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화염이 휩쓴 자리에 남은 것 [도서]

글 입력 2021.03.08 13:2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화염


 

화염이 휩쓴 자리엔 침묵만이 남았다. 고요하고 묵직하다. 화재가 왜 일어났는지 알아보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불씨였는가. <화염>의 주인공 나왈은 죽었고, 그녀의 공증인 에르밀 르벨과 쌍둥이 자식 잔느와 시몽만이 남았다. 나왈은 화재 그 자체였으며, 아무도 그녀가 화염이 된 이유를 몰랐다. 남매는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5년 전, 영원한 침묵 속에 잠들기까지 엄마가 품었던 불씨를 찾기 위해서.

 

 

어린 시절은 목에 꽂힌 칼이야.

우린 그걸 쉽게 빼낼 수 없지.

 

 

너희의 아버지와 형을 찾으라는 유언은 그녀가 세상에 남기고 간 마지막 메시지였다. 당사자는 말을 할 수 없고, 조각난 기억을 가진 주변인만 남았다. 현재로부터 과거까지, 잔느와 시몽은 띄엄띄엄 허술한 징검다리를 건너가야 했다. 기억 파편들을 꿰어가며 마주한 현실은 참혹했다. 1과 1을 더하면 2여야 하는데, 1이 될 수도 있었다.

 


img.png

 

 

전쟁과 폭력의 가장 꼭대기에 있던 사람, 제 어머니를 고문하고 끊임없이 괴롭혔던 사람, 그 무자비한 사람이 제 아버지이자 형이었다. 어머니는 22년 동안 꽁꽁 감추었던 그의 정체를 자식들이 찾아내길 바랐다. 어린 시절은 목에 꽂힌 칼이야. 나왈은 스스로 그 칼을 빼내지 않았다. 끔찍한 고통을 무언으로써 감내하고 이겨내면서 저와 제 자식들을 관통하던 칼끝을 쌍둥이가 뽑아낼 때까지 기다렸다.

 

나왈이 태어난 세상은 단순했다. 불편한 건 잊어버리고, 새로운 건 두려워했다. 모두가 똑같이 멍청하고, 계속 멍청하길 바랐다. 그런 세상에서 나왈의 사랑은 무모한 것이었다. 무책임한 사랑은 이별을 강요당했다. 남편은 전쟁터로 끌려가고, 아이는 보육원에 보내졌다. 아이를 떠나보내면서 나왈은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약속한 피에로 코를 쥐여 주며 그를 다시 찾겠노라 다짐한다.

 

모두가 흑백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깔을 볼 줄 알았던 건 나왈의 할머니, 나지라 뿐이었다. 나지라의 조언에 따라 나왈은 글을 읽고 쓰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빼앗긴 제 자식을 찾아 떠난다. 아이의 흔적을 따라가며 마주치는 현실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민병과 난민, 학살과 전쟁.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전쟁통 속에서 나왈은 제 뿌리로부터 배웠던 것을 나누었다. 총알이 아닌 생각과 외침을 쏘는 법을 알리고, 전쟁의 피해자들을 대신해 총을 잡았다.

 

 

 

1+1=1


 

그러나 이는 ‘1+1=1’이라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민병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그녀는 지옥으로 보내졌다. 고문과 성폭행, 원치 않았던 임신과 고독한 출산. 잔혹한 과거의 제공자에게 고통을 갚아 주기 위해 참여한 재판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비극을 맞이한다.

 

험난한 여정의 원동력, 그토록 애타게 찾던 사랑의 결실인 빨간 코를 재회한 곳은 재판장이었고, 그들은 천륜이 아닌 증오스러운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났다. 그 후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길고 긴 침묵, 화염의 시작이었다. 불이 났고, 남은 이들은 화재의 원인을 찾아 헤맨다. 불씨를 찾은 그 순간, 무겁게 눌러왔던 침묵이 폭발했다.

 

엄마의 과거를 모두 마주한 잔느와 시몽에 의해 화염의 진상이 드러나고, 그들의 형이자 아버지인 니하드에게 어머니이자 피해자인 나왈이 남긴 사랑과 증오를 전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비로소 폭우가 내리고 모든 것이 잠재워진다.

