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년 전의 미술관, 이탈리아 여행 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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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이 중단된 지 정확히 1년이 지났다. 1년 전에는 유럽에 있었다. 교환학생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1년 전 오늘, 나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한국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돌아온 내가 마주친 현실은 전 세계를 마비시켜 버린 전염병의 유행이었다. 나의 여행도 그렇게 끝났다.
그래서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를 오랫동안 망설였다. 굳이 말하자면 타이밍을 놓쳤다. 한국 안에서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인데, 굳이 저 먼 나라 미술관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할까? 갈 수 있는 사람도 없는데 정보를 줄줄 나열하며 미술관을 소개해 봐야, 누구에게 소용이 있을까.
그렇게 미루던 이야기들이 1년 넘게 지나면서 많이 흐릿해지고 말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해버리게 되었다. 이제는 내 기억도 그다지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지루한 지금을 같이 한탄하며, 과거를 추억하는 가벼운 글을 써보고자 한다. 내 기억이 더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쓰는 글은 실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참고하기에는 부적절함을 미리 알린다. 그러나 언젠간 가볼까 하는 먼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기엔 나름대로 적절할 것이다.
11일간의 이탈리아 여행
이탈리아는 짧은 교환학생 기간 동안 가장 장기간 여행을 떠난 곳이다. 첫 이탈리아 여행이었기 때문에 큰 틀은 남들의 룰을 따랐다. 로마에서 피렌체, 베네치아를 거쳐 여행계획을 짰고, 일정 중 하루에 여유가 있어 피렌체 근교의 볼로냐에 다녀왔다.
이탈리아 여행 중 남들이 가는 여행지는 거의 다 다녀왔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곳들 말이다. 안타깝게도 모두가 기대만큼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우피치 미술관은 과연 명성만큼 화려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 체력을 다 빼앗겨 버렸다. 그 수많은 걸작 앞에서 나는 피곤해 감기는 눈을 겨우 뜨고 서 있었다. 콜로세움의 내부도 비싼 입장료를 내고 다녀왔지만,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다. 차라리 숱한 현대 건물들과 신호등, 자동차들 사이를 비집고 콜로세움의 외관이 드러나던 첫 순간이 백배는 더 감동적이었다.
그런 이탈리아 여행 중 오아시스가 되어주던 것이 도시의 현대미술관이었다. 현대미술관들은 어디든 도시를 많이 닮았다. 내가 지금 보고 느끼는 이 도시를 오랜 기간 이곳에서 나고 자란 작가들이 아름답게 기록해두었다. 게다가 대부분 관광객으로 북적이지도 않고, 입장료도 저렴하며, 내가 여행하던 시기의 겨울 찬바람을 든든하게 막아주었다. 누구에게든 같은 오아시스를 내어 줄 이탈리아의 현대미술관 두 곳을 소개하려 한다.
로마 현대 미술관
로마는 그 엄청난 관광지로의 명성만큼이나 붐비는 도시이다. 온종일 힙색에 손을 떼지 못하고 사람들에 치이며 지쳐버린 마음을 달래던 곳이 로마 현대 미술관이다. 이곳의 위치는 사람 많은 역 주변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한적한 공원 같은 곳을 걸어 조금 올라가다 보면, 그만큼이나 한적한 풍경의 미술관이 나온다.
대부분의 로마 관광지들이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같은 고대 유적들임을 고려한다면, 로마의 현대 미술관은 꽤 낯설지도 모른다. 의외로 몬드리안, 알베르토 자코메티, 뒤샹과 같은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마주칠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 읽은 책에서 우연히 보고 인상에 깊게 남았던 키스 반동겐의 작품을 이곳에서 만난 것이 큰 수확이었다.
상당히 여유로운 관람 환경을 추구하고 있는지, 중간중간 쉴 곳이 많다. 아쉬운 점은 영어로 된 캡션이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번역기의 이미지 검색 기능으로 관심 있는 작품을 찍어가며 관람했다.
