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짧았던 순천기행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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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행 기차에 올라탄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사실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푸른 하늘과 드넓은 갈대밭에 마음을 뺏긴 뒤 홀로 몇 번이나 순천을 되뇌었던가. 그리고 우연히 여행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순천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행의 첫날, 돌연히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를 쏟아내는 하늘과 마주쳤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구름을 애써 외면하며 기차에 올라탔다.
금방 사그라지기를 간절히 바랬건만. 애석하게도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빗방울은 한층 무거워졌다. 어느새 역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부랴부랴 짐을 정리하고 몸을 움직였다. 서둘러 발을 내디딘 역은 생각보다 컸고, 생각보다 우중충했다. 비바람에 본연의 색채를 빼앗긴 것이리라.
거센 적에게 당하고만 무채색의 플랫폼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환영 인사를 건넸다. 씁쓸하게 화답하며 역을 빠져나갔다.
미리 준비해온 우산을 쓰고 바삐 역 앞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철새와 광활한 갈대밭이 펼쳐진 곳, 순천만 습지에 가기 위해서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확인한 전광판을 확인했다. 20분 후에 버스가 온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다소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젊음의 생동감이 가득한 나의 생활권과는 달리 이곳은 중장년층이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이다. 희끗희끗한 머리, 혹은 금방 염색을 한 듯 새까만 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의 찬거리, 손자의 옹알이가 주요 관심사였던 그들 사이에서 나는 누가 보아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호기심 혹은 무관심이 혼재하는 눈빛은 몇 대의 버스가 오가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역에서도 느끼지 못한 이방인이라는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그래 여행은 이런 것이었지. 정말로 순천에 왔구나. 습지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해 차량에 올라타면서도 이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으며 전해지지 않을 무언의 인사를 보내니 곧 버스는 앞으로 나아갔다.
버스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방금 본 다른 장면들을 곱씹었다. 이를테면 버스에 오르는 두세 칸의 계단을 위해 손잡이를 꼭 잡아야 하는 가냘픈 다리나, 승객이 무사히 앉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출발하는 기사님. 그리고 앞 버스를 재촉하지 않는 뒤 버스 따위의 것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는 승객을 배려해 그들이 합의한 '느린 질서'를 포착한 순간이었다. 내가 사는 곳이었다면 마땅히 울렸어야 할 경적의 부재에 허전함을 느끼면서도, 노년을 보낸다면 이런 곳이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가 버스의 유일한 승객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이런 날씨에 누가 비 막을 곳 하나 없는 뻥 뚫린 갈대밭에 오겠는가. 오히려 사람이 없으니 편하게 구경할 수 있어 다행인 건지도.
이윽고 버스는 습지에 도착했다. 다행히 빗발은 전보다 사그라졌지만 여전히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남은 일정이 있기 때문에 편의점에 들러 우비를 샀다. 1박 2일이라는 짧은 일정 때문에 옷을 넉넉히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꼼꼼하게 우비의 단추를 채우고 가방을 단단하게 멘 뒤 습지로 입장했다.
궂은 날씨 때문에 어쩌면 텅텅 비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들어간 습지에는 의외로 곳곳마다 듬성듬성한 인파가 자리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이려나. 그래도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은 없네. 열심히 걷다 보니 곧 눈앞에 갈대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대와는 다른 흐린 하늘 아래, 기대했던 만큼의 광활함을 뽐내는 갈대밭이 쫙 펼쳐져 있었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갈대밭이 보일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순천에 왔구나. 진심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건물 하나 없이 무한히 펼쳐진 하늘과 드넓은 갈대밭이 주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나를 압도했다. 어느새 궂은 날씨도 잊고 그저 사방을 둘러보기 바쁠 뿐이었다.
이후 전망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 전망대는 산 위의 정상에 있기 때문에 오르기 위해서는 거의 등산을 해야 한다. 챙겨온 물과 튼튼한 다리에 의지해 경사진 길을 올랐다. 숨이 차 두세 번을 멈춰 서길 반복할 무렵 눈앞에 전망대가 나타났다.
