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징그러운 글쓰기 [사람]

그리고 그 밖의 글쓰기에 대한 얕은 고찰
글 입력 2021.03.2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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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징그러운 글쓰기


 

문학동네에서 연재되는 이슬아X남궁인의 릴레이 서간문. 그곳의 글 중에서 이슬아 작가님이 쓰신 표현 중에 마음에 쏙 와닿는 표현을 발견했다.

 

 
징그러운 나와 징그러운 내 문장을 견디며 계속 쓰다 보면 멋진 글과 징그러운 글이 섞인 책이 완성된다.
 

 

글이 징그럽다니,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부연설명을 들으면 제법 그럴듯한 재치있는 표현이다. 글쓰기, 특히 그중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 하는 에세이에서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교묘하게 포장해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이야기를 다듬고, 가공하여 그럴듯하게 표현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슬아 작가님의 말처럼 자기변호와 자기 복제와 자아 대잔치를 초월하는 글은, 에세이를 쓰는 모두가 원하는 것이겠지만 대부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렇지만 이 징그러운 순간들을 견디고 계속 써야지만 여기저기 자아 대잔치로 난리를 피우고 있는 나의 글들이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글쓰기란 징그러운 일이다.’이 문장이 내게 그렇게 깊이 와닿은 이유는 당시 나도 그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누군가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길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나는 낯가림이 심하고 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게 부끄러웠던 사람이었다. 겉보기에는 활발한 성격 때문에 눈치채는 사람들이 많이 없지만, 진지한 이야기로 분위기가 침체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내재 되어있어서 깊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망설여지는 순간이 많았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친구들이 아니면, 꼭 친구들 등쌀에 휩쓸려 처음 회장 선거에 나가는 아이처럼 쭈뼛쭈뼛하고 산만하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곤 했다. 그 말들은 “회장이 되면… 음, 너희를 위해 내가 열심히 일 할거고! 아, 다 됐고 내일 당장 아이스크림 쏜다!”라는 식의 맥락도 없고 장난스러운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었기에 뱉고 나서는 후회하는 것들이 많았다. 말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말은 잘 못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독서·미술 치료와 독서지도사를 하셨던 어머니 덕에 어렸을 적부터 글쓰기로 나를 표현하는 것에는 익숙한 편이었다. 위와 같은 성격적 특성까지 결부되어 나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변화가 시작될 때,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할 때,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을 때. 날 것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나 말고도 다른 누군가에게도 내가 느낀 것들을 표현하고 싶고 전해주고 싶었다. 내가 경험한 근사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들을 이 세상 누구 하나라도 알고 함께 느끼고 기뻐했으면 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은 그동안의 뱉어내기 식의 글과는 달랐다. 경솔한 나와는 다르게, 쉽게 휘발되지 않으며 정제된 마음으로 펜을 들고 싶었다. 말보다는 오래 생각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는 글쓰기에서의 나라도 내 마음에 들었으면 했다. 어떤 마음으로 써야 하는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평소 누군가의 고뇌가 담긴 창작물을 ‘흐린 등불 아래에서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 꾹꾹 눌러 쓴 편지’라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의 글이 그것과 조금이라도 닮아있었으면 했다. 그 표현의 이유는 흐린 등불 아래에서는 들뜬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하고 정제된 문장을 쓸 수 있을 것 같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도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해서 쓴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단이 흐린 불빛과 몽당연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침을 묻혀 꾹꾹 눌러 쓴다는 것은 자기만의 방에 담겨 흘러넘치는 이야기들을 압축하여 신중하게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상이 너무 높았던 것일까. 좀처럼 쓸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징그러워 글을 쓰기 힘든 순간들과 자꾸만 마주쳤다. 나의 글에 소외되거나 배제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라는, 무해 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가장 컸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 글을 쓰다 보면 인간으로서 필연적인 자기연민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이걸 그럴듯한 포장지로 잘 감싸낼 수 있을까?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이렇게 나열하는 것이 자아도취 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거짓말을 하기는 싫은데 그렇다면 어느 정도 솔직해야 할까. 등의 물음이었다. 못 쓴 글도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쓸모없는 글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글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주 망설였다.

