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빛나는 데 너무 늦은 때란 없기에, 뮤지컬 '호프' [공연]

글 입력 2021.03.1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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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원래 동네마다 한 명씩 있어야 돼.

- 뭐가?

- 미친년. 기준이 필요하거든. 지들은 정상이라는 기준.

 

 

한 여자가 있다. 나이는 78세. 같이 사는 사람도,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동네에서 소문난 '미친년'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를 기피하지만, 그 역시 딱히 억울해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자신에게 씌워진 '미친년'이란 타이틀을 굳이 벗어나려 하지 않고 고독한 삶을 이어가는 이 여자의 이름은 '에바 호프'다.


호프는 30년째 진행 중인 재판의 피고인이다. 호프가 유일하게 곁에 두는 것이자 세상에서 가장 중하게 여기는 요제프 클라인의 미발표 원고를 놓고, 이스라엘 도서관과 호프는 30년째 싸워오고 있다. 도서관 측은 원고가 호프의 소유물이 아니라 주장해왔고, 호프는 끈질기게 반박해오고 있었다. 길고 긴 법정 싸움의 마지막 재판 날, 호프는 처음으로 원고를 들고 변호사도 없이 법정에 출석한다.


이 마지막 재판에서 이스라엘 도서관 측 변호사가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하는 증거들은 법정에서는 팩트일 뿐이지만, 호프에게는 과거의 기억들을 생생하게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원고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호프의 삶의 조각들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78세의 호프는 무대 한켠에 앉아 되살아나는 자신의 기억들을 관객처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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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그 빌어먹을 원고나 지키며 살아

내가 돌아갈 곳도 내가 있어야 할 곳도

모두 엄마였는데 당신이 내 집이었는데

 


관객이 목도하게 되는 과거 호프의 삶은 갖은 상처들로 빼곡하다. 10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벌어진 전쟁과 그로 인해 유태인인 호프가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로 해야만 했던 가혹한 노동,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행복한 삶을 꿈꿨지만 되려 호프에게 사기를 치고 떠나버린 연인 카델, 죽도록 벗어나고 싶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던 '시궁창 같은 삶'. 호프의 삶은 간절히 봄을 바랐지만 겨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나그네 같은 삶이었음이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호프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존재는 호프의 엄마 마리다. 작가 베르트는 친구 요제프의 원고를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전쟁이 터지자 자신의 연인에게 원고를 맡기며 후일을 기약한다. 그 연인은 바로 마리였다. 마리는 그 이후 원고만 있으면 베르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따뜻한 집에서 행복하게 지냈던 예전의 좋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점점 호프를 등한시하고 원고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베르트가 다시 함께하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떠나버린 이후로 원고를 향한 마리의 집착은 한층 심해진다. 호프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내내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사랑하기에 더 큰 박탈감과 절망을 느끼며 상처 입는다.


그렇지만 호프의 삶에 가장 치명적인 아픔을 준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호프는 살아오면서 자신이 내린 잘못된 선택들에 대한 죄책감과, 그에 따른 자기혐오를 가득 안고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수용소 시절 공포에 질려, 또 자신과 엄마를 지키기 위해 함께 저항 봉기를 도모하던 유태인들을 고발한 일은 평생 호프에게 죄의식으로 남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엄마를 홀로 두고 집을 나와버린 것, 엄마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것은 호프에게 가장 무거운 짐이 되고 자기혐오의 뿌리가 된다.


 

잃은 적 있는 사람은 알아

전부를 잃고 남은 게 하나라면

내 자릴 뺏고 내 인생을 망쳐도

그게 내 유일한 세상

 


그렇기에 호프는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엄마처럼 원고에 집착하게 된다. 엄마에게 원고가 행복했던 과거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면, 호프에게 원고는 자신을 과거에 묶어두는 도구다. 스스로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혐오스러운 과거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자신에게 벌을 주는 도구이자, 더 이상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용기가 없어 괴로울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아오게 되는 '시궁창 같은 삶'의 조각이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잃은 호프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 원고였기에 호프는 원고를 떠나보내는 것에 겁을 낸다. 원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시작한 재판이었지만 30년 동안 끝을 내지 못한 이유다. 툭하면 원고가 자신의 삶을 망쳤다고 말하면서도 원고가 없으면 홀로 자신의 삶을 오롯이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호프는 지긋지긋한 원고에게 계속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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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은 이름이 없다

절망의 거울일 뿐

쥘 수 없던 모든 게

그 책의 이름이었다

 


이 뮤지컬의 독특한 점은 원고가 의인화되어 등장한다는 것이다. 'K'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원고는 변호인이 없는 호프의 변론을 대신 해주기도 하고 (물론 원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호프 뿐이지만), 호프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년 취급을 받는 것에 분개하기도 하며 극 내내 호프의 편이 되어준다. 엄마를 떠나 집을 나온 호프의 고달픈 삶이 무대에 펼쳐질 때 슬픈 눈으로 대신 노래하는 것 역시 K다.


