

 

흔히 먼지는 보잘것없이 작고 하찮은 존재를 지칭할 때 쓰이는 소재이다. 최근 미세먼지가 사회적 화두가 되면서 먼지는 이전보다 더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된다. 마스크를 쓰면서 피하고 싶은, 하늘을 무겁고 탁하게 만드는, 나를 귀찮게 하는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먼지를 새롭게 바라본 영화가 있다.


영화 <더스트맨>은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이미 단편 영화들로 실력을 인정받은 김나경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이자,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심달기 배우가 주요 배역을 맡은 첫 장편영화이다. 누군가의 처음이라는 사실이 주는 설렘을 안고, 영화관에서 새로운 작품이 관객을 만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개봉하는 좋은 영화라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여운이 지속되었다.


'더스트맨'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는 새로운 한국형 히어로물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나도 영화관에서 작품을 만나기 전, 미리 확인한 예고편을 보고도 제목의 선정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사실 영화의 제목은 '모아'와 '태산'이 처음 먼지가 쌓인 공간 위에 그림을 그리다 함께 완성한 귀여운 망토를 입고 있는 캐릭터를 부르는 이름이다.

 

김나경 감독은 마음속에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남자 혹은 사람들에게 하찮게 여겨지는 먼지 위에 아름다운 더스트 아트를 남기는 남자 '태산'을 의미하는 제목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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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아트



이 영화를 한 줄로 표현하면 '아픈 과거를 가슴 깊이 묻어두고 떠도는 삶을 선택한 남자 '태산'이 더스트 아트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극복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인물에는 '태산'과 미술을 전공하는 '모아', '태산'과 함께 생활하는 '도준'과 '김 씨 삼촌'이 있지만, 영화는 주로 '태산'의 움직임과 모습에 맞춰져 있다. 아픔을 가진 사람이 특별한 경험을 통해 변화하는 것은 어쩌면 낯설지 않은 이야기 진행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더스트맨>이 가진 차별점은 '더스트 아트'를 소재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더스트맨> 포스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기도하는 손> 그림은 실제로 김나경 감독이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데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더스트 아트는 쌓여있는 먼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로, 실제로 더스트 아트를 하는 분들이 외국에는 많이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는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보통 붓이나 다양한 도구를 활용하여 멋진 그림이 완성된다고 한다.

 

김나경 감독이 감명받은 <기도하는 손>의 원작자, 현재 '프로보이닉'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러시아 더스트 아티스트는 실제 영화 <더스트맨>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고 알려진다. 아름다운 더스트 아트는 프로보이닉의 작품 외에도 우지현, 심달기 배우가 직접 그린 작품들로 생생하게 영화에 담겼다. 일상 속에서 익숙하게 본 먼지가 아름다운 예술로 표현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더스트맨>을 통해 내가 가진 먼지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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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 소재



영화에 등장하는 삭막한 서울 풍경과 차가운 바닥에서 매일 밤을 보내는 홈리스의 생활은 관객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더스트맨>에서는 집이 아닌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주된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의 주요인물 중 '모아'를 제외한 '태산' '도준' '김 씨 삼촌'은 모두 서울역 혹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공간에서 매일 밤을 보낸다. 그들의 생활은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김나경 감독은 실제 현실보다는 긍정적으로 그리더라도, 홈리스를 대상으로 진행된 활동에 직접 참여하고 사회활동가에게 시나리오 피드백을 받으며, 현실을 왜곡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소재에 접근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영화의 첫 장면부터 홈리스 생활을 섬세한 눈길로 보여준다. 미세먼지 수치가 높은 날에 마스크를 쓴 길거리의 많은 행인과 달리 '태산'과 '김 씨 삼촌'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서울역에 존재한다. '김 씨 삼촌'이 '태산'을 특별히 아끼는 마음은 두꺼운 박스를 선물한 것으로 표현된다.


