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우리는 동물이다 - 짐을 끄는 짐승들

글 입력 2021.02.28 14:1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dog-1149188_640.jpg

 

 

본가의 바둑이가 새끼를 낳았다. 바둑이는 개다. 바둑이는 새끼를 핥아주고 젖을 물리고, 바쁘게 돌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바둑이가 하는 일이 너무나 인간이라 놀랐다. 바둑이는 사랑과 기쁨, 우정, 논리적 추론까지 모든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목줄을 떼어낼 힘과 사람말을 하는 기술 빼고. 우리가 사람들을 ‘인간적’이라 부를 때 드는 행동적 특징, 사랑, 우정, 행복 추구, 다양한 게으름과 실수, 질투, 악의가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건 동물 한 마리만 오래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적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특징들이 사실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면, 그 특징을 가진 생물은 모두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리 바둑이는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동물과 인간 사이에 선을 긋고 무감각을 학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인간으로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 사랑, 연대, 돌봄과 친밀함 같은 것이 사실 모든 동물의 일원으로서 지니게 된 특징이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인간은(나는!) 바둑이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동물로서 목줄에 매여 젖을 물리는 그를 보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인간일까? 나는 어디까지 동물이고, 어디서부터 인간일까?

 

기쁘게도, 인간이자 동물로서 나와 같은 고민에 천착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장애 해방과 동물 해방의 친연성을 간파하고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냈다.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 이 책 속에서 비장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는 서로 뗄레야 뗄 수 없으며, 장애 해방과 동물 해방 운동은 이 이데올로기의 폭압과 위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분투하며 서로 교차한다.

 

 

짐을 끄는 짐승들_표1.jpg

 

 

 

1. 비장애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



 

”종차별주의란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신념으로, 우리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를 점한다며 인간의 동물 이용 및 지배를 용인한다. (...) 하지만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인가? 아니, 그 전에 동물이란 무엇인가?”

 

- 161p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 수나우라 테일러는 작가이자 예술가, 장애운동가, 동물운동가이다. 선천적 관절굽음증을 가진 그는 장애 당사자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탐구한다.

 

그는 어렸을 때 닭이 빽빽이 들어찬 트럭을 본 걸 잊지 못한다. 배설물과 죽어가는 닭의 냄새에 그는 숨을 참는다. 그 행동은 "우리 바로 옆에서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동물과 관련한 작품을 만들고, 장애학과 장애 운동을 접하면서 그는 장애와 동물 억압이 뗄 수 없는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것, 해방의 길 역시 그 교차로에 있을 거라는 사유를 펼쳐나가게 된다.

 

 

"모든 몸은 비장애중심주의의 억압에 노출되어 있다."

 

- 66p

 

 

비장애중심주의는 "장애가 없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고 정상이며, 반대로 장애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당연하게 상정하는 가치관이자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몸을 배제하고 차별, 억압해 정상적이지 않은 몸들을 부정적으로 규정한다. 기존의 비장애중심주의 비판은 억압받는 몸을 인간의 몸에 국한한 반면, 테일러는 동물의 몸 역시 억압받는 당사자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동물화, 비인간화(장애인은 '절반만 인간' 혹은 '원시적', '유인원'등으로 비유되던 역사)에 맞서 자신들이 인간임을 주장해온 장애 해방 운동에서 동물성은 풀기 어려운 문제다. 테일러는 인간의 동물화라는 잔인한 현실과 동물 멸시를 넘어,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2. 동물의 인간성, 인간의 동물성



 

“인간 또한 동물임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고, 인간을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로 제시하는 종차별주의와 위계적 분류라는 유산이 인간을 향한 극심한 편견을일부 만들어냈음을 상기한다면 어떨까?”

 

- 178p

 

 

장애와 마찬가지로 동물에 대한 정의는 지배 권력의 입맛대로 계속 변해왔다. 1920년에 다운증후군을 인간 이하 범주로 배제하는 논리는 그들이 말하기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이었고(배울 수 있다), 1970년에는 읽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읽을 수 있다), 1990년대에는 우디 앨런의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이 논리에서 다운증후군이 무얼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인간 이하의 범주를 상정하는 골대가 계속 변한다는 것이다. 이 변화의 목적은 장애를 계속해서 비장애 신체보다 열등한 몸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동물 억압에서도 일어난다. 데카르트는 동물이 기계와 같이 영혼도 감정도 없다고 보았으며, 동물은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고, 언어를 쓸 줄 모른기 때문에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보았다. 앞의 전제 중 현재도 유효한 건 없다. 동물의 감정, 인지 및 추론 능력, 도구 사용, 언어 능력은 포유류, 조류, 어류까지 많은 동물들에게서 발견되고 있다. 동물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는 다른 기술과 방식, 다른 감각으로 삶을 살아간다. 다만 인간의 종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폭력으로 그 삶의 가능성을 박탈당하고 있을 뿐이다.

 

동물의 정의가 지배 권력이 만들어낸 임의적인 것이라면 무엇이 동물이고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종차별주의가 만들어낸 부정적인 편견과 위계가 아닌, 인간이 동물을 이해하고 그 자체로 존중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는 모두 동물이다." 수나우라 테일러는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하고, 동물이라는 건 차별과 억압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3. 상호의존


 

 

"의존은 종종 착취의 구실이 되는데, 이는 의존이 극히 부정적인 함의를 갖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의존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의존적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끝낼 것이다.

(…)

우리 모두는 의존의 스펙트럼을 따라 존재한다. 의존을 결코 부정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 오히려 우리 세계와 관계에 꼭 필요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 352p

 

 

장애 해방과 동물 해방을 잇는 테일러의 사유는 여러 결을 짚으며 나아간다. 그 치밀한 과정에서 <동물 해방>이란 역작으로 동물 해방 운동을 이끌어낸 피터 싱어의 철학, 템플 그레딘의 도살장 설계, 소규모(인도적) 도살이 공장식 축산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양심적 잡식가', '야생'과 순수한 '자연'의 우월성을 말하는 환경운동가, 장애 치료를 위해 동물 실험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힘을 잃는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인간과 동물 모두 취약성과 돌봄을 바탕으로 삶을 영위하며, 의존과 돌봄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자 사회를 구축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비장애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가 만들어낸 위계와 억압이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될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그 곳은 불완전하게 아름다운 몸들이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돌보는, 상호의존의 세계일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책이 담고 있는 테일러의 촘촘한 사유, 그 경이로움과 혁명성, 치열한 통찰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테일러의 글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우리 눈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가르고 새로운 세계를 펼쳐낸다. 베일 너머에 항상 있었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고, 가능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 테일러는 자신의 언어로 우리와 그 세계을 잇는 다리를 놓았다.

 

인간이자 동물로서, 이 다리를 걷는 황홀함을 모두가 경험하길 바란다. 밑줄로 가득찬 내 책의 마지막 몇 구절을 옮긴다.

 

 

"(가축화된)동물들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상기시켜주지만 또한 우리가 심각한 강제력을 동원하고 이들을 착취했다는 사실을, 즉 의존적이고 취약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들 위에 거의 항상 군림했음을 상기시켜준다. 우리가 이 동물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건 그들의 의존과 상호의존을 존중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자연스러움을 존중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와 함께 이 행성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서 갖는 자연스러움 말이다."

 

- 364p

 

 

"서툴고 불완전하게, 우리는 서로를 돌본다."

 

- 372p

 

 

cow-3614642_640.jpg

 

 

[김나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