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너무 아픈 사랑도 사랑이기에 - 해피투게더 [영화]

생의 고독에서 도망쳐
글 입력 2021.03.2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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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보게 하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그 자국을 훑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지는 사랑이. 故 김광석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에는 이런 가사가 거듭 반복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래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자고 그립던 날들도 묻어 버리자고, 그는 말한다.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사연 없는 집이 없고 아픔 없는 사랑은 없다지만, 유달리 오래 울리는 사랑이 있다. 마치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돌아보면 늘 똑같은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랑이. 차마 외면할 수도 그렇다고 다가가 버럭 안아버릴 수도 없는. 그것은 담기에는 너무 아프고 없는 척하기에는 마음 끝자락에 턱 하니 걸려있어서. 그래서 떠올리는 것조차 사치가 되는 사랑이 있다. 그런 여유를 부릴 만큼의 허용이 되지 않는 사랑이.

 

 

 

영화 <해피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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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는 이러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던 아휘와 보영은 그들이 사는 홍콩에서 가장 먼, 지구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에 가서 그들의 사랑을 다시 시작해보려 했지만, 결국엔 똑같은 이유로 다시 이별한다. 아휘는 보영의 자유로움에, 보영은 아휘의 딱딱함에 질려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아휘가 떠난 아파트에서 홀로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담요를 끌어안으며 우는 보영과 돈을 모아 아르헨티나를 떠나는 아휘를 비추며 끝이 난다.


사실 그러한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지점은 영화 곳곳에 나와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갑자기 아침 운동이 몸에 좋다며 새벽부터 보영은 아휘를 깨워 산책하러 가지만, 날씨는 말도 안 되게 추웠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보영은 걷자고 하고 뒤늦게 둘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휘는 결국 감기에 걸린다. 그들의 관계는 이 장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늘 제멋대로인 보영의 충동은 아휘를 병들게 한다. 아휘는 그를 사랑하기에 속절없이 그런 고통을 받아들였지만, 병든 상태로는 그 무엇도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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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보영도 마찬가지다. 늦은 밤 담배를 사러 갔다 말하는 보영이 불안한 아휘는 다음 날 탁자에 수북이 쌓을 수 있을 만큼의 담배를 사 온다. 보영 자신의 충동이 아휘를 병들 게 했던 만큼 그 자신의 자유로운 본성 역시 아휘의 집요함에 침공받는다. 그리고 이는 아휘가 보영의 여권을 숨기는 데에서 극에 달한다. 결국, 보영은 아휘를 떠나고 시간이 지난 뒤 보영은 또다시 아휘에게 전화 걸어 예전처럼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지만, 이제는 정말 그 둘의 사랑이 끝이 난다.


그들은 사랑이 끝난 후 또다시 사랑을 찾아 헤맨다. 실연 후에 겪는 과정이라기엔 너무 필사적이고 또 본능적이었다. 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사는 것처럼. 이에 아휘는 “난 늘 그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고독해지면 똑같다는 걸 깨달았다.”라 말한다. 고국을 떠나 먼 타국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겐 사랑이 있어야만 했다. 사랑을 위해 먼 타국으로 떠난 것이기도 했지만, 그곳은 사랑 없이 버틸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그러한 그들의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산다는 것은 늘 고향을 떠난 것처럼 외롭고 낯설다. 쉽게 익숙해지지 않고 익숙해졌으리라 믿었을 때 삶은 예상치 못하게 뒤통수를 쳐온다. 그래서 순간, 순간이 고난의 연속이고 요령은 생각만큼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약한 우리는 사랑에 기댄다. 사랑하지 않고서 생의 고독은 버겁다.

 

 

 

사랑은 정말 변명과도 같은 것이기에


 

일전에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로 물고기들>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사랑 자체가 혼자 버텨내야 할 생(生)의 고독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나는 때때로 정말 사랑이란 그리 숭고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생의 고독에서 도망친 산물일 수도 있고 순간의 욕정일 수도 있다고. 그래서 사랑이란 정말 변명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랑 역시 반드시 아프다. 왜냐면 사랑은 상대방과 나의 합이 시작되는 예민한 순간인데 그때 어떤 것은 소멸하는 것이 미덕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의 결과가 아무리 애틋할지라도 고통은 필연적이다. 사랑하기에 그것을 감내하리라 다짐하지만, 그러한 다짐은 또 쉽게 무너진다. 애초의 사랑은 무엇이 됐든 그 고통을 감내하려 시작된 것이기에.

 

그러니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아픈데 이것이 사랑일 수 있겠느냐 말하며. 하지만 고통이 있기에 사랑이 있다. 그러니 우습게도 너무 아픈 사랑도 사랑이다. 그래서 아휘가 녹음기에 담아 세상 끝에 묻어 버리고만 싶었던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다. 그리고 어쩌면 점차 퇴색되어가는 그 기억을 훑는 것만으로 그의 고독은 덜어질지도 모른다. 한때의 사랑은 그래서 그렇게 영원히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던 나 역시 아파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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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그 말을 지탱하는 논리도 그 말이 시작된 논의 점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뭐가 됐든 간에 어쨌든 ‘사랑’이란 거에도 자격이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누구나 쉽게 섣불리 사랑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것의 결론이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알 수 없이 묘한 짜증이 일었지만,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된 사랑이 어떻게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또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알았으니까. 그래서 그 말을 듣는 나는 “응. 맞아. 사랑이 그렇지.”라고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커가면서도 그러한 내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사랑이란 것도 자격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이 가능한 범주는 모호했지만, 나는 늘 그것을 빗겨 나갔다. 나의 자존감도 나의 경제 사정도 나의 찌질함도 그리고 무모하게 나 자신을 내던지지 못하는 주저하는 마음도, 그런 나의 모든 것이.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또 멀리 도망쳐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는 했다.

 

그리곤 안심했다. 이곳은 아직 사랑이 침범하지 않았다고. 나는 아직 안전하리라고. 사랑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게 우스웠지만 그런 사랑은 내게 넘치게 버거웠기에. 그리고는 그곳에 서서 아픈 사랑을 하는 연인들의 울고 웃는 모습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그들보다 내가 일종의 우위를 선점했다 자만하기도 했던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랑에서 도망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나 역시 보이지 않는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어쩌면 도망치면 칠수록 가까워지는 건 고통일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대게 생의 고독이란 건 한 인간이 홀로 견뎌 내기엔 버거운 것이라고.

 

 

[신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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