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잊어선 안 될 얼굴 - 언컷 젬스 [영화]

글 입력 2021.03.06 11:3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성실한 남자


  

언컷1.jpg


 

순간에 안주하지 않는 것을 성실함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면, 하워드는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는 단 1분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으므로.


하워드는 날마다 자신이 운영하는 보석상에 꼬박꼬박 출근하여 고객들과 흥정을 벌이고,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틈틈이 스포츠토토 딜러를 찾아가 배팅을 한다. 길을 걷는 와중에도 걸핏하면 들이닥치는 빚쟁이들을 배짱뿐인 허세로 상대하여 돌려보내고, 하나의 회선에 동시다발적으로 밀려드는 전화에도 놓치는 것 하나 없이 용건을 주고받는다. 그 와중에 손님이 보증금으로 맡기고 간 반지를 전당포로 빼돌려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다시 딜러를 찾아가 배팅 값을 올린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닌 보람도 없이 한탕 제대로 쳤다고 생각했던 배팅이 허탕으로 끝나 버리고, 100만 달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보석의 가치가 그 10분의 1로 뚝 떨어져 버리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어버려도 그는 잠깐 내연녀의 품에 안겨 흐느끼고 말뿐, 곧장 다음 계획을 세워서 망설임 없이 실행한다. 이러한 하워드의 성실함은 도박판에 떠도는 많은 명언들 중 다음의 구절을 절로 상기시킨다.


‘따는 기쁨 다음가는 것은 잃는 기쁨이다. 그러나 정체만은 용납할 수 없다.’


이 구절은 도박 중독자가 되어가는 인간의 심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먼저 나의 돈을 걸어서 남의 돈을 ‘따는 기쁨’을 알고, 그다음엔 자기 돈을 남에게 빼앗기면서도 그 순간의 스릴을 즐기며 ‘잃는 기쁨’을 알게 된다. 그러다 끝에 가서는 따는 것도 잃는 것도 상관없는,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정체)’만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 단계에서 인간의 심리 상태는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화물트럭과 같아진다. 핸들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눈앞의 장애물을 간신히 피한다고 해도, 속력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간다. 남은 것은 오직 전진뿐이지만, 그 내리막의 끝에는 더 이상 길이 없다. 하워드는 이미 그 트럭의 운전사가 된 지 오래다.


그런 자신의 신세를 깨닫고 내연녀의 품에서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나한테 더 잘해줄 수 있었잖아. 나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주절거리며 한탄하던 그 순간엔 하워드도 잠깐이나마 이런 의문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나는 그저 현재에 충실하며 살았을 뿐인데.’

 

맞는 말이다. 그는 그 누구 못지않게 성실한 태도와 의욕적인 마인드로 현재를 살았다. 그리고 그는 제법 뛰어난 수완으로 꽤나 많은 부를 쌓는 데 성공한 재력가이기도 하다. 이것은 하워드와 다른 영화 속 도박자들의 흥미로운 차이점 중 하나다. 그에게는 좋은 집, 좋은 차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아내에 토끼 같은 자식도 셋이나 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부만큼의 채무도 만만치 않아 보이지만, 그것은 그에게 그만큼의 자금을 융통 받을 만한 신용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래는 착실하게 돈을 벌었던 부자가 도박에 손을 대면서 망가진 것이라고 보기엔, 그가 도박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능숙하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사업적인 수익에 더해서 도박을 통해 벌어들인 배당금으로 지금의 삶을 구축한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도박으로 얼룩진 자신의 현재에 충실하는 이유도 이해할 만하다. 어쨌든 그는 그 결과로 성공을 맛본 적이 있는 사람이니까. 현재에 충실하는 것만이 현재를 옥죄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인 양 행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물론 그에게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럽지만). 문제는 그가 지나칠 정도로 성실하게 현재에‘만’ 충실했다는 점이고, 그것이야말로 도박을 관장하는 욕망의 신의 노림수였다는 사실이다.

