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단한 묘씨생 [도서]

과거와 현재의 고양이
글 입력 2021.03.2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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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단편 『묘씨생』과 최근 읽기 시작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리고 사노 요코의 『백만 번 산 고양이』를 읽고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고단한 묘생과 이제는 영물로서의 위엄마저 없어진, 묘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고양이의 어떤 매력이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산하게 했을까? 고양이는 예부터 주술적인 힘이 있는 동물로 여겨져 왔다.

 

그 외양에서부터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엇이 있다. 보석을 박은 듯한 아름다운 색을 지닌 영롱한 눈과 제 몸보다 훨씬 작은 공간도 태연하게 들어가고 나오는 액체처럼 유연한 몸, 어린아이 같은 기묘한 울음소리. 그리고 그들의 행동은 또 어떤가. 주인만을 바라보고 충성하는 개와 달리 독립성이 있고, 내키지 않을 때는 아무리 불러도 봐주지 않지만, 애정을 원할 때는 슬그머니 곁에 다가와서 다리에 머리를 비빈다.

 

이러한 성격과 외양이 사람들 사이에 호불호를 불러일으킨다. ‘강아지 파’인 사람들은 고양이가 너무 도도해서 개가 더 좋다고 한다. 왜냐면 고양이는 개처럼 길들이 수 없고, (가끔 강아지 같은 성격의 고양이가 있기는 하지만 소수이다.) 강아지처럼 항상 꼬리를 흔들면서 반겨주지 않는다. 일단 그들은 우리를 주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듯하다.

 

현대의 고양이와 동거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주인’이 아니라 ‘집사’라고 칭한다. 주와 식을 제공하지만 그들을 복종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역시 고양이가 매력적인 동물이라는 건 부인하기 힘들다. 그들은 자신 안의 야생성을 죽이지 않으면서 인간과 공존하는 법을 안다. 불리한 상황이 온다 싶으면 뒤도 보지 않고 유연한 몸으로 점프를 하여 달아난다. 나는 그런 고양이의 영악함과 독립성을 좋아한다. 그들은 똑똑하다. 너무 똑똑해서 가끔은 똑똑하지 않은 척을 하는 것 같다.

 

 

 

문학에서의 고양이, 과거의 고양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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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운, 버드나무 아래 까치와 고양이들

 

 

문학에서 묘사하는 자의식을 가진 고양이들의 성격은 꽤나 시니컬하고 현실적이다. 인간을 향한 무한정한 사랑이 디폴트 값인 개와 달리, 그들은 인간들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자기들 나름대로 인간들을 꽤나 정확하게 분석하여 평가를 한다. 인간 세계의 시스템에 순응 하진 않지만 그것을 이용하고 순응하는 척한다.

 

문학에서 나타나는 이런 공통된 고양이의 성격들은 고양이의 독립적인 성격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묘씨들 눈에 비치는 인간들은 포악하고 세상의 가장 큰 해악일 뿐이며 이 세상의 주인인양 오만방자하다.

 

 

떠도는 생물로서 인간을 경계하며 살았다. 좋은 인간도 있었으나 좋은 인간도 해로운 이간도 우연에 불과했으므로 어떤 우연을 맞닥뜨릴지 알 수 없는 한갓 묘씨생으로서, 매번의 우연을 낙관할 수는 없었다. 인간을 경계하는 일을 우선으로 두고 살았다.

 

- 황정은, 『파씨의 입문』 중 ‘묘씨생’, 창비, 2012, P123

 


고양이를 영적인 동물로 여기는 텍스트들도 있다. 어떤 고양이는 백만 번 죽고 살아나기도 하고 (사노 요코 『백만 번 산 고양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그들은 자신의 의견과 관점이 있다.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인간을 경멸하기도 한다.


고양이는 복수의 화신이어서 그들은 해코지하면 꼭 앙갚음을 한다는 이야기들 또한 있다. 레퍼토리는 인간에게 죄없이 해코지를 당한 고양이는 원한을 품고 죽어서도 인간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검은 고양이』가 대표적이다. 영적인 힘이 있는 고양이는 함부로 해하면 안 된다.


 

 

현대의 고양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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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텍스트들의 문제의식은 지나친 인간중심주의이다. 현대의 합리주의적 사상이 들어서면서 마법과 신비에 대한 믿음은 사라져 갔다. 고양이는 더는 영적이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길거리 고양이들은 사람들의 분풀이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귀엽다고 들였다가 제멋대로 다시 길바닥에 버려지기도 한다. 고양이 삶의 행복과 불행은 이제 인간의 손에 달린 것이 되었다.

 

집안에서 귀여움 받고 풍족하게 자라는 삶과 길거리에서의 빈곤한 삶, 어느 쪽이 고양이에게 더 나은 삶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는 당연히 집고양이가 훨씬 행복하지 않겠느냐 하고 집고양이와 길고양이의 수명에 관한 연구결과를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

 

다만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려 드는 인간에 의해 그들의 행복과 불행이 마저 정해지는 것이 씁쓸하다.


유튜브에선 웃기고 귀여운 고양이 동영상들이 넘쳐난다. 가끔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자세로 사람들을 폭소하게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 우스운 것이지,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 전례 없이 인간중심주의가 팽배한 세계에서 우리는 동물에게도 인간의 관점을 씌운다. 고양이의 우스운 행동에 넣는 ‘고양이의 내면의 소리’를 대변하는 내레이션, 그리고 그들의 행동에 밑에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자막들.

 

나는 동물의 야생성을 거세시키고 왜곡시키는 인간들의 독단이 불편하다. 묘 씨는 그저 묘 씨로서 편하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것 인가.


하지만 고양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배 깔고 잘 뜨뜻한 곳과 깨끗한 물과 배불려 줄 밥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듯 쳐다본다. 나는 오늘도 유튜브에서 ‘상위 1프로 개냥이’ 동영상을 본다.

 

 

인간도 고양이 못지않게 우는 경우가 다반사인 데다 이 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생물이 인간이라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억울해 땅을 칠 노릇인 것이다 (...) 도무지 이 몸이란 짐승 역시 먹고사는 것을 제일로 여기는 처지, 먹고사는 일로 따지자면 어느 짐승의 먹고사는 일이 가장 중요한지는 누구도 간단히 말할 수 없는데도, 자기들만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듯 아무 데나 눈을 흘기는 인간들이 승하는 세계란 단지 시끄럽고 거칠 뿐이니 완파되는 편이 좋을 것이다.

 

- P115

 

 

[박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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