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없는 기분'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구정인 만화 <기분이 없는 기분> 서평
글 입력 2021.02.22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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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기분이 없는 기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신이 충분한 휴식과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 환자임을 알게 되는 시기는 우울증이 상당히 진행되고 나서인 경우가 많다. 좋아하던 것에조차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고 단순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도 버겁고 일의 능률은 끔찍하게 떨어진다. 그런 상태에 의문이 들어도 대개 자신을 돌보지 못한다. 이러한 고통을 이 정도로 겪은 것도 처음이거니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인의 상태가 혼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이란 것을 모른다.

 

전보다 우울증의 경험이 쉽게 공유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날것 그대로의 우울증 초기 증상을 제 때에 세세하게 접하기는 어렵다. 사실 정신이 건강할 때는 그런 정보를 관심 깊게 찾아보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우울의 구렁텅이로 빠지기 시작한 사람들은 자기에게 박해서 고통을 축소하거나, 자신을 남들과 다른 이상한 존재로 보며 자신을 숨긴다. 그 때문에 공감과 지지, 필요한 지식을 얻을 기회가 극히 드물다. 그래서 모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이 심신의 병에는 공통된 증상과 수순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어린이책 디자이너 구정인의 첫 만화 <기분이 없는 기분>(창비, 2019)에 잘 드러나 있다.

 

<기분이 없는 기분>의 이야기는 30대 프리랜서 그림 작가 혜진에게 어느 날 아버지의 고독사 부고가 전해지며 시작된다. 혜진의 아버지는 과거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으며, 자식이 가정을 꾸린 후에도 딸의 입장을 생각해 주지 않아 주인공에게 불만과 불안을 안겼다. 살가울 수 없었던 부녀관계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더이상 수정할 기회 없이 ‘끝나버렸다.’

 

혜진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보다 장례와 고인의 삶을 행정적으로 정리하는 각종 법적 절차가 더 버겁게 다가오는 듯 묘사된다. 어쨌든 일상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 보인다. 갑작스러운 상실을 걱정해주는 주변인들에게 오히려 괜찮다고 답하기도 한다. 아니, 사실 혜진은 점점 잠에 들고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진다.

 

이 증상은 점점 심각해져서 몇 시간 동안 나가야 한다고 되뇌면서도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했다는 죄책감에 몸서리치며 더욱 침대 밖으로 나갈 기운을 잃어버린다. 침대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딸의 유치원 하원을 위해 겨우겨우 밖으로 나간다. 자식이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앞에서는 밝은 모습을 연기한다. 가장 가깝고 편한 사람인 남편에게 화를 자주 내게 되었으며, 화를 낸 직후에는 끔찍한 죄책감을 느낀다. 자기 효능감이 극도로 떨어진 혜진은 아파트 복도에서 화단을 내려다보며 죽음을 상상하지만, 그냥 내려다본 것뿐이라며 합리화한다. 그렇게 감정이 어딘가 마비되기 시작한다.

 

이윽고 주인공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을 듣고도 아무 ‘기분이 없는 기분’을 느낀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좋아하던 것들에도 흥미가 없고 잘해오던 일들도 할 수 없다.’ ‘기분도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가히 우울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혜진은 자신의 그런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위기감을 느끼기 보다는 편리하다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기분이 없는 기분’. 나 또한 겪어봤던 기분이었다. 지나고 보니 이 기분은 우울증 진행 단계에서 하나의 터닝 포인트였다. 더이상 지체하지 않고 자신이 치료 국면에 들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마지노선은 ‘텅 빈 마음’을 인지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울감이 안정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 우울의 바다는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진다. 우울감이 곧 자신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얄궂게도, 당시 나는 이런 기분이 차라리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꼭 혜진처럼. 이 기분을 만나기 전까지 불안과 고통, 초조함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체념한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내 ‘이상한 상태’를 주위에 숨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힘든 마음이 들지 않고 아무것도 못 느끼는 상태가 차라리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팔을 다쳐 고생하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게 되면 신경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줄 알고 곧장 병원에 달려갔을 것이다. 마음의 병은 왜 이리 자각하기도, 인정하기도 어려울까?

 

그때 주변에 도움을 청했더라면 더 빠른 회복이 가능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안타까움이 고개를 들었다. 이 책을 좀 더 빨리 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그 가라앉고 있으면서도 내면은 텅 비어 도리어 붕 뜨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이상 신호였음을 알아차렸더라면. ‘기분이 없는 기분’의 의미를 알고 있었더라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여, 경향이 파악될 정도로 축적된 괴로움의 시간. 그중에서도 우울증에 빠져들어 가는 시기의 양상을 구정인의 <기분이 없는 기분>에서 알아볼 수 있다. 죄책감, 좌절감, 타인의 시선에 대한 경계심, 그리고 남에게 못할 말을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하는 행위는 우울증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재료다. 업무를 볼 힘은커녕 몸을 움직일 기력이 없어지고, 초조함과 불안 속에 즐거운 감정은 물론 두려움까지 마비되는 것은 우울증의 정해진 수순이다.

 

우울증을 겪고 있지만 자신이 우울증에 빠진 줄은 모르는 사람, 소중한 이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이 도움되지 않을까. 이야기 속의 혜진, 그리고 내가 보냈던 것과 비슷한 시간을 지나는 누군가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울증에 빠지기 시작한 당신이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자신을 아껴주기를 바란다. 설령 당신이 ‘기분이 없는 기분’을 느낀 지 한참 뒤에 이 책을, 이 글을 접하더라도 괜찮다. 그럼 당신은 혜진의 회복 과정을 더 공감하며 따라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 주인공의 회복 과정은 책에서 확인하길 바라며, 나는 혜진의 또 다른 독백을 인용함으로써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나는 겁이 났던 것 같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보려고, 자꾸 괜찮다고만 했었나 보다.

마음을 아주 조금 열어봤더니, 역시나 불안하고 무섭다.

모르는 척하고 얼른 도로 닫아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고장난 데를 고칠 수 없겠지.’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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