 

 

 

하워드의 ‘현재’


 

언컷2.jpg

 

 

보통의 사람들은 ‘현재’라는 것을 ‘오늘’ 정도의 날짜 단위로 인식하지만, 도박 중독자의 ‘현재’는 그보다도 훨씬 순간적이다. ‘배팅을 하고, 결과를 확인한다’ 이 일련의 과정만이 그들의 현재가 되기 때문이다. 배팅하는 종목에 따라서 소모되는 시간의 양도 달라지겠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문제인 것은 그 모든 현재가 과거나 미래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에서 알 수 있듯 과거의 실패는 미래의 성공까진 아니어도 같은 실수만은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교훈이 되어준다. 이것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한 데 묶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박은 인간으로부터 그러한 능력을 앗아간다. ‘도박은 시간을 마취제로 만들어 버린다’라고 했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인간의 사고력을 완전히 마비시켜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하워드의 현재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하워드의 배팅은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걸.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받아야 할 돈이 있는 아르노(에릭 보고 시안)와 그 패거리들은 그가 또 멋대로 배팅을 하기 전에 돈을 받아내려고 한다. 도박 중독자가 아닌 그들은 하워드의 실패한 과거를 통해 실패할 미래 또한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재밌는 건 그 사실을 하워드 또한 배우지 못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아르노를 비롯한 주변 지인들에게 빚을 진 액수만큼 이 그가 겪어온 실패의 기록일 테니, 그 또한 지능이 있는 인간이라면 지난 과거를 통해 자신의 현재가 미래의 실패로 이어질 확률이 훨씬 높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박 중독자의 머릿속에서 과거를 근거로 산출한 확률은 무의미하다. 오지도 않은 미래 같은 건 당연히 생각할 가치도 없다. 오직 현재 자신의 앞에 펼쳐진 도박판의 배당금만이 그를 자극할 뿐이다. 저명한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도 말한 바 있는 “기억의 흔적을 지우고 의미를 잃어버린, 투명”하고 기이한 열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기억을 포기한 그 순간부터 그에게는 더 이상 과거로부터의 교훈도, 미래를 위한 반성도 남지 않게 된다. 오직 현재를 위한 현재만이 끝없이 그를 추동한다.

 

4만 달러짜리 배팅이 수포로 돌아갔으면 뭐 어떤가. 17개월을 공들여서 빼돌린 보석이 기대했던 것의 반의반도 안 되는 헐값으로 후려쳐졌으면 또 뭐 어떤가. 그로 인해 아내에겐 경멸당하고, 자식들과는 소원해졌으며 빚은 더욱 불어나서 아르노 일당에게 언제 맞아 죽을지 알 수 없을 지경이지만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현재 그의 눈앞에 100만 달러가 걸린 ‘셀틱스 대 보스턴’의 경기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이쯤 되니, 앞서 언급했던 그의 눈물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빚쟁이들에게 얻어맞기까지 한 것에 수치심을 느껴 흘리는 줄 알았던 그 눈물.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망쳐버린 것들에 대한 후회의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배팅할 자금이 없는 현재에 대한 좌절의 눈물이었던 것은 아닐까. 마치 애착 인형을 빼앗긴 어린애처럼 말이다.

 

 

 

잊어선 안 될 얼굴


 

언컷1.jpg

 

 

정말이지 몰락에 가까운 하워드의 최후는 사실 이런 장르의 영화 특성상 처음부터 예견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하워드의 입장에서도 그 최후가 마냥 몰락이기만 할지는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사회학자 거다 리스의 저서 <도박>에 등장하는 도박자 잭 리차드슨은 도박이 주는 경험에 대해 “날카롭고 활기찬 현재에 존재”하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그 순간, 너무나도 찰나적이기에 정말로 존재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텅 빈 감흥이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도박자들은 그 순간을 끊임없이 갈구하며 그것을 위한 현재를 무한히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하워드는 자신의 광대뼈를 관통한 총알과 함께 바로 그 순간에 박제된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걸 올인한 셀틱스의 승리를 관전하며 ‘따는 기쁨’에 취해있던 ‘날카롭고 활기찬 현재’에. 그래서일까. 얼굴에 구멍이 난 줄도 모르고 활짝 웃고 있는 하워드의 마지막 표정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영국의 한 즉석복권 광고에서 봤던 슬로건이 떠올랐다.


‘한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잊으세요.’


그 결과가 바로 저 얼굴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을 필요가 있다.

 

 

[임현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