그러나 이런 언어적 장벽이 더 재밌는 관람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당시 나는 한 전시장 홀에서 마주친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이 슬픔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곧 그 전시장이 슬픔에 관련된 각양각색의 작품들을 모아둔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참혹한 전쟁의 슬픔이 담긴 대형 회화의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작가의 추상 조각이 놓여있었다.
캡션을 읽을 수 있었다면, 슬픔을 참 난해하게도 표현했군, 하고 지나쳤을 작품이었다. 그게 불가능해지자 작품이 놓인 맥락에 집중하게 되었다. 의도는 오히려 더 정확하게 느껴졌다. 울퉁불퉁한 추상 조각 작품에서 말 그대로 슬픔이 느껴졌다.
다행히 이렇게 귀여운 손 그림 지도로 길을 잃지 않고 관람을 할 수 있고, 주요 작품들 역시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니 언어의 장벽을 겁낼 필요 없이, 편안하고 쾌적한 이곳에서 뻔하지 않은 여행의 보물들을 발견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볼로냐 현대 미술관
볼로냐는 피렌체에서 쉽게 닿을 수 있는 도시로, 주황색 건물들과 회랑으로 이루어진 도시 외관이 특징적이다.
볼로냐 현대 미술관 역시 중심부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사람들이 볼로네제 파스타와 유명한 젤라또를 먹으러 관광 중심부를 누빌 때, 우리의 발걸음은 조금 더 외곽으로 향해야 한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빵 공장을 고쳐서 만든 아담한 볼로냐 현대 미술관이 있다.
척 봐도 학생처럼 수수한 차림의 내가 입장하자마자 학생용 공짜 표를 흔들며 어서 오라고 외치던 데스크 직원이 생각난다. 표도 공짜, 규모도 대단하진 않지만, 볼로냐 현대미술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볼로냐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 그려낸 역사적인 흐름을 훑어볼 수 있다.
이곳의 가장 좋은 점은, 볼로냐를 닮은 화가 모란디의 전시 섹션이 크게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란디는 아트인사이트의 다른 글을 통해서도 한 번 소개한 적 있지만, 평생 볼로냐를 거의 떠나지 않고, 이 도시에서만 대부분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은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누군가에겐 새로운 도시와 장소가 영감이 되는 방면, 누군가에겐 똑같은 공간의 미묘한 새로움이 영감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모란디는 평생 자신의 집 겸 작업실에서 작품활동을 했고, 그러다 보니 작품의 소재도 단조로운 편이다. 대부분 병이나 접시들을 그린 정물이나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 정도가 다다. 그러나 당시 미술사의 흐름에서 등장한 복잡다단한 그림들 사이에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세계에 충실했던 그의 그림은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다.
탁한 톤으로 이루어진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그림들은 볼로냐라는 도시가 주는 느낌과 굉장히 닮았다. 하필 내가 볼로냐를 방문했던 날은 날이 흐려 사진에 예쁘게 담기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런 풍경이 주던 감정이 모란디의 작품과 더 닮아서 공감할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한국에서 수년 전 모란디의 전시를 한 적이 있어서, 이곳에서 한국어 도록을 읽을 수 있었다. 단조롭지만 지루하지 않은 모란디의 작품세계가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자에겐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수많은 관광지를 다 보고자 발걸음을 재촉하다 그 무엇도 기억에 남기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행자였던 나에게, 매일 보는 집 안마저 성실하고 깊숙하게 바라본 모란디의 작품은 깊은 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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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울림을 주는 이탈리아의 현대미술관들을 추천한다. 언젠가 이 상황이 지나가고 유럽을 다시 방문했을 때, 소매치기와 관광객들의 물결로 마음이 피로할 때, 예상치 못했던 발견과 감동을 가져다줄 현대미술관들을 방문해보길 바란다. 그곳에는 언어의 장벽도, 긴 설명도 필요 없는, 예술을 통한 공감이 있다. 이 도시에 대해 숱한 예술가들과 언어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이 도시를 새롭게 기억하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다.
[박경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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