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꺼이 솜씨 좋은 거짓말쟁이를 기다리겠다. - 아무도 없는 곳

글 입력 2021.04.04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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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아무도 없는 곳>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후에 글을 읽는 것을 권장해 드립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믿는 이유


 

주인공 창석의 엄마이자 치매를 앓고 있는 미영, 남자친구와 아이를 잃은 편집자 유진, 암에 걸린 아내를 간호하는 중인 성하, 사고로 기억을 잃은 바텐더 주은. <아무도 없는 곳>은 소설가 창석과 이 네 사람의 만남을 옴니버스식으로 담아낸 영화다.

 

주인공이 소설가이지만, 영화는 첫 번째 미영과 만남에서부터 ‘만들어진 이야기를 왜 읽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왜 이야기를 믿는지에 대한 답을, 창석이 만난 네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기억과 이야기, 둘 중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가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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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책 읽는 사람들이 제일 이해가 안 가더라.

어차피 만들어진 이야기인데 왜 믿어."

 

 

미영은 소설을 읽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어차피 허구인데 왜 믿느냐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눈앞의 아들을 보며 죽은 자신의 남편이라고 믿는 미영의 모습은 ‘어쩌면 이야기뿐 아니라 우리의 기억 역시 만들어진 허구인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신의 기억을 ‘사실’이라 믿지만, 실은 맥락에 맞춰 편집된 그럴듯한 기억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험도 다른 맥락에 배치되는 순간 가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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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배님 소설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안 들던데.

누가 봐도 선배님 이야기니까요."

 

 

반면 유진은 소설가인 창석이 지어낸 이야기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창석 본인이 겪은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김종관 감독은 극 중에 등장하는 인도네시아 담배와 토끼에 관한 이야기가 감독 본인이 실제로 겪은 일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실제 겪은 일이지만, 영화에 들어가는 순간 거짓말이 되었다고. 창석이 지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무리 창석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였어도, 다른 맥락에 배치되는 순간 허구가 되어 어디까지를 사실로, 어디까지를 거짓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믿을 만한 것’ 말고 ‘믿고 싶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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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실은... 정말 신기한 일이 있어요."

 

 

성하는 아픈 아내가 죽는 날 자신도 함께 죽기 위해서 청산가리를 가지고 다닌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스님이 성하에게 약을 건네며 아내에게 이 약을 발라보라고 말한다. 그 어이없는 말을, 성하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믿는다, 믿게 된다.

 

약을 바른 아내가 의식을 찾자 성하는 기적이라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돌아가면 아내가 편안한 얼굴로 반기고 있을 것-이라는 스님의 말에 성하는 들떠 있다. 그러나 창석과의 대화 중 병원으로부터 아내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한순간에 기적은 거짓이 된다.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스님의 예언은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스님은 아내가 편안한 얼굴로 반긴다고 했지, 건강하게 살아있을 것이라 한 적은 없다. 성하가 병원의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 창석이 청산가리를 챙긴 것은, 어쩌면 스님의 말을 듣고 성하의 아내가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창석이 성하로부터 자살 수단을 숨기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짜여도 믿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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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사는 거에요.

어차피 들은 걸 믿을 수밖에 없는 기억."

 

 

바텐더인 주은은 술 한잔에 바꿔 손님들의 기억을 산다고 한다. 사고로 자신의 기억을 대부분 잃어서 그 빈자리를 채워 넣을 기억이 필요하다고. 그러면서 주은은 그가 손님들에게 듣고 사는 기억이 “어차피 들은 걸 믿을 수밖에 없는 기억”이라고 말한다.

 

기억을 ‘믿음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부터, 주은은 손님들이 들려주는 기억이 절대적인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손님에게서 기억을 사는 주은은, 서점에서 소설책을 사는 이와 별 다를 바 없는 듯하다. 둘 다 자신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줄 이야기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필요하다


 

네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 이야기와 우리가 실제로 겪는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이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무엇이 경험과 기억인지, 무엇이 사실의 영역이고 무엇이 믿음의 영역인지도 쉽게 구분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꼭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성하처럼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이 필요해지곤 한다. 무언가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믿고 싶었던 적이, 그리고 믿게 된 적이,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나는 두 번째 수능을 망치고 우울해하던 때에 어느 선생님이 내게 해준 -요령 피우지 않고 정직하게 열심히 사니까 꼭 잘 될 거야- 라는 뜬구름 잡는 말을 4년이 넘게 놓지 못한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로 그를 믿게 되어버려서, 그 말을 떠올리며 자주 두려움을 느끼고, 가끔 희망을 느낀다.

 

얼마 전에는 붙고 싶지 않은 면접을 보고 오는 길에 친구가 내게  -너무 배울 기회에 집착하지 않아도 괜찮아. 기회는 다시 찾아오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을 것 같으면 붙잡지 않아도 괜찮아- 라는 말을 해줬다. 그게 사실일지 아닐지 알 수 없으면서도 나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서 그 후로 기회처럼 보이는 것들에 초연해지고 꼭 필요한 일에만 정력을 쏟는 사람이 되었느냐면 그건 아니지만, 매번 눈길을 주고 손을 뻗으면서도 '이걸 놓쳐도 세상이 두 쪽 나지는 않는다'라는 것 정도는 상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말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은의 빈 기억을 채워줄 이야기처럼, 나의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줄 수 있다면 사실 여부 따위는 크게 상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난 기꺼이, 앞으로도 또 다른 솜씨 좋은 거짓말쟁이들을 기다리겠다.


 

 

조예음.jpg

 

 

[조예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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