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낙태죄와 재생산권 - 배틀그라운드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2.2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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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일, 낙태죄는 폐지됐다.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다른 입법 없이 2020년을 지나면서, 더 이상 임신중지로 인해 처벌받지 않게 되었다. 낙태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지난한 투쟁에서 ‘임신중지 비범죄화’ 요구와 함께 가장 많이 들렸던 단어는 ‘재생산권’이다. 여러 시민단체는 ‘낙태죄 폐지가 끝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재생산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생산권이란 무엇일까? 임신 중지 비범죄화가 재생산권의 핵심이 된 이유는 뭘까? 국제 사회에 재생산권이 본격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한 건 1994년 카이로 ‘인구 및 개발에 관한 국제회의’의 행동 강령에서다. 재생산권을 “모든 부부와 개인이 자녀의 수와 이에 관한 시간적, 공간적인 환경을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결정하고 이를 위한 정보와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 그리고 그들에게 최고 수준의 성적, 재생산적 건강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차별, 강압,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재생산에 관한 결정을 내릴” 권리를 포함하는 것이라 정의한 이 강령은, 재생산권을 인권의 틀 안에서 모든 개개인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로 인정했다.


재생산권이 개인의 권리라면, 이 권리를 보장받을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건 사회 공동체의 몫이다. 단순히 임신, 출산에 관한 권리가 아니라 가족 구성, 결합, 양육, 노동, 교육, 보건 등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 삶이 평등하고 건강하게 보장받기 위한 공동체 책임과 연결된다. 재생산권은 그 개념이 평등과 인권 개념에 기초한 만큼, 지금까지 국가 사회가 수행했던 억압과 통제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섹슈얼리티와 삶을 바라보는 패러다임 자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재생산권 논의가 투쟁의 장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낙태죄 폐지가 재생산권 논의의 핵심이었던 이유는, 낙태죄가 개인의 의지대로 임신, 출산을 결정할 여성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함으로써 재생산권의 핵심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임신중지 자체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와 특정한 태아는 생명권에서 배제한 채 임신중지를 허용한 모자보건법 14조 1항은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가 유구히 수행해 온 여성 억압 현실의 반영이었다. 2019년의 헌법 불합치 판정과 2021년의 낙태죄 전면 폐지가 되기까지는 이 불평등한 조항을 부수기 위해 노력했던 활동가들과 대중들의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낙태죄의 오류가 무엇인지, 이것이 폐지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재생산권이 무엇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보장받아야 할 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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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재생산포럼의 책 <배틀그라운드>는 “낙태죄 폐지의 의미와 재생산 권리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싸워 온” 성과재생산포럼의 성과가 담겨 있다. 총 12명의 필자가 참여한 이 책은 정치, 법, 보건의료, 종교와 장애, 퀴어까지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서 낙태죄와 재생산권을 질문하고 있다. <배틀그라운드>의 부제는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다. 이 책을 기획한 ‘성과재생산포럼’의 시작은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기획단’이었다. 장애 여성의 삶의 맥락에서 출발한 이 기획단은 여성의 출산/낙태할 수 있는 권리만이 아닌 정상성, 이성애, 기혼 여성의 틀에 갇힌 기존의 담론과 국가의 인구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했다. 재생산권을 임신, 출산의 사건만이 아닌 생애 전 과정에서 확보되어야 할 권리로 넓히는 패러다임 전환의 한가운데에는 이 성과재생산포럼이 있었다.


1953년 입법된 낙태죄는 2010년에 처음으로 낙태죄 위헌 소송이 제기되었고, 대법원은 2012년 낙태죄가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2016년, 임신 중지 수술을 시행한 의사의 처벌을 강화하는 입법 예고에 반발해 전국적인 ‘검은 시위’가 일어났다. 2018년, 69회의 임신 중지를 시술한 혐의로 기소된 의사가 다시 헌법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이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고, 새로운 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한국 형법에서 낙태죄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 ‘재생산권’이란 단어가 논의되기 시작한 건 2016년 낙태죄 폐지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였다. 임신 중지의 비범죄화는 재생산권의 영역 안에 있지만, 재생산권을 사회적 논의의 장으로 이끌고 온 건 수많은 여성의 외쳐온 낙태죄 폐지 운동이었다. 재생산권 논의에 대해 알기 위해선 2012년 낙태죄 합헌 판결부터 2019년 헌법 불합치까지, 여성의 몸을 통제해온 성정치 담론의 흐름과 논쟁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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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를 정치화하고 공론화한다는 것은 낙태죄의 궁극적 준거가 되는 섹슈얼리티를 구성하는 다양한 권력에 대한 비판이자, 정상성 규범과 도덕을 구성하는 담지자, 그리고 위계와 경계로 나타나는 배치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다.”

