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사물] 아니 땐 굴뚝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를 고민하며.
글 입력 2021.03.14 09:5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

[말과:사물]은 일상에서 흔히 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에 관한 고민의 시간을 갖는 에세이 프로젝트입니다.

 


 

아니 땐 굴뚝



[크기변환]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_001.jpg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설의법으로, 유명한 '속담'이다. 흔히 쓰이는 말이며, ‘지혜’로서 받아들여지는 '격언'이다.

 

흔히 ‘소문이 퍼진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퍼진 것이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누군가에 관한 어떤 소문이 퍼졌다면, 사실에서 얼마나 왜곡되었는 지와는 관계없이, 소문의 주인공이 어느 정도 원인을 제공하긴 한 것임을 주장하는 말이다.


해당 설의적 표현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평서문으로 바꾸면, ‘아니 땐 (집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


‘아니 땐 집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항상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한 명제가 항상 참이면 그것의 대우 역시 항상 참이다. 따라서 ‘연기가 나는 굴뚝을 가진 집은 불을 때웠다.’는 항상 참이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흔히 간과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집은 보통 이웃 없는 단독주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림1최종.JPG

[그림1]

 

 

우리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말을 들을 때에, 머리에 그리는 그림은 보통 이런 모습일 것이다. 굴뚝에 연기가 나고 있고, 보이는 굴뚝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집에서 불을 피웠을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이 그림(그림1)은 평면적이다. 이제 그림을 입체적으로 바라봐보자. 우리의 현실은 평면적이지는 않지 않은가.

 


그림2-1.JPG

[그림2]


 

[그림2]는 [그림1]을 수직축을 기준으로 45도 정도 회전시킨 그림이다. 입체적인 형상도 한 면에 대해 수직인 시선으로만 바라본다면, 평면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더불어,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때에야,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보인다. 그것은 바로 보이는 집 뒤에 있는 집이다. 우리는 A의 정면에서, A만 보이는 상태로, A에서 연기가 나는 것으로 ‘보이기에’, A가 불을 피웠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불을 피운 것은 A 뒤에 보이지 않게 숨어있던 B였다.


또 다른 집인 B가 A와 일직선 상에 놓여 있고, A와 크기가 같거나 A보다 작다면, 우리가 A를 편향된 시선에서 바라볼 때에 B는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림3-3.JPG

[그림3]

 

 

[그림2]의 집 A와 B를 각각 다시 한 번 수직축을 기준으로 45도 돌리면 [그림3]이 나올 것이다. A에서는 연기가 나오지 않았음이 이토록 명백하다. 하지만 이때도,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B 뒤에, B와 크기가 같거나 B보다 작은 집 C가 있을지는, B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불을 땐 집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난다. 이 명제는 항상 참이다. 그러나 어떤 명제가 항상 참임은, 그 명제의 ‘역’이 항상 참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여, 항상 ‘현재 자신이 서 있는 방향에서 보이는’ 굴뚝의 집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크기변환]아니땐-굴뚝_인스타-003.jpg

배경그림: 벨라스케스 '시녀들(Las Meninas)'

 

 

이미 필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깨달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집은 보통 이웃 없는 단독주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개 주택'단지'로 존재한다. 따라서 연기가 나는 굴뚝이 보인다고 하여 항상 자신 앞에 놓인 집에서 불을 피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 않은가. 분명 A로 보였던 것이 사실 그 뒤에 숨어있던 B일지, 혹은 B뒤에 또 한 번 더 숨어있던 C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소문의 주인공이라고 하여 항상 그 사람이 소문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소문의 당사자가 원인을 제공하였기에 퍼진 소문도 있다. 불을 피운 집의 굴뚝에서는 항상 연기가 난다. 그러나 그때에도 소문의 사실 왜곡 정도는 섬세히 따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분명히 소문 피해자가 원인을 전혀 제공하지 않은 소문도 있다. 그런 소문에 대하여서는, ‘피해자’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것에 대하여서는, 피해자에게 ‘본인의 책임을 생각해보라’라는 말을 하는 것부터 폭력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한 막연한 미움을, ‘그 사람도 분명 아니 땐 굴뚝이 아닐 것이다’라는 위험한 믿음으로 정당화하며 그저 안일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항상 해볼 필요가 있겠다.

 

 

[최호용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