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린이를 재현하는 방법 - 미쓰백 [영화]

글 입력 2021.04.0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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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쓰백의 주인공 ‘백상아’는 아무도 믿지 않고 고독하게 살아간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산다. 어느 날 백상아는 폭력과 학대 흔적이 역력한 이웃집 아이 김지은이 자꾸 눈에 밟힌다. 백상아(미쓰백)는 김지은에게서 외롭고 힘들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겹쳐보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세상에 맞서 자신이 김지은을 구출해내겠다고 마음먹는다.

 

2018년 개봉한 이 영화는 한지민의 연기와 여성 주연 서사로 입소문을 탔다. 나는 뒤늦게 이 영화를 봤는데, 보고 나서 남은 건 주인공 백상아가 아니라 김지은이었다. 학대에 시달리는 아홉 살 김지은은 영화에서 성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무력하고 나약한 어린이로 나온다. 굉장히 순하기도 하다.

 

김지은은 백상아가 시종일관 자기를 귀찮아하고 퉁명스럽게 대하는데도 그녀를 좋아한다. 나는 영화에 등장하는 이 불쌍하고 착한 아홉 살 아이의 모습이 찜찜했다. 어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일 뿐,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착하기만 할까? 성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표하면 아이는 거기에 상응하는 애정을 돌려주는 관계가 영화처럼 쉽게 이뤄질까? 실화를 기반으로 아동학대의 심각성을 고발했다는 점에서 미쓰백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영화가 학대 아동을 보여주는 방식은 공익 광고랑 비슷하다. 아동의 비참한 상황과 무력하고 착한 모습을 강조해 관객의 동정심과 경각심을 극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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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고 상처받은 어른인 백상아와 그런 백상아를 치유해주는 어린 김지은의 관계는 어른-아이 구도의 익숙한 서사를 반복한다. 고독하고 멋진 어른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온몸으로 지켜줌으로써 자신의 상처와 외로움을 남몰래 위로받는다. <레옹>, <아저씨>, <도희야> 등 영화에서 이런 어른-아이의 일대일 구원 서사는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런 서사에서 아이는 많은 경우 아이가 자신과 특별한 감정적 관계를 맺길 바라는 어른의 욕망이 투사되는 대상으로 재현된다. 영화 미쓰백에서도 이렇게 낭만화된 구원 서사의 한계가 느껴진다.

 

김지은의 역할은 영화 미쓰백에서 주인공의 상처를 위로하고, 성장하게 하고,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서 멈춘다. 영화 속에서 백상아가 없는 김지은이 어떤 아이가 될지 상상하기 어렵다. 주어진 정보가 너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면서도 김지은의 대사는 조연 수준으로 적다. 백상아가 없는 장면에서 김지은 가혹한 폭력을 당하고, 누가 도와주길 . 백상아 김지은은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타고, 노을을 보며 백상아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생부에게 맞고 베란다에 갇힌 김지은이 물 한모금 먹지 못할 때 머릿속에서 애타게 찾는 건 ‘미쓰백’(자신을 구하러 와줄 어른)이다.

 

김지은은 굶주린 상태에서 먹음직스런 햄버거를 앞에 두고도 백상아가 째려보자마자 손에서 내려놓는다. 며칠을 굶은 사람이라면 남의 눈을 쳐다볼 새도 없이 자기 허기를 채우는 게 먼저 아닐까? 허기를 채우는 것보다 백상아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김지은에겐 더 중요한 걸까? 학대받은 아동은 당연히 주눅들고, 쭈볏거리고, 두려워한다.

 

하지만 나는 모든 어린이의 내면에 어른은 들어갈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폭력이 무너뜨릴 수 없는 영역. 어른의 몫은 그 내면을 사로잡는 게 아니라, 침해당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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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김지은의 생부 중곤이 자신 역시 폭력 피해자였다고 말했듯이, 폭력은 되물림된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영화 속 김지은처럼 학대 상황에 놓인 상태에서 마냥 순하거나 예의 바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김지은이 순하지 않은 아이였더라도 백상아는 김지은을 구하려 온 몸으로 애썼을까? 김지은 같지 않은 아이들,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도와주기 쉽지 않은 아이들, 마냥 착하지만은 않은 아이들.

 

영화 미쓰백은 그렇게 자기 성격과 의지대로 어른과 갈등하는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모범적인 어린이의 모습으로 피해자를 재현했다. 관객이 이입하는 대상이 백상아인 만큼, 백상아와 갈등하는 김지은의 관계는 충분히 감동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기 때문일까.

 

나는 이렇게 평면적인 어린이의 재현이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게 더는 반갑지 않다. 어린이들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개성적이고, 그렇기에 쉽게 다뤄지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많은 대중매체에서 어린이는 어른이 기대하는 대로, 욕망하는 대로, (어린이 다운 모습은 놀이공원으로, 착한 모습은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재현되고 관객들은 그 모습을 어린이다운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이런 재현이 많으면 많을수록 현실의 어린이도 당연히 이런 모습이기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착하지 않고, 시끄럽고, 폭력적이고, 말을 듣지 않는,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아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해야 할지는 알 수 없다. 아이가 어른에 맞서 독립적으로 자기 욕망과 성격을 드러내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아이가 어른이 바라는 대로 행동할 이유는 없는 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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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아동학대를 고발하겠다는 의도에서 불쌍하고 착한 피해자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피해자가 겪는 적나라한 폭력의 장면으로 관객의 동정심을 극대화하려 한 게 매우 아쉽다. 피해자를 구하고 보살필 도덕적 당위가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데 달려 있다면, 관객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피해자는 그만한 지지를 받을 수 없지 않나. 폭력의 문제가 신파적인 감정보다는 책임과 권리의 언어로서 관객에게 호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지은에게는 자신만의 내면을 간직한 채 필요한 도움과 사랑을 얻을 권리가 있다. 외로운 백상아에게는 자신을 겹쳐 보고 자신이 보호해 줄 김지은이 필요하지만, 김지은에게 백상아는 필요하지 않다. 김지은에게는 백상아보다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질 수 있다. 아이와 어른의 일대일 구원 서사에는 사실 아이가 특별하게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어른의 내밀한 욕망이 엿보이지 않는가.

 

각박한 지금의 현실에서 김지은과 같은 아이는 아직 있을 테고, 연출의 섬세함보다는 아동 학대의 심각성을 알리는 것이 더 시급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불쌍하거나 착하지 않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더 만나고 싶다.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고, 복잡한 아이들의 삶이 매체에 등장할수록, 우리는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더 잘 배울 수 있다. 아이에게서 어른이 원하는 모습을 겹쳐보기 보다는, 고유한 존재로서 아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작품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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