- 성과재생산포럼, <배틀그라운드>,  39p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낙태죄는 언뜻 보기에 이 두 주체의 이해관계 충돌로 보인다. 그러나 <배틀그라운드>는 2012년 합헌 판결을 이끌어냈던 이 ‘생명권 대 생명권’ 구도의 허구를 지적한다. 천부인권인 생명권은 예외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개인은 국민으로부터 생명권을 박탈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생명권의 책임은 국가에 있고, 국가는 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을 뿐 생명권은 개인들이 서로 경쟁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그러나 여성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를 동일 선상에 놓고, 태아를 보호하려는 낙태죄는 사실상 여성의 몸에 대한 국가의 억압이다. 성과재생산포럼의 필자들은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을 함께 문제시하며 이 두 법의 목적은 태아의 생명권 보호가 아니라 특정한 우생학적 인구만을 보호하고 재생산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낙태죄가 여성 신체와 태아 사이의 갈등이라면, 모자보건법은 국가의 인구 정책과 밀접히 연결된다. 낙태죄를 예외로 허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은 14조 1항에서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경우”나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 인공중절 수술을 허용한다고 명시했다. 죽여도 되는 태아와 죽이면 안되는 태아가 따로 있는가? 태아의 생명권이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우선할 만큼 신성하다고 본 판결과 모자보건법은 모순된다.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한다면, 모든 태아를 죽음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신체적 질병, 장애가 있는 태아는 보호 대상에서 배제함으로써 국가는 생명의 위계를 상정하고, 국민의 재생산을 관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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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임신 중지를 범죄로 처벌하는 동안, 한국 역사의 다른 단면에서는 조직적인 중절 수술이 이뤄지고 있었다. 한센인, 신체장애인을 비롯한 수용시설 거주인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 강제적으로 단종, 낙태 시술을 받았다. 수용 시설의 대표적 사례인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었음에도 한센인 수용 병원은 처벌의 일환으로 단종 수술을 감행했다. 수용 시설은 거주인들의 성과 재생산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장소다. 거주인들은 수용 시설에서 무성적 존재로 간주되고 성적 쾌락과 임신, 출산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당한다. <배틀그라운드>는 이런 강제 불임 수술이 부랑인, 성매매 여성, 혼혈아 등  당시 사회 상황이 낳은 사회적 극빈층들을 ‘비정상’ 신체로 규정해 재생산 자격을 박탈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낙태죄와 모자보건법, 강제 불임수술은 모두 억압과 폭력, 범죄화를 통해 국가가 원하는, 국가 발전에 적합한 몸을 ‘제 입맛대로 생산해내는’ 기제였다.


수용시설 거주인들을 대상으로 한 불임 수술은 많은 부분 사라졌을지 모르나, 트랜스젠더는 법적 성별 정정을 원할 경우 여전히 불임 수술과 성기 형성 수술을 강제당한다. 인터섹스(간성[間性])는 성별 이분법에 맞는 몸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동의 없고, 불필요한 외과적 수술을 감내한다.


재생산은 사회 체제 내에서 새로운 몸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재생산에 대한 과거의 논의는 저출산 현상에 대한 국가적 우려를 넘어서기 힘들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은 저출산을 넘어, 사회에 존재하는 몸들이 국가에 대항해 주체로서 삶을 살아갈 권리를 요구하는 시발점이었다. 우리의 육체와 섹슈얼리티는 누구의 것인가. 재생산권은 단순히 남성/여성 양성 구도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인터섹스(간성[間性])부터 트렌스젠더까지, 재생산권은 국가 이익의 명분 아래 억압받고 희생됐던 삶들의 권리를 질문하는 투쟁의 장이다. <배틀그라운드>에서는 낙태죄에서 시작해 각기 다른 다양한 삶들이 재생산권이란 투쟁의 장 안에 하나로 엮이는 모습을 드러낸다.


 
“섹슈얼리티의 통제는 연령, 혼인 여부, 국적, 지역적 조건, 장애, 질병, 경제적 상황, 가족, 이주 상태, 성적 실천의 내용,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이 촘촘하게 위계화된 교차적 억압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낙태죄를 정치화하고 공론화한다는 것은 낙태죄의 궁극적 준거가 되는 섹슈얼리티를 구성하는 다양한 권력에 대한 비판이자, 정상성 규범과 도덕을 구성하는 담지자, 그리고 위계와 경계로 나타나는 배치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발화할 수 없는 언어, 설득적일 수 없는 경험, 비난을 감내해야 하는 특성, 경멸해도 된다고 여겨지는 조건과 같은, 그래서 인권과 시민권이 제한받거나 박탈당해도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옹호이다.“

- <배틀그라운드>,  39p

 


책은 입문서처럼 짧고 굵게 다양한 재생산권의 맥락을 다룬다. 더 깊이 있는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읽어보기를 권한다. 낙태죄 전면 폐지, 그 시작점에 있던 책 <배틀그라운드>는 우리가 시급히 고민해야 할 질문을 묻고 있다. 그 질문에 답하는 건 우리 모두의 몫이다.


‘내 몸의 주인은 나’라는 자유주의적 담론이 재생산권을 보장할 수 있을까? 동성애자부터 트랜스젠더까지, 퀴어한 몸은 재생산의 장에서 어떤 섹슈얼리티를 수행한 채, 무엇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대리모 등 보조생식기술의 발달은 재생산의 장에 어떤 쟁점과 변화를 불러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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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 글은 낙태(落胎)와 임신중지는 동일한 행위를 뜻하는 말이지만 태아에게 초점을 맞춘 용어인 ‘낙태’ 대신 임신의 주체인 여성에게 초점을 둔 ‘임신중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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