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세계의 임의성과 인간의 방향성 고찰
글 입력 2021.02.22 15:3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왜 제목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가? 

 

영화적 배경은 1980년대로 연쇄살인사건의 발생률이 극악이었던 시대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디스토피아적인 면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혹은 존재 혹은 세계의 임의성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똑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는 풍차와 살인사건들의 평행선은 사막과 같은 허허벌판의 인서트와 함께 ‘지루한 반복’’황량한 허무함’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안톤 쉬거(싸이코)와 에드 톰벨(보안관) 두 노인의 공통점은 확실성이 없으며 모호함으로 뒤덮여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합목적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아시스 같은 것인지를 절감하는 인물들이다. 안톤 쉬거의 “규칙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품위있잖아”와 필요라는 단어의 혐오에서 알 수 있으며, 에드 톰벨의 “인간과 소의 싸움도 확실한 건 모른다는 거예요””자네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의 발언에서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두 인물처럼 유사한 인물은 없다. 다른 청장년층으로 나오는 인물들에게서는 무언가 무모한 희망과 용기가, 목적의식이 보인다.

 

과연 인간을 의미짓게 하는 것이 ‘이성’’경험’’신뢰’’상상’일 수 있는가? 이러한 인간이 만드는 사회는? 혹은 사회가 부여하는 인간은? 인간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내가 보이나?”에서 알 수 있 듯, ‘나’가 존재하는가? 각자가 생각하는 ‘나’는 무엇이길래 쉽사리 존재한다고, 보인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이 보는 나는 나일 수 있는가? 안톤 쉬거가 대화의 본질은 미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분명 인간에 대한 임의성뿐 아니라 인간의 의사소통, 언어망, 의미의 임의성을 전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위로 자신만의 규칙 즉 자신의 심기를 건들이는 사람을 죽이고, 어쩔때는 동전던지기를 하여 예외를 만드는. 그의 규칙을 따라 살인을 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임의성을 지닌, 우연성의 존재일 수 있어도 자신만의 체계가 옳고 정당화된 규칙이라고 우기며 사회의 체계, 타인의 체계를 무시하는 것이 과연 잘한 행위인가? 우리 사회의 체계가 존재하는 것은 사회계약론과 같은 개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며 개개인 각자 다른 자신만의 규칙을 가진 채 삶을 살아낸다. 안톤쉬거의 행위와 존재적 의미에 대해서는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두 인물의 허무함에서 비롯되는 대화들은 지금까지 근대적 ‘인간’을 규정짓는 것들에 무수히 많은 비판을 가한다.

 

더 나아가, 카슨 웰스가 규칙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며 묻는 안톤 쉬거에게 네 본성은 미친 것이라 응하는 점은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카슨 웰스는 규칙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안톤 쉬거가 이 의의를 묻는 것에 비판을 가한 것일까? 혹은 본인도 의미를 모르는 것일까? 만약 후자라면, 인간의 의미는 허황에 그침에도 불구하고 그저 커저가는 눈덩이마냥 맹목적인 믿음으로만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쩌면 가장 희망을 지닐 수 있는 인물이 르웰린 모스의 아내인 칼라진 모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처음 사건이 있고”알고 싶어”에서 “알고 싶지도 않아”라는 태도를 취한다. 사건에서 개입이 적은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야 말로 임의적인 사건들로 부유하는 이 사안에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안톤 쉬거에게서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며, 그의 선택지 외의 다른 답변을 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체계,목적을 따지려 하는 것이 인간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인간에 대해 알려고 하는 질문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에 대한 다른 방향을 시사하는 인물같다. 그렇지만 목적,체계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것이 정답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던져봐야 할 것이다.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목적에 대해 정답을 알고 있는 존재는 없기에 우리는 늘 고찰하고 재고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에드 톰벨의 독백과 황량한 배경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은 에드 톰벨과 로레타 벨의 대화로 끝을 맺는다. 에드 톰벨의 꿈 내용에는 분명 허무의 숲을 헤메는 아버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함께한다는 동행자의 존재가 함께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우리를 논의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시간,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힘, 이를 들어줄 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것을 절대적인 존재의 필요성을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무언가를 들어주고 같이 행해주는 존재의 필요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와 같이 해석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만들었던 미국의 사회적인 배경을 살펴본다면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단순 스릴러극이 아닌 미국의 역사에 대한 잔인한 비판을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살인마 안톤쉬거를 우연성의 화신, 절대악을 대표하는 철학적 은유를 담은 인물이 아닌 미국이라는 나라의 탐욕과 폭력을 화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미국은 동부의 13개 주에서 시작하여 여러 전쟁을 치르며 현재의 영토를 확립한 후, 세계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 왔다. 작품에서의 에드가 꾼 꿈은 앞세대, 즉 미국의 탐욕 이전 시대인 평화롭고 질서와 체계가 잘 잡혀진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고 추구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에드의 표정과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세대는 노인 즉 현명하고 경험이 많은 존재에 대해 존경하지도, 논점에 껴주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그것들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지한 채 영화가 막을 내린다. 이와같이 동행자라는 희망을 한줄기를 보여주기보단 조금 더 암울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비추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잠깐 언급한 것처럼 '노인'에 대한 우리의 사고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계속 다르게 정의내려지고 있다. 이전에는 현자와 같이, 삶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 보았지만 현대 우리 사회속에서는 어떠한가? '틀딱'과 같은 노인을 무시하는 단어의 출현부터 시작해서 노인을 공경하는 태도가 아닌 노인은 무식한 존재라는 프레임이 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 세계, 언어망, 의사소통의 임의성, 경험을 쌓은 노인의 힘이 없는 것은 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면 때문일까? 인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면 때문일까? 혹은 둘의 유기적 결합일까? 다른 이유는 있을까?

 

인간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까?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우리는 늘 이러한 고민들을 해나가야 한다.

 

 

[엄승화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