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킬링 넘버'에 열광하는 이유 [공연]

멜로디와 함께 미장센이 펼쳐지는 환상의 순간
글 입력 2021.03.25 21:3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연극과 비교하여 뮤지컬만이 갖는 차별성이 있다면 무엇일까. 첫째는 음악, 둘째는 플롯(plot)이다. 연극과 뮤지컬 모두 공연예술에 속하지만, 뮤지컬은 극의 상황을 대변하는 넘버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넘버가 모여 플롯을 구성하는 중심 뼈대가 된다. 즉, 뮤지컬에서는 음악이 극의 전체 분위기와 줄거리를 좌우하는 능력을 지닌다. 뮤지컬 제작에 있어 작곡가나 음악감독이 갖는 지위가 상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율이 있는 음악은 듣는 이의 마음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힘이 있어서, 뮤지컬은 연극보다 배우의 감정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또한, 뮤지컬 음악은 시간의 흐름을 함축하기도 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One Day More’를 떠올려보자. 음악이 시작되면 극의 주·조연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을 노래한다. 음악에 담긴 이들의 감정은 서로 어울리기도, 어긋나기도 하면서 빼곡한 서사의 당위성을 확보한다. 각기 다른 인물의 소리가 모여 화음을 이루면, 결국 관객은 혁명을 앞둔 이들의 결의와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감정의 조화를 이룬다.


음악으로 감정을 전달한다는 것은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 한 연극계 종사자께서 개인적으로 뮤지컬을 싫어했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니 ‘연극적 완성도가 부족해서’였다. 그는 얄팍한 서사와 캐릭터를 음악으로 어찌어찌 메꾸어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은 제작진의 능력 부족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아쉽다는 말을 보탰다.


나는 그 의견에 살짝 동감했다. 연극 위에 음악을 얹는다고 해서 뮤지컬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뮤지컬 작법을 적절히 활용한 스토리 구성부터 작곡, 작사, 연출까지 각 분야의 능력자들이 손발을 맞추어야 좋은 뮤지컬이 탄생할 수 있다. 예컨대 삶을 비관하며 죽음을 결심한 인물이 하나의 넘버를 지나 인생의 희망을 찾고 새 출발을 꿈꾸려면, 그 넘버에는 시간의 흐름, 조력자의 등장, 내면적 태도의 변화 등을 나타내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이 세밀한 장치를 만드는 것이 뮤지컬 제작진의 역할이자 숙명이다.



hypatia-h_1fe2510975f6c68e03d5ff4a690f3709-h_7f4eb64de2d1cc79c292c1e0d6ee2a42.jpg

 

 

뮤지컬계에는 ‘킬링 넘버’라는 말이 있다.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오래도록 사랑받는 넘버를 뜻하는 표현이다. ‘The Phantom Of The Opera’, ‘레베카’, ‘지금 이 순간’ 등, 주로 굵직한 서사를 특색있는 멜로디로 노래하는 넘버들로 대표된다. 이는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일종의 관념으로 굳어지기도 하며, 특정 배우의 킬링 넘버를 관람하러 공연장을 찾는 관객이 있을 정도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물론 때로는 스토리의 부족함을 메꾸는 넘버의 능력이 빛나는 뮤지컬도 있지만, 음악과 스토리의 탄탄한 구성이 작품성을 돋보이게 하는 경우도 많다. 대중이 사랑하는 킬링 넘버 중에서도 어느 정도의 연극적 완성도를 보장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는 음악만 들어도 극의 서사가 뇌리에 스치며 인물이 처한 상황이 그려지는 넘버를 의미한다. 이는 상술했듯 뮤지컬 제작진의 피, 땀, 눈물이 모여 이룬 결정체이기도 하다.

 

이렇게 두리뭉실하게 설명하면 와닿지 않을 것 같으니, 한 번 예시를 들어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b972cb821c0ede45fb89bc655a42c99b.jpg

 

 

음악 속에 이야기를 잘 녹인 킬링 넘버를 꼽자면 이것을 먼저 고르고 싶다. 뮤지컬 <위키드>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프로덕션 넘버이자, 1막 엔딩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Defying Gravity’다. 이는 ‘중력을 거슬러’ 사람들의 차별과 냉대를 이기고 일어나 나의 존재를 확립하겠다는 주인공 엘파바의 결심이 돋보이는 장면이며, 엘파바와 글린다가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미래를 축복하는 가슴 아린 장면이다.


나는 ‘Defying Gravity’를 처음에 유튜브 영상로 접했을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보았는데 이는 나의 감수성이 차고 넘쳐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인물의 감정이 극도로 농축되어 터질 때의 쾌감이 마치 나의 결핍을 대신 채워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어떤 마법사도 나를 끌어내지 못한다며, 밝은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하늘로 비상하는 엘파바의 몸부림은 나뿐만이 아닌 대부분 관객의 마음에 강렬히 각인되었을 것이다.

 

 

0400111506_60664_M.wmv.jpg

 


두 번째로 소개할 킬링 넘버는 ‘겟세마네’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록 오페라의 형식으로 제작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주인공인 지저스가 신을 향해 울부짖으며 부르는 넘버다. 나는 모태신앙이라 어릴 적부터 예수님 이야기는 줄곧 들어왔지만, 예수님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떤 고뇌를 취하셨을지에 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뮤지컬 속에서 신을 향해 자신을 찢고 쳐서 죽이라며 소리 지르는 지저스의 모습은 무엇보다 인상 깊게 다가왔다.


‘겟세마네’에서는 신의 아들이자 인간의 육체를 지닌 지저스의 절규가 훌륭하게 표현된다. 록은 극심히 억눌렸던 감정을 음악적으로 터뜨리기에 알맞은 장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저스라는 인물의 감정 변화도 구체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관객은 고음을 넘나드는 멜로디에 빠져듦과 동시에 지저스가 마음을 추스르며 점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


나는 영화관에서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 꼭 영화 포스터를 챙긴다. 그리고 집에 가져와 벽에 붙여놓는다. 포스터를 볼 때마다 영화 속에 인상 깊었던 장면이 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기억을 쉽게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기억은 감정을 동반하기에, 포스터에 그려진 미장센은 내가 그 영화로 인해 가진 좋은 감정을 오롯이 보관하는 보물상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뮤지컬에서의 ‘킬링 넘버’도 영화 포스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영화에서는 이미지를 보관하기 위해 포스터와 같은 매개를 사용하지만, 뮤지컬은 킬링 넘버에 담긴 선율에 감정과 기억을 보관할 수 있다. 관객은 극장에서 느낀 감동을 잊지 않기 위해 유튜브나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를 찾고, 또는 CD를 꺼내 넘버를 재생하며 다시 무대 속 세계로 빠져든다.


롤라와 함께한 킹키부츠의 전율을 느끼려면 ‘Raise You Up’을, 댄버스 부인의 서늘한 광기를 체험하려면 ‘레베카’를,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가졌던 신념을 확인하려면 ‘이룰 수 없는 꿈’을 재생하면 된다. 그러면 어느샌가 내가 있는 곳은 극장이 되어있고, 멜로디와 함께 뇌리에 스며들었던 미장센이 다시 펼쳐지는 환상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킬링 넘버에 열광하는 이유, 나아가 뮤지컬을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보며 글을 마친다.

 

 

 

이남기.jpg

 

 

[이남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65844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1.09.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부일로205번길 54 824호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1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