 

특히나 아트인사이트 에디터가 되면서, 그 주춤함은 더욱 거세졌다. 모든 미술사를 줄줄 꿰고 있는 사람들, 각종 영화 장르의 마니아들, 음악, 전시, 도서 등등... 문화예술플랫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물론 단순한 오피니언이기에, 내가 생각한 바에 대해서만 쓰면 된다며, 괜찮다며 위안 삼았지만 더 전문성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 순간 글을 쓴다는 것이 징그럽다는 표현과 마주한 것이다. 막상 인정해버리고 나니 아주 마음이 편해지는 게 아니던가. 자기 자신의 들끓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써야만 하는 일, 안 쓰는 것보다는 쓰면서 나아지는 방법밖에 모르는 것이 글쓰기이기에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쓰는 일. 누가 묻지 않아도 자신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써 내려가는 일,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고 써 내려가는 실패의 경험,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쩌렁쩌렁 ‘세상에 이런 아름다움도 있다고요!’ 하며 알리는 수다스러움. 자신의 단점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다가도 마침내는 기어코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일.

 

어찌 보면 자의식 과잉에 자기연민에 자기변호가 뒤섞인 징그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징그러움과 멋있다는 말은 ‘하지만’이라는 접속사가 아니라,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연결될 수가 있는 것이다. ‘으, 징그럽긴. 하지만 멋있네.’가 아니라, ‘징그럽고 멋진 일이다!’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중요한 사실을 인정하고 난 이후, 무해 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던 마음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앞의 종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정해버리는 게 아니라 부단히 생각하고 노력하는 방법으로. 이 또한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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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감응하는 글쓰기


 

감응이란 ‘감동에 응하다.’라는 뜻이다. 사전적 정의는 감동과 비슷하나 확실한 차이가 있다. 감동이 가슴 안에서 솟구치는 느낌이라면 감응은 그것보다 더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이다. 가슴 안에서 솟구치던 감각이 밖으로 뛰쳐나가 또 다른 것들과 만나 새로운 감각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은유 작가님은, 감응은 능력이라고 표현한다. 무엇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법이라며. 나는 그 말이 감사했다. 직관적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많다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늘 좋은 능력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응력이 글쓰기나 감동을 누군가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에 있어서는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전시장에서 인상적인 작품과 마주했을 때, 그 의미를 해석하고 내 안의 것과 결합하여 또 다른 의미를 탄생시켰을 때, 영화나 책에서 감동을 받았을 때, 나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사실에 대해 전달하거나, 아무 볼펜이나 잡고 글을 써 내려가며 나만의 대나무숲에 소리치고 난 다음에야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다른 이의 의견을 듣는 것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같은 작품을 보며 다른 상상을 한다는 것, 그것을 각자가 다른 방면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아는 순간만큼은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그랬기에 많은 작품들에게 감사한 나날들이었다. 그 자리에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몇 인분의 몫을 해내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계속해서 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감응하게 되면 적극적인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 감동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수단이 내가 가장 좋아하고 익숙한 글을 쓰는 것이었으면 했다. 에디터라는 좋은 기회를 얻었고, 그래서인지 주어진 상황에 물음을 던지고 몸도 던지며, 능동적으로 감동에 응하려고 매 순간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쉬이 매료되는 줏대 없는 사람이 되어 쓰고 싶다. 어떤 가공할만한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기에, 감응력 하나라도 귀히 여겨주며 글을 쓰고 싶다.

 

 

 

나의 인식적 글쓰기


 

‘인식이 곧 위로다.’ 신형철 평론가의 이 말이 내게 큰 위로가 되어 다가온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는 그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슬픔을 정확히 인식한 음악, 정확히 인식한 책, 정확히 인식한 사람이 가장 큰 위로라고 한다. 내가 위로를 받은 순간에 나를 정확히 인식한 음악과 책과 영화가, 문화예술이 존재했다. 그것에 위로를 받은 이유는 그 자체로도 있었지만,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순수하다고 여겨져서였다. 상업적인 이유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근원적으로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별다른 계산적인 이유 없이 그 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위로받았듯이,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나도 정확히 인식해주고 싶었다.

