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쉽게 말해지는 가난의 쉽지 않은 세계 [도서/문학]

3대째 이어진 한 가족의 가난을 살피며, <사당동 더하기 25>
글 입력 2021.03.1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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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빈곤이 쉬워졌다.

 

‘가난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뱉어낸다. 가진 돈을 재테크에 투자해서 돈이 없는 사람도 가난하다고 말하고, 지난달에 할부로 비싼 가전과 좋은 옷을 사느라 월급이 통장을 스쳐 지나간 사람도 가난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자신의 돈으로 무엇을 하든, 그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정말로 묻고 싶다. 어떤 마음으로 가난을 말하고 있는지를.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


 

한 가족의 가난을 기록한 책이 있다. 바로 『사당동 더하기 25』. 사회학자 조은이 1986년부터 25년간 불량 거주지(판자촌)의 금선 할머니 가족을 대상으로 연구한 문화기술지다.

 

이 책의 작가이자 연구자인 조은 선생은 서울의 가장 큰 달동네 중 하나였던 사당동에서 ‘재개발 사업이 지역 주민에 미친 영향’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후에 철거 재개발 지역 주민에 대한 관심을 끊지 못하고 그들의 일상을 기록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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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사당동 더하기 25』는 금선 할머니 가족의 ‘빈곤의 고리’와 ‘빈곤 문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사당동 판자촌에 살던 금선 할머니 가족에게 임대아파트 이사라는 변화가 생길 때, 이들을 옭아맨 빈곤의 고리는 어떻게 될까. 끊어질까. 이 책은 그러한 의문에 조금씩 답한다.

 

 


'돌고 또 돌고', 빈곤의 고리와 빈곤 문화


 

주거 형태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빈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빈곤의 고리는 밧줄의 외양을 한 낚싯줄 같았다. 처음엔 굵은 밧줄처럼 끊어 내기 어려워 보였지만, 주거환경이 개선되면서 아주 약한 줄처럼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를 수 있는. 그런데 알고 보니 낚싯줄이었다. 너무 쨍쨍하다.

 

금선 할머니의 막내 손자인 덕주 씨는 이런 말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커서 잘살면 내 아들도 잘살고, 

내가 못살면 (내 아들도) 똑같이 살아야 되니까 누구 하나 잘해서 성공해야 되는데

안 그러면 못살고, 못살고, 돌고 또 돌고 계속 그 자리만 머물게 되고...

 

『사당동 더하기 25』, 220페이지

 

 

돌고 또 돌고. 빈곤이 대물림되고 가난이 재생산된다.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정부의 지원도 받는데, 돈은 모이지 않았다. 이들의 삶에는 '빈곤 문화'라고 불릴 만한 생활 양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돈이 없어서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일을 한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대포차, 대포폰의 주인이 되었고, 그래서 범법자가 되었다. 돈이 없어서 계획된 결혼이라는 건 선택지에 없고, 어쩌다 같이 자고 어쩌다 같이 살 게 된다. 가진 노동력은 맨몸뿐이고,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강한 노동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래서 일하다가 아프면 며칠 쉬는 사이 빚이 된다. 꿈이 있으려면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장사하려면 밑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종잣돈이 없다.

 

당장 살기에 급급한 이들에게 교육이나 계획 따위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한 사고방식과 거기서 파생된 행동 양식을 자식들이 똑같이 이어나가고 있었다.

 

 


상상 이상의 영향을 끼치는 ‘주어진 조건’


 

열심히 살지만 가난하다. 이들에게는 사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전략이나 요령이 없다. 그걸 배우자니, 필요성이 강조되지 않는 환경이 그 뒤에 있었다. 어찌할 도리 없이 '전보다 조금 나아진 정도'로 '전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

 

빈곤의 고리도, 빈곤의 문화도 그들이 선택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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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잡지 《한편》 창간호 <세대>의 「밀레니얼에게 가족이란」 글에서, 필자는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청년 세대의 ‘가족 배경’이 현재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말한다.

 

 

분석 결과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게 청년층에서 가족 배경의 영향력이 대학 진학, 취업, 소득 전반에서 다른 연령층과 비교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은 청년들일수록 서울소재 대학 진학률이 높았으며 대학에서의 만족도와 경험에서도 상대적 우위에 있었다. (…)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은 부모 밑에서 자란 청년들일수록 더 고소득의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밀레니얼에게 가족이란」, 98페이지

 

 

더 놀라운 사실은 대학이나 소득 같은 객관적 지표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의식과 태도’에서도 가족 배경에 따라 일관된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다.

 

특히 ‘기회 공정성 인식’의 경우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상층 가족 배경을 가진 청년은 비슷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중년층보다 이를 긍정적"으로 여겼다.


누군가에게 이 세상은 불공정하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곳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공정한 기회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가정환경에 따라 한 사람이 갖는 세계는 이토록 다르다.

 

*

 

한편 능력주의에 관한 환상이 사회를 지배한다. 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 ‘따위’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를 단순 패배자로 여기며, 이들이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를 무능력에서 찾는다.

 

그러나 조은 선생이 한 인터뷰에서 표현한 대로 "그들의 일상에 배어있는 불안정성"은, 무능력이라는 단어 하나로 대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도 않고, 능력과 무능력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불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말하는 '잠깐의 재정 부족'과 불안정성으로 점철된 이들의 '가난'은 결코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가난과 빈곤, 그것을 쉽게 말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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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서울독립영화제] '켜켜이 쌓은 시간' - <사당동 더하기 33> 조은 감독, 서울독립영화제블로그, 2020.12.01. 16:00

 

 

[송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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