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극장 [공간]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 광주극장
글 입력 2021.03.02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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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광주에 내려갔다.

 

보통 1년에 2~3번 내려가는 광주는 갈 때마다 제 모습을 바꾸었다. 자주 가던 카페 대신 미용실이 들어와 있는 식으로. 아쉬움과 설렘은 매번 교차했다. 하지만 광주극장만은 시내 한편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를 반겼다.

 

 

 

가장 오래된 극장의 자취



광주극장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믿음은 그간의 역사에서 나온다.

 

1935년부터 지금까지 85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역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이라는 역사.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에 의해 설립돼 2002년 예술영화 전용관이 된 광주극장. 오랜 세월 동안 곡절 없이 운영을 해왔던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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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엔 큰 불이 나기도 하고, 2000년대 초엔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고, 2015년엔 영화진흥위원회(예술 영화관들의 단비)의 지원이 끊기기도 했다.

 

사라질 뻔한 적이 많았지만 극장은 매번 결연한 의지와 함께 일어났다. 몇 번의 정비 후엔 1개의 관, 3층 856석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광주극장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정회원으로, 전국의 시네마테크 전용관(예술극장)과 협력한다.

 

 

 

특별함과 유일함


 

광주 극장엔 아릿하면서도 텁텁한 향이 스며 있다. 마치 고서점에 온 듯하다. 고서점에서 뜻밖의진귀한 책을 발견하듯 이곳에서도 특별하고도 유일한 것들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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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극장들은 손으로 직접 그린 간판을 극장 앞에 걸어 두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며 실사 간판이 극장 앞에 내걸리자, 붓으로 직접 칠한 손 간판은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광주극장은 유일하게 손 간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매년 간판 학교를 운영하고 시민들이 그린 간판을 내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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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극장은 작년 ‘원데이 시네마’를 개최했다. 영화제가 아니면 쉽게 극장에서 만나기 어려운, 상영 시간 5시간 이상의 영화들을 소개하는 기획전이다.

 

상영작은 <천일야화>, <사탄탱고>, <철서구> 등이었다. 이 중 <사탄탱고>의 상영 시간은 무려 7시간 18분이다. 이외에도 색다른 기획전이나 영화제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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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을 찬찬히 둘러보면 광주극장의 역사부터 옛날 영화관의 풍경들, 옛날 영화 포스터, 티켓 변천사, 기획전 굿즈 등을 살필 수 있다. 극장 한쪽에서는 굿즈도 판매한다. 배지, 스티커, 텀블러, 에코백, 지난 영화제 포스터, 소극당과 협업한 굿즈 등이 마련돼 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전국적으로도 예술극장은 흔치 않다.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멀티 플렉스 극장이다. 그래서 처음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방문한다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들을 위해 간단히 이용 규칙을 소개해보려 한다.


정시상영: 영화 시작 20분 후에는 입장이 불가능

음식물 반입금지: 음료나 커피는 가능

이용 가능한 층 확인: 동절기(11월~4월)엔 2, 3층만 사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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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 5분 전 종소리가 울리고 정시가 되면 별도의 알림 없이 영화가 시작한다. 관객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영화가 시작하고 20분이 지나면 상영관에 입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음식물 반입이 불가하다. 와그작거리는 팝콘 소리 대신 영화 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동절기에는 1층 사용이 어렵다. 1층에서 관람하고 싶다면, 여름, 가을을 노려보는 게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극장


 

광주에 간 김에 집 근처 동네서점에 들렀다. 미루고 미뤄둔 곳이었다.

 

사실 이곳은 집에서 노래 한 곡을 재생하고 걸어가면 도착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있다. 늦게 도착한 곳이니 더 특별한 책을 사고 싶었다. 이왕이면 동화책이 좋을 것 같았다. 여유로운 광주 라이프를 즐기고 싶었으니까.

 

매대 사이를 서성이며 다양한 책을 펼쳤다. 유튜브에서 추천받은 동화책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도 있었다. 큰 고민 없이 검증된 작품을 고를까도 했지만, 선뜻 내키진 않았다. 그러다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극장>을 본 순간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내가 이 책을 사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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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투박하지만 따뜻한 그림체가 끌렸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가 됐다. 다 읽고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꼬옥 품에 안고 있고 싶은 책이었다. 고양이의 시선으로 광주극장의 역사를 그려내서 귀여웠다.

 

이 책을 사고 나니 광주에 있는 동안 영화관에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다음 날 나는 광주극장에서 <캐롤>을 봤다.

 

 

 

광주극장과 나


 

광주극장은 영화관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공연장 같은 느낌이다. 영화로 치면 <시네마 천국>보다는 <오페라의 유령>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기존 극장보다 높은 2~3층에서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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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온 극장이지만 자주 온 것처럼 친숙했다. 예전엔 소중한 친구와 함께 왔고 혼자서도 왔다. 여름엔 한파 같은 에어컨 바람의 기세에 못 이겨 친구와 담요를 나눠 덮기도 했고, 겨울엔 히터의 손길이 닿지 못해 얼어버린 발을 비비며 추위를 녹이기도 했다. 관람객은 많아 봐야 10명 이하였고 나 홀로 영화를 볼 때도 있었다.

 

원래는 상영 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데 늦게 입장한 탓인지 이번엔 듣지 못했다. 낮고 탁한 종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종소리가 잊고 있던 추억 한 조각을 가져오지 않을까도 싶었다. 하지만 아쉬움을 남겨 잘 됐다고도 생각했다. 약간의 미련을 두고 와야 또 찾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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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은 역시 좋았다. 좋아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극장에서 봐서 다행이었다.


누군가 내게 어떤 극장을 제일 좋아하냐고 물을 때면, 항상 광주극장이라 답했다. 다른 곳을 떠올릴 여지도 없었다.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곳이지만, 지금까지 자주 찾지도 않았지만 광주극장은 언제나 극장계의 고향처럼 애틋했다. 오랜 추억과 공간의 정취가 뒤섞여 더욱 그랬다.

 

하지만 광주극장은 어떤 이가 가더라도 흠뻑 빠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85년간 달군 온기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극장이 됐으니까.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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