 

물론 감상자의 다양한 해석이 있기에 작품이 존재한다. 정확히 인식하지 못해도 인식하려고 노력한 마음은 기쁨이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보다 감상자들의 다양한 해석이 힘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관객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작품 뒤의 사람을 인식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서도 쓸 수 있는 문화예술 플랫폼에 지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인식하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정확히 인식하고 싶다는 마음이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좋아하는 내 성향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한다.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자살한 예술가나 심한 우울증을 앓은 것을 작품에 표현한 사람들을 보면 당장이라도 그 시대로 달려가서 심리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전문 상담사가 되고 싶었다. 이제 와 그럴 수는 없으니까, 나의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인식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 위로하는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에, 정확한 인식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애도하는 글쓰기


 

박준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을 ‘애도’라고 표현한다.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책에서 최은영 작가는 자신의 슬픔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을 ‘애도하는 방법을 잊은 무지’라고 표현한다. 나는 글쓰기가 애도와 큰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글쓰기는 돌아보는 일이다. 글감을 찾기 위해서는 관성적으로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돌아본 뒷골목에는 많은 것들이 줄지어 서 있다. 현재를 사느라 잊어버린 슬픔, 지나간 인연, 멀고 아름다운 나라로 떠나버려 다시는 보지 못하는 사람. 참담하지만 반드시 직시해야 변화가 오는 사건, 결코 잊어 서는 안되는 사람, 정리되지 못한 마음들이.

 

이것들을 돌아보고, 돌보는 것이 나는 애도라고 생각한다. 내게도 애도하는 방법을 잊은 무지와 함께한 시절이 있었다. 그 무지는 변화를 이끌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슬픔에 이자를 붙여 데려왔다. 이제 나는 끊임없이 반추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글쓰기는 다수가 함께 애도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애도의 전방에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을 잊지 않고 애도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 이런 문장이 있다.

 

 
애도에서 다음 애도의 웅덩이로 텀벙텀벙 걸으면서도 다 놓아버리지 않은 것은, 내가 먼저 죽은 사람들의 기록관이어서였다. 남은 사람이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어떤 의미로는 친구들에게 져 술래가 된 것이다. 편을 먹고 내게 미룬 채 먼저들 가버렸다. 나 다음의 술래에 대해서는 어쩐지 짠한 마음이 있다.
 

 

술래의 역할이 내게 주어진다면, 기꺼이 받아드리겠다고 다짐한 대목이다. 여러 방식으로 기록을 하는 기록관들이 존재할 테니까, 그들을 보며 나 또한 애도하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얕은 깊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에 대해 대강 정리해보았다. 정리해보아도 잘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쓰면서 나아지는 방법 말고는 모르니, 하지 않는 방법은 더더욱이 모르니, 앞으로도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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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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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진금미
    • 저의 글쓰기를 돌아보면서 감명 깊게 읽었어요.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좋아서 시작했던 일인데 내가 쓴 글이 쌓이면서 고민도 깊어지더라고요. 글을 쓴다는 건 생각을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행위이니까 그런 치열한 고민이 필연적인 것 같기도 해요. 여러모로 공감되고 깊이 성찰할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3623 제 글에도 일부 인용했습니다 ㅎㅎ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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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세나
    • 진금미저보다 오래 글을 쓰신 전문 필진님의 댓글에 기분 좋은 공감의 위안을 받았어요. 사실 [Project당신]의 소개 글을 보고, 저와 같은 80퍼센트에 달하는 외향성과 성격유형에 저 또한 공감하며 여러 글을 클릭하여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폭력에 관한 에세이 시리즈도 소중히 읽어내려가고 있습니다. 그 어느 것이든 폭력의 외연은 넓힐수록 옳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소외되는 것들을 살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내는 필진님의 용기와, 행보를 응원합니다.

       +)제 글을 인용해주신 기고 글에도 댓글 남겼습니다! 저도 영화 <소울>을 보고,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토록 중요했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어서인지, 그것을 소재로 한 글에 인용될 수 있음에 더욱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멋진 글에 인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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