캐릭터의 대사를 통해서도 홈리스를 바라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전달된다. '모아'가 '태산'의 생활에 관해 묻는 질문에 그는 '틴들 현상'을 이야기하며 답변한다. 이 장면은 빛에 반짝이는 먼지처럼 모든 사람이 빛을 받으면 빛날 수 있는 존재이고,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처럼 <더스트맨>은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서 숨 쉬며 함께 살아가지만, 관심을 갖고 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존재들의 소중함을 편견 없는 눈길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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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배우들의 만남



<더스트맨>을 본 후 영화가 전달하는 내용과 영상으로 감상한 아름다운 그림들에 매료가 되었지만, 사실 이 영화는 환상적인 라인업의 배우들이 참여한 작품이다. '태산' 역의 우지현 배우, '모아' 역의 심달기 배우, '도준' 역의 강길우 배우. 세 사람이 한 영화에 출연한 작품이 앞으로 탄생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각자 놀라운 기량을 가진 배우들의 연기 합을 스크린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말수가 적고, 표현이 많지 않은 '태산'은 눈빛으로 연기하는 우지현 배우를 통해 화면 속에 나타났다. '태산'은 과거의 일로 아픔이 있고 자신의 삶에 주어진 고통을 죄책감으로 변명 없이 고스란히 감내하는 인물이다. 주된 감정선이 낮은 곳에 있는 '태산'이지만 우지현 배우는 그의 삶에도 희로애락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모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웃기도 하고, 더스트 아트로 언어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영화가 대체로 '태산'의 눈길을 따라 진행되는 만큼 내용 전달에 있어 우지현 배우의 연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칫 눅눅한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장면에 등장해서 금세 활기를 불어넣는 '모아'는 심달기 배우 특유의 생동감 있는 표현으로 완성되었다. <더스트맨>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모아'는 지금까지 작품에서 본 심달기 배우의 모습과는 결을 달리하는 인물이다. 그가 보여주는 맑고, 밝고, 명랑한 대학생의 모습은 영화를 보면서 함께 웃을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작품에서 '모아'는 굉장히 이타적인 인물이라고 느꼈는데 심달기 배우는 '모아'에게서 이기심을 보았다고 한다. '태산'을 밝게 비추는 빛과 같이 그려진 '모아'가 어떤 마음으로 움직였는지 각자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태산'을 형으로 따르며 함께 길에서 생활하는 '도준'은 감정이 풍부하지만, 장애가 있어서 연기로 표현해내기 조심스럽고 어려운 캐릭터이다. 강길우 배우는 '도준'의 음성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도록 충실히 준비했다고 한다. 혹여나 지적장애를 희화화하거나 자신의 발음이 영화의 감정선을 흩트리지는 않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스크린으로 확인한 그는 정말 '도준' 그 자체였다. 강길우 배우가 연기한 '도준'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인물이었다. '태산'에게 귀여운 동생임과 동시에 누구보다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줄 아는 멋진 인물을 그는 언제나처럼 놀랍게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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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프닝에서 등장하는 뿌연 하늘처럼 '태산'의 마음에는 먼지가 차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먼지 쌓인 초록색 차는 '태산'이 가장 직시해야 하는 마음속 상처이고 그를 답답하게 하는 먼지이다. 그런 그가 먼지를 활용한 더스트 아트를 통해 아픔을 치유한다는 건 특별한 의미를 준다. 먼지는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켜켜이 쌓인 것 같지만, 사실 바람이 불면 한순간 날아가 버리는 존재이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먼지는 없다. 더스트 아트는 결국 지워진다. '태산'이 가진 과거의 아픔도, '모아'의 작품에 관한 고민도, '도준'의 힘겨운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김 씨 삼촌'이 '태산'에게 '끝이 없는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바람이 불면 사라질 더스트 아트처럼 유한한 우리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유한하다면 그 삶이 의미가 없는 것인가. <더스트맨>은 찰나처럼 느껴지는 유한함을 통해 '현재'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먼지 위에 그림이 머물러 있는 동안 가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아름답다.

 

 

Blue days, all of them gone

Nothing but blue skies, from now

우울한 날들은 모두 지났어

이제 푸른 하늘만 있을 거야

 

Blue Skies(2020) - Birdy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하나의 노래가 떠올랐다. 'Blue Skies'는 오래된 재즈곡으로 나는 Ella Fitzgerald의 음성으로 처음 접한 흥겨운 음악이다. 하지만 내가 떠올린 곡은 같은 가사지만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Birdy의 버전이다. 이 노래는 '태산'이 항상 꿈꾸는 장면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날, '태산'에게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위로처럼 들려주고 싶은 곡이다. 노래의 가사처럼 오래 홀로 아픔을 견디던 '태산'이 이제는 우울한 시간을 떠나보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남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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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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