 

이 책을 관통하는 모든 서사는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철저한 타인인 독자는 소설 내 외부인인 나왈의 공증인을 만나 점차 이야기의 중심부로 거슬러 올라가며 결말을 맞이한다. 이 흐름을 따라 나왈 역시어릴 적 헤어져야 했던 자신의 아이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끝내 사랑이자 증오를 마주했고, 잔느와 시몽은 원망스럽던 엄마의 침묵을 거슬러 올라 제 아버지이자 오빠를 찾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사랑할거야.


 

그 일련의 과정은 얽히고설킨 실뭉치의 꼬임을 푸는 것에 가깝다. 꼬임은 첫 부분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중간 부분부터 어딘가 모르게, 사소한 어떤 것으로부터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나왈과 그녀의 가족을 잇는 운명의 실 또한 그랬다.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약속했던 나왈이 재판장에서 자신의 아이를 마주하기까지, 그 중간 사이에서 겪었던 폭력은 그 사랑을 온전치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은 범죄자, 그리고 그 비참함을 무릅쓰게 만든 사랑의 원천인 제 자식이 엉켜 만들어 낸 꼬임을 나왈은 스스로 풀지 않았다.

 

그녀가 어릴 적 약속했던 무한한 사랑에는 증오가 얼룩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사랑의 맹세를 지켜야 했기에, 단단히 꼬여버린 운명의 끈을 잘라내야 했다. 조금의 잔여물도 남지 않도록 나왈은 평생 배우고 익혔던 말하는 법을 감추고 기다렸다.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가 대신 비극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과거라는 목에 꽂힌 칼을 뽑을 때까지 말이다.

 

 

 

거슬러 올라가다.


 

잔느와 시몽의 편에 서서 보자. 몇 년 동안 자신들을 등지고 외면했던 엄마와 그녀의 죽음, 그 원통함과 슬픔을 다 추스르기도 전에 영문도 모른 채 고발의 의무를 전가받은 심정은 어땠을까. 그 내용조차 자신들에 대한 것이 아닌 생전 모르고 지내던 형과 아버지를 찾으라는 이야기였다면, 엄마의 유언을 듣고 입에 담지도 못할 상스러운 폭언을 내뱉던 시몽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극한의 분노 깊숙한 곳에 깃들어 있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 결핍이 비뚤어진 것일 테다.

 

완강히 거부했던 마음을 고쳐먹고 엄마의 목소리를 따라 그녀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 그들이 마침내 모든 진실을 파헤쳤을 때, 폭발한 침묵은 그들의 과거, 엄마의 과거, 그리고 제 형이자 아버지의 과거를 모두 연소시켰다. 엄마가 느꼈을 절망도, 두 쌍둥이 남매가 가졌던 복잡한 마음도, 진실을 마주한 후의 감정과 함께 타버리고, 끝에 남은 잿더미에는 나왈의 잔인한 사랑만이 반짝였다. 그 앞에서는 엄마에 대한 원망을 마구 내뱉던 시몽도, 내면의 세계에서 엄마를 애타게 부르짖던 잔느도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 엄마의 침묵에 귀 기울였다.

 

<화염>에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이 비극의 시작이 어디인가, 끝이 어디인가를 찾는 여정이 아니다. 역사가 시작되는 곳, 나왈이 제게 배움을 가르쳐준 나지라의 묘비명을 새기던 그 순간부터 남겨진 이들에게 제 묘비명을 부탁하는 편지를 남기기까지. 시작인지 끝인지도 모르는 지저분한 실뭉치 속에서 지켜왔던 초월적 사랑의 역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리는 모두 존엄성과 인간성을 상실한 파괴적인 시간 속에서 사랑을 잃지 않았던 수많은 나왈로부터 탄생했다. 우리의 근원은 폭력인가, 사랑인가. 독자는 잔느, 시몽과 함께 그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각자의 근원과 사랑을 되돌아보게 된다.



 

[오수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