K는 호프에게 감정적으로 공감할 뿐만 아니라, 호프가 현재의 삶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길 간절하게 바라는 캐릭터다. 끊임없이 자신을 떠날 것, 버려서라도 자신에게서 벗어날 것을 종용한다. 호프가 라이터에 불을 붙이자 오히려 불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자신은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고 말해주는 희생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여기에는 자신이 호프와 마리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K의 죄책감이 바탕이 되어 있다. 그렇지만 어쩌면 K가 호프에게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칭송받아 마땅한 글로 태어났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에 자신을 비관한 작가에게 버림받고 이름도 없이 '절망의 거울'이 되어버린 만큼, 희망을 뜻하는 이름과는 달리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삶을 살아온 호프의 처지에 자신을 동일시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앞으로 써나갈 이야기가 더 많아

시작이 아냐 잠시 멈췄던 거야

반전은 항상 마지막에 있어

내가 아닌 너의 이야기로 채워

누구보다 빛나는 결말을 맺어

 


이유야 무엇이었든 K는 호프가 끝내 새로운 날로 나아가도록 돕는다. 그저 호프가 힘겨운 삶 속에서 무언가 붙들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원고에게 더 집착하고 있었으며, 호프는 이미 30년 전부터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이제는 행복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K는 일깨워준다. 다른 누구도 아닌 K, 즉 원고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은 호프가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고 마침내 완전히 죄의식과 자기혐오로 얼룩진 기억들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30년에 걸친 재판은 막을 내린다. 법정에서 호프에게 내린 판결은 원고의 소유권을 이스라엘 도서관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호프가 진짜로 받은 판결은 K가 내린 판결이다.


'당신이 상속받은 재산은 에바 호프뿐이다. 당신의 인생은 그 누구에게도 팔아넘길 수 없다. 당신은 누구보다 당신을 잘 지켜줘야 한다. 당신은 떠날 수 있고,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다만 당신이 돌아갈 곳은 반드시 너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으로 에바 호프의 인생을 에바 호프에게 되돌려주기로 판결한다.'


모두가 밝게 웃으며 호프가 새롭게 내딛는 걸음을 응원하는 가운데, K의 판결을 받아 든 호프는 소리 내어 웃으며 '겨울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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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알아 이미 알고 있어

당신이란 책을 제대로 읽어봐

그 속엔 네가 잊었던 문장이 많아

넌 수고했다

넌 충분하다

넌 살아냈다

늦지 않았다

 


평생 고달픈 인생을 살았던 여자, 그리고 절반의 삶은 자신에게 벌을 주는 마음으로 살아왔던 한 여자가 스스로를 용서하고 포용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물론 잘못된 선택들도 있었지만 지은 죄보다 훨씬 더 무거운 벌을 짊어지고 살아온 호프가 마침내 거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환하게 짓는 미소를 바라보고 있자면 절로 울컥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호프를 넘어, 호프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에 직접적인 위로를 전한다. 나를 수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자꾸만 나를 평가하려 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오롯이 나 스스로를 지켜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남의 시선에 흔들리다 보면 나를 잃기 십상이고, 내가 없는 나는 쉽게 자괴감에 빠진다. 이 작품은 그런 모든 '나'를 향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은 빛나고 있으며, 당신이 당신을 마주하고 행복해지기엔 지금도 충분히 늦지 않았다고 격려한다.


실제로 30년간 이어졌던 프란츠 카프카의 유작 반환 소송 재판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극예술 특유의 장점을 놓치지 않는다. 의인화된 원고가 등장해 작품의 주제를 한층 강렬하게 전달하고, 호프와 K를 제외한 배우들이 1인 다역을 맡으면서 카델을 연기한 배우가 호프와 대립하는 검사 역을 연기하는 등 극에 약간의 재미를 더한다.


더불어 잔인하지 않으면서도 지극히 소름 끼치게 표현된 수용소 장면, 잠깐 쉬어가는 쇼 스타퍼 같으면서도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긴장감을 더하는 경매 장면 등 연출 역시 인상적이다. 거기에 모던하면서도 묵직한 감동을 전하는 넘버까지, 어떻게 2019년 한국 뮤지컬 어워즈 8관왕을 달성할 수 있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작품이다.


 

빛날 거야, 에바 호프

 


희망과 가장 동떨어진 삶을 살았지만 마침내 희망에 닿은 여자 호프. 그의 삶을 지켜보며 감동을 느낄 수도, 위로를 받을 수도, 응원을 얻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는 절대 늦은 때란 없다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 우산을 쓰고 행복하게 걸어가던 8세의 호프가 짓고 있던 미소보다 훨씬 더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된 78세의 호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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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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