맑은 날이면 멀리 있는 산과 바다가 보인다고 하던데, 흐린 날씨 탓에 안개가 잔뜩 끼어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더 심해진 빗발에다 바람까지 부는 탓에 결국 급히 산에서 내려가야 했다.
서둘러 산을 내려와 출구로 향했다. 아까 걸었던 갈대밭을 지나가야 하는데, 정말로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비바람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바로 전까지도 넋을 놓고 보기 바빴던 광활한 대지는 이제 바람 한 번 막기 힘든 애석한 곳이 되었다. 잔잔했던 갈대들은 쏟아지는 바람에 풍선인형마냥 격렬하게 춤을 췄다. 나 역시 허수아비처럼 펄럭이는 옷과 우산을 붙잡으며 바쁘게 걸어 습지를 빠져나왔다.
결국, 오후 2시밖에 안 됐지만 야외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예정에도 없던 영화관으로 향했다. 여행지에 와서 그냥 숙소로 돌아가는 건 아쉬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재밌는 영화도 발견해 보람찬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맑은 날씨였던 다음날에도 세워둔 일정을 변경해야 했다. 장시간 버스를 탔더니 멀미가 난 것이다. 원래 가려던 곳은 차로 한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내가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웠던 관광지를 물색해 근처 정류장에 내렸다.
순천에 오기 전 스치듯이 봤었던 죽도봉 공원이 새로운 행선지가 되었다.
목적지를 변경하니 남은 시간이 굉장히 여유로워졌다. 덕분에 천천히 산책하며 순천 시내를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었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세워진 아기자기한 조형물을 구경하고, 애매한 위치 때문에 포기했던 조훈모 과자점에 들러 빵을 샀다. 죽도봉 공원에 심어진 수많은 대나무 소리를 들으며 도심 속 자연을 즐겼다.
여기에서 이번 여행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를 만났다. 바로 숨겨진 동백꽃길이다. 사실 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좁은, 공원 옆 정자 맞은편에 있던 조그만 계단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가는 지나칠 정도로 구석 한 곳에 자리한 좁은 계단길이지만 한 번 들어가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신비로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높이 우거진 진한 청록색의 나무와 동백꽃의 붉은빛이 어우러져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 드는 장소였다.
영화 <이웃집 토토로>에서 보았던 숲 속 토토로의 집처럼, 숨겨진 비밀 장소를 발견하는 기분이 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만난 장소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런 길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돌아갔다면 정말 후회할 뻔했다.
한참이나 셔터를 누른 뒤에 동천으로 향했다. 동천은 순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넓은 하천인데 양쪽에 넓은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 꽃나무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만끽하며 걷고 또 걸었다. 길을 걷다 보니 행인들의 대다수가 중장년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 버스정류장에서도 느꼈지만, 순천 인구의 평균 연령은 높은 편이다. 안온한 그들의 표정에 나도 동화되어 걸음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 나중에 노년을 보낸다면 역시 순천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이렇게 한참 시내를 구경하고 기차를 탔다. 무채색의 첫인상을 뒤집고 말겠다는 듯이 따뜻한 색감으로 무장한 노을이 애틋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며 생각했다. 역시 여행의 묘미는 예상치 못한 발견에 있다고 말이다. 버스 정류장과 동천에서 본 순천 시민들의 모습, 그들을 배려해 느린 속도로 굴러가는 버스들을 보며 순천이라는 곳에 더욱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의 나는 계획에 살고 계획에 죽는 사람이었다. 세워둔 계획에 따라 흘러가는 여행에서 오는 만족감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일정이 틀어지는 순간 스트레스를 느끼고는 했다. 하지만 즉흥적인 선택에 따라오는 신선한 재미를 알아갈수록, 내가 즐길 수 있는 영역이 더욱 늘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이번 여행 역시 그랬다. 일정이 변경된 덕분에 우연히 예쁜 동백꽃과 마주했고, 그 도시와 사람들의 생활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정말 가보고 싶던 순천의 여러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어 행복했던 1박 2일이